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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5 광복 63주년을 맞이하면서
박교서 기자
2008-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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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용수 고갈. 이미 진행되고 있다.
정기보 취재기자
2008-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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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백산 국망봉
소백산 국망봉(해발 1420.8 미터)
오래 기다려야 가는 산이 있다.
마음의 변덕이 아니라 상황의 변덕때문이다.
큰 산은 언제나 변덕을 부린다.
자신이 아우르는 넓은 영역에서 일어나는 세세한 일들조차도 다 평정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오늘 그 인간의 변덕 때문에 미루어 놓았던,
산의 변덕을 부리는 소백산을 향한다.
초암사를 기점으로 국망봉에 이르는 지름길을 택한다.
초암사에서 좌측에 만나는 계곡이 퇴계 이황선생이 명명한 죽계9곡이다.
담아야 하는 아름다움의 극치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계곡이다.
어제 쏟아 붓고서 훌 떠난 소낙비에 불어난 물이 웅장하다.
그 흐르는 위용으로 계곡이 소란하다.
명경지수가 바로 여기이다.
여름더위의 시원함을 선사하려고 밤새 정수를 마친 듯하다.
탁한 색깔이라곤 없는 맑은 물들이 콸콸 흘러내린다.
시간은 바위도 뚫는다.
시간에 가미된 흐르는 물은 바위웅덩이도 넓힌다.
웅덩이에 가득 맑은 물이 흐름을 이어가면서 고여있다.
이름하여 선녀탕이다.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가 있었다.
나무꾼과의 전설같은 만남을 기대하면서 시야가 확 트인 곳에 옷을 고이 벗어 놓고 목욕을 하고 있었다.
어디선가 나타난 나뭇꾼이 선녀가 벗어 놓은 옷을 본체만체 지나쳤다.
몹시 화가 난 선녀가 나뭇꾼에게 말을 하였단다.
"왜, 옷을 안 집어 가세요?"
나뭇꾼이 대답하였다.
"나는 그 나뭇꾼이 아니고 금도끼 은도끼 나뭇꾼이거든요."
산에는 음미가 있다.]
그래서 웃음도 미소이다.
한바탕 크게 박장대소를 하고 나니 국망봉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가볍다.
웃는 얼굴 가벼움이 결코 걸음 가벼움은 아니지만 이 순간 그저 가벼운 것이다.
굴참나무며, 박달나무가 하늘은 가리고 있다.
나무의 틈새로 부채 빗살을 그리면 지상으로 내리 달려온 햇살이 외롭다.
가파른 능선 하나만 더 오르면 국망봉까지 1.1키로 지점인 봉두암이다.
만년세월에도 변형을 하지 않는 위세로 서 있는 바위이다.
걸음 하나를 옮기기가 무섭게 장대비가 막무가내로 쏟아 붓는다.
아직은 젊은가.
아랑곳하지 않고 더 서둘러 정상으로 오른다.
가만두지 않겠다는 듯이 더 굵은 비가 얼굴이며 온몸을 때린다.
하늘을 가린 나무를 우산삼아 피하여 보지만 30분 이상을 그렇게 장대비가 내린다.
나중에 알게 되겠지만, 산 초입에는 비 한 방울 안 내렸단다.
산이며 바위며 나무가 세면을 마치고 웃고 있다.
변심하지 않고 버틴 우리들도 비에 흠뿍 젖은 몰골을 하고서 웃는다.
소백산이 비로소 자신을 찾은 탐방객을 영접하려는 듯 창공 맑음을 선사하고 있다.
봉두암앞 넓은 평면의 바위 터에 서서 물 한 모금 크게 삼킨다.
봉황의 머리형상을 하고 있는 바위라 그렇게 이름 부른다.
바위의 거대함 위로 세월의 하얀 채색을 본다.
구름처럼 하얀 얼굴을 하고서 몸을 파르르 떨면서 추위를 느낀다.
봉두암에서 국망봉으로 이르는 1.1키로의 길이 제일 험난한 오름길이다.
세상에 오름이 험난하지 않는 것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 중에서도 산에서의 험난한 오름만이 제일 평화롭다.
산은 그 오름에 다 이르러도 그 누구에게도 상처를 주지 않는 것이다.
여우자적을 잠시 접어둔다.
멀리 오래도록 지치지 않는 보폭으로 다시 오른다.
금세 장대비에 젖은 옷이 다 말라버린다.
비가 땀에 용해되어 버린 것인지, 땀이 주룩 흐르는 산오름이 바로 등산의 묘미이다.
그 호흡에 산의 기운들을 저절로 다 나안에 체류시킬 수가 있으니 말이다.
확 트인 능선의 개활지에서 맨 먼저 하늘을 올려 본다.
눈을 좌측으로 돌려 안개에 잠긴 비로봉(해발 1439.5미터)의 묵묵한 위용에 탄성한다.
지척에 올려다 보이는 국망봉에 이어지는 나무계단에 묻어있는 사연의 빛바랜 채색을 본다.
문득 바위틈에 나즈막한 햇 노란 구절초의 꽃피움을 보게 된다.
그 언젠가 들은 소백산에서 처음 만나 손잡은 여인이 구절초를 꺾어 오겠다면서 사라졌던 사연을 들려주던 어느 산인의 이야기가 갑자기 미소와 함께 떠올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소백산에는 해석은 없고 전설은 있다.
그 장엄한 산을 치졸한 인간이 감히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장대비를 쏟으면 맞고 안개가 뒤덮히면 집중하여 길을 찾으면 될 테고,철이 되어 철쭉이 온 능선을 다 붉게 물들이면 감탄하면 된다.
국망봉에는 전설이 있다.
산자락에 살던 심성착한 대장장이에게 퇴계선생이 그 행실의 착함에 대하여 칭찬을 하였다.
그 대장장이는 퇴계선생이 죽은 후에 국망봉에 올라 3년 상을 치루었단다.
아쉬워라!
비로봉을 앞에 두고서 다시 쏟아 붓는 장대비다.
산을 온통 뒤덮고 있는 농무에 연유하여 서둘러 하산을 한다.
소백산이 부르기도 전에 다시 올 것이라는 다짐의 예약을 한다.
그 때에는 비로봉이 먼저 환한 대답을 할 것이다.
산에서는 경험만이 알게 한다.
그 길이 멀고 가깝고의 문제가 아니다.
그 산의 장엄함에 의하여 몸이 느끼는 곤함의 농도가 다르다.
소백산이 몸에 주는 곤함을 벌써 듬뿍 느낀다.
명산의 기운에 몸의 기운을 다 바치고 내려오는 하산이다.
정극원 취재기자
2008-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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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키즘(lookism) 시장 아이러니
박교서 기자
2008-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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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덕 주공(住公) 사장님은 알고 계십니까?
최재덕 대한주택공사 사장님께 이 글을 드립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경북대학교 법과대학에서 행정법을 담당하고 있는 신봉기 교수입니다. 세부전공으로 토지공법과 지방자치법 등을 주된 관심영역으로 하고 있습니다.
평소 같았으면 밝은 얼굴로 정중하게 인사부터 나누어야 할 관계이겠지만, 오늘은 귀사의 일부 직원의 도를 넘긴 행위로 인해 그에 대한 문의 내지 정중한 항의의 글을 드리게 됨을 양해 바랍니다.
사연은 이렇습니다.
지난 7월 2일, 저는 한국토지공법학회가 주최하는 「토지주택분야의 공기업 선진화 방안에 관한 법적 검토」라는 대주제의 학술대회에 발표자로 참여하였습니다. 평소의 개인적인 입장을 발표하도록 요청받았고, 개인적으로 많이 바쁜 상황이었기에 간략한 초안 원고로써 발표를 해도 좋다는 양해를 구한 후, 「토공․주공 물리적 통합, 중단해야 한다」라는 주제의 원고를 발표한 바 있습니다.
그날 제가 발표한 원고의 내용은 오래 전부터 제가 가지고 있던 입장을 정리하여 밝혔을 뿐입니다. 그 내용은 토지주택분야 법제를 연구한 법학자로서 얼마든지 할 수 있는 말들입니다(그에 대하여는 ‘http://blog.ohmynews.com/msdr89/entry/토공·주공-통합-관련-발표원고’를 참고바랍니다).
그런데 저는 지난 7월 22일 16:10:58 수령한, 귀사 전략기획단 김종범의 명의로 발송된 「제61회 토지공법학회 학술대회 발표자료에 대한 주택공사 입장」이라는 제목의 메일을 수신하고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학회와 학자를 향한 아래와 같은 행위는 해서도 안되고 있어서도 안될 일이기 때문입니다.
수백 수천명의 수신인을 대상으로 보낸 메일은 본문과 첨부파일로 구성되어 있었고, 그 메일 본문의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토지공법학회의 [토지주택분야의 공기업 선진환 방안에 관한 법적 검토] 대주제로 단국대 석종현교수가 기조연설하고 “경북대 신봉기 교수” 등 8인의 교수가 소주제로 발표한 제61회 발표자료의 토지공사 편향성에 대해 대한주택공사 직원은 동학회가 곡학아세를 중지하길 촉구하며 붙임과 같이 반박합니다.
- 토공학회를규탄하며.hwp(34 kB)
- 공공기관_통합에_대한_노동조합_입장_사례.hwp(21 kB)
- 주토공을_왜_통합해야_하는가.hwp(113 kB)
- 토공주장에대한주공의견해_대비표_가로.hwp(185 kB)』
어쩌면 저는 최 사장님께서 이미 이 일을 알고 계시고 또 이들의 행위에 오히려 잘했다며 격려를 하셨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저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전략기획단 김종범이라는 자가 버티고 있는 것을 보면 더욱 그러합니다.
저는 위 메일로 인해 개인적으로 심각한 「명예훼손」과 「모욕」을 당하였을 뿐 아니라, 국민의 의견을 겸허히 수렴하여 공정하게 운영하여야 할 국가공기업에 의해 학자가 수행하는 「학문의 자유」를 심각히 침해당하였다고 생각하고, 이를 시정해 줄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저의 이러한 요청은 그 자리에서 거절당하였습니다.
오히려 저의 강력한 항의 의사에 대해 적반하장으로 전략기획단 소속 직원 수명이 동 학회를 방문하여 학회장에게 위압적 언사로써 강력히 항의하고 돌아간 것을 확인하였습니다.
어찌 이럴 수가 있습니까?
주공의 대응에 대하여는 앞으로 공개적으로 상세히 하나씩 밝힐 것입니다만, 어떻게 국가공기업이 공기업의 본질을 망각한 채 학회와 학자에게 압력을 행사할 수 있단 말입니까?
학회와 학자는 자기 전공의 영역에서 그리고 사회적 쟁점에 대하여 입을 닫고 있어야만 합니까?
그에 대한 저의 시정조치 요구와 그 주장내용이 타당성이 있다면 왜 사과하지 않습니까?
명백히 “대한주택공사 직원 일동”이라는 말로써 발송해 놓고도 개인적인 것이라고, 자기 팀원 몇 명이 협의해서 쓴 것이라고 둘러대면서, 당신 맘대로 해보라며 일언반구 잘못을 긍정하지 않는 것이 과연 타당한 것입니까?
주공에서는 이제까지 학자들 보는 시각이 이러했습니까?
주공에서는 교수를 주공에 용역이나 구걸하러 오는, 그래서 돈 몇 푼 쥐어주면 좋아라하는 그러한 사람들로 생각해 왔습니까?
그래서 주공은 저의 항의를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묵살해 버리고 있습니까?
심지어 제 블로그에 답을 쓴 어느 ‘주공인’ 명의의 글에서는, 앞으로 통합공사가 출범하면 통합공사와 많은 인연을 맺고 연구하고 조언을 주셔야 할 것 아니냐며, 오히려 압력성 내지 회유성 글을 올리기까지 하였습니다.
주공 직원들이 이런 일을 벌이는 상황에서, 지난 7월 31일, 최 사장님께서는 국민들에게 「100% 클린 주공 선포식」을 하신들, 대국민 신뢰회복을 위해 의식개혁(Clean Mind), 올바른 행동(Clean Action), 투명경영(Clean Management), 업무절차 개선(Clean Process), 정보공개(Clean Information) 등 「‘5클린’ 운동」을 선언하신들, 그것이 국민들의 귀에 들리겠습니까?
법적으로 대응이야 적절한 때를 보고 있습니다만, 이들 직원들의 잘못된 행위는 단순한 한 사람의 주공 직원으로서의 행위가 아니라, 대외적으로는 대한주택공사 직원 일동의 행위이자 최 사장님께서는 그 사용자로서 관리자 책임을 지셔야 할 행위에 해당합니다.
제가 공기업의 문제점을 익히 모르는 바 아니지만, 이번 주공의 행위로 인해 큰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번 사건은 저로 하여금 앞으로 특히 주공 등 공기업의 문제점 연구에 더욱 관심을 가져야 되겠다는 학문적 욕구를 고조시켜 주었습니다.
그간의 경과에 대한 말씀은 이 정도로 그치고자 합니다. 더 상세한 경위를 원하시면 언제든 보충해 드리겠습니다.
필명 ‘주공인’이 제 블로그를 어지럽힘으로 인해 제 의사가 왜곡된 바 있어, 제 의사를 정확히 정리하는 의미의 글을 아래에 첨부하며, 이 글을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다시 한번 당부 드립니다.
국민의 기업인 국가공기업 대한주택공사의 사장으로서 소속 직원에 대한 관리를 잘 해 주실 것을 진심으로 바랍니다.
대한주택공사 최재덕 사장님의 진솔하고도 신속한 답변을 기다리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2008년 8월 10일
경북대학교 법과대학
신봉기 교수 드림.
[첨부]
주공인이라는 필명의 자가 나의 블로그를 아예 문을 닫으라는 듯 댓글 수준이 도를 넘고 있다.
급기야는, 나를 놓고 이런 말까지 한다.:
- "... 교수님께서 오마이뉴스의 언급, 주공일변도의 비판적 글들, 그 사이사이에 놓인 뼈대들..... 생각같아선 모조리 해부하여 정말 공개적으로 교수님과 토론이라고 하고 싶지만, 그 또한 감정이 개입될 수밖에 없기에 이것으로 절제하겠습니다... (중략)... 교수님, 기회되면 꼭 공개토론하고자 합니다. 그날 오기를 바라겠습니다..."
- "... 솔직히 교수님을 뵈면 안타깝습니다... (중략)... 그리고, 교수님, 명예, 그대로이라 봅니다. 주공이 분에 터져 몆마디 상징적으로 내뱉은 말에 그리 상심하지 않으셔도 될 듯합니다. 먼저 주공을 살피시려는 마음은 전혀 없으신지요..."
- "... 흙탕물에 들어오신 교수님을 안타깝게 생각할 뿐입니다. 학자로서 관련 분야에 발을 들여놓치 못할 금역은 없겠지만 성직자가 민주화 투쟁에 나섰다면 흥분한 반대파에게 혹은 경찰에게 멱살 몇번 잡히는 것은 그 현장에서 벌어질 수 없는 일이 아니런지요."
『이런 버릇없고 건방진 녀석이 어디 있는가?』
이 한 마디로 일단 나의 감정을 표한다.
이런 깡패 수준의 스토커를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일단 IP를 차단시켰지만, 다른 방법으로 접근해 올 것을 모르는 게 아니다. 그러나 나의 이 오블에 어떠한 스토킹을 해도 그냥 문을 닫지는 않을 것임을 밝힌다.
필명 '주공인'의 IP-Nr.는 이미 확보해 두었지만, 지금 반응하고 싶지는 않다.
주공 관련 글을 (10)번 정도에서 마무리 하려고 했었다.
그리고 이미 여러 차례에 걸쳐, 내가 왜 주공에 화가 나 있는지를 분명히 밝혔었다. 그럼에도, 반성은 커녕 오히려 더욱 조직적으로 사이버 행패를 부리는 것은 이해되지 않는다.
모두 모아둔다. 내, 모두 차곡차곡 쌓아두리라.
이렇게 사이버폭력을 행하는 데 대해서는, 앞으로 주공사장 최재덕씨의 직원 관리 소홀을 포함하여, 주공 관련 글을 100번이 되더라도 계속하는 수밖에 없다.
아래에서 「주공인의 댓글」에 대하여 쓴 「나의 '답글'」을 올림으로써 나의 마음을 표한다...
내가 주공으로부터 기다리는 것이 무엇인가?
국민들이 판단해 주시기를 기대한다.
= = = = = = = = = = = = = = = = = = = =
주공인에게,
이미 핸드폰까지 포함해서 나의 모든 연락처를 공개했습니다. 주공인들로부터 인터넷이든 현실로든 테러를 당하더라도 이를 각오하고 공개했습니다.
내가 무엇을 요구하던가요?
- 행정조직법,공기업법을 포함하는 행정법(行政法)을 전공하고 특히 토지공법(土地公法)과 지방자치법을 깊이 전공하는,
- 독일에서 토지주택(土地住宅)관련법 분야로 박사학위 논문을 쓴,
- 헌법재판소에서 연구관으로 7년반을 보낸,
- 이제까지 불의(不義)와 타협 않고 오로지 자존심 하나만 먹고 학위취득후 20년을 꼿꼿하게 살아온,
- 언제나 힘든 결정의 단계에 이르면 교수직을 걸고 담판하며 살아온,
- 과거, 짜여진 정치적 각본인 행사에서도 모두가 맞장구치면 꼭 엇박자 말을 해야만 분이 풀린다고 여겨온,
- 오래 전, 비교적 젊은 시절에, 비슷한 일이 있어 더 이상 확산되는 것에 부담을 느껴 유야무야 하기로 양보한 후 오히려 더욱 큰 어려움을 겪어 본 경험이 있는,
- 그래서 더욱 결벽증 환자처럼 살아온,....
한 법학자(法學者)가 자신의 '학술대회 발표'를 놓고...,
- "토공의 앵무새", "곡학아세(曲學亞世)"라는 소리를 듣고,
- 무엇인가 정말 토공으로부터 불미스러운 거래가 있은 듯 비치도록 '나의 이름' 석 자를 명시적으로 거명하며 수백 수천인에게 메일을 보낸 것에 대한 시정요구를 거부당하고,
- 그 직후에 주공(住公) 전략기획단(戰略企劃團) 소속 팀장이라는 '김종범'이라는 자(者) 등 다수인(多數人)이 나의 소속 학회(學會)로 몰려가 학회장에게 위력을 행사한 것을 학회장으로부터 직접 연락받고,
- 나의 항의글에 대해 주공의 공식적인 답변 없이 익명의 댓글로만 수없이 나의 블로그를 유린당하는,...등
이러한 상황을 쉽게 넘기리라 생각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주공인(住公人)은 '통합'을 위해 물 불 가리지 않고 무슨 짓이든 열심히 하십시오.
주공(住公)의 전략기획단(戰略企劃團)도 열심히 인터넷 반대기사와 댓글들을 정벌(征伐)하십시오.
나는 오로지 내가 입은 학자(學者)로서의 자존심(自尊心)을 찾기 위해 애쓰겠습니다.
학자로서 자존감(自尊感)을 찾기 위한 행동은 끊임 없이 해 나갈 것입니다. 자신을 버릴 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는 잘 알 것입니다.
아니, 아직 경험해 보지 않아서 잘 알지 못할 것입니다. 한번 경험해 보십시오.
나의 명예, 회복시켜 주십시오.
나에 대한 모욕 행위, 거두어 주십시오.
공기업의 위력으로써 행한 나의 학문의 자유 침해 행위, 회복시켜 주십시오.
무릅꿇고 재발하지 않겠다고 진정으로 사죄하십시오. 그렇다면 깊이 고민하겠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어떠한 방법으로든, 통합이 되든 되지 않든 끝까지 갈 것입니다.
건교부의 통합안? 그것은, 국회에서는, 하나의 정부안일 뿐입니다. 그대들의 목숨을 좌지우지하던, 그대가 수석'님'이라며 추켜세우던 청와대 곽 교수? 역시 한 사람의 교수일 뿐입니다.
그가 그대들을 지켜주지 않습니다.
주공인은 모두를 존중하는 것부터 배워야 할 것 같습니다.
신봉기 취재기자
2008-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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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베이징 올림픽과 그 의미와 정책과제
월드뉴스
2008-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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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악산-산의 역사다.
설악산(대청봉-해발 1708미터)
대저 산이란 무엇인가? 산은 그것이다. 그러면 그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산이다. 설악산이 바로 그것의 산이다.
설악은 역사이다. 인간의 역사가 아니라 산의 역사이다. 미미한 시간들이 겹겹이 포개어져서 영겁을 만든다. 그 영겁의 시간위로 마치 해일에 포효하는 바닷물을 다 하늘로 끌어 올리려는 듯, 거대하게 떠오르는 동해의 아침태양처럼 오로지 하늘로만 솟아오르는 장엄한 바위들이 눈부시다. 설악의 바위들은 지상의 기운을 하늘로 매개하고 있다.
마치 하늘을 향하여 비상하듯 대청봉을 오른다. 산자락에 묻어둔 정상에 오르지 못한 지난 가을 탐방 때의 가슴여린 회한을 신발끈 조여매고서 발로 툭툭 걷어내면서 오색약수를 지나 남설악에서 대청봉을 올려다본다.
마치 호위병의 머리처럼 낮은 봉우리만 보인다. 뒤돌아보면 못내 발길 떠나지 못하는 노모와 아들의 정들처럼 자취도 없이 홀연히 무지개 아치같은 설악의 깊은 숲속으로 빨려들어 간다. 대청봉에 이르는 가장 가까운 지름길을 택한 것이다.
벌써 마음의 동요가 요동치고 있는 것이다. 거대한 역사속으로 뛰어 든 것이다. 숨 한번 고르지 않고 가파른 능선에 아랑곳 하지 않은 채 당도한 산능선에서 하염없이 조망을 즐겨본다. 배려가 있다.
시선 머무는 곳마다에 군집을 이룬 바위가 장관이다. 바위들은 한결 같이 유구한 세월을 견디느라 하얀 채색으로 변색된 자태를 뽐내고 있다. 그 바위들을 바람막이로 하여 자라나고 있는 소나무의 푸른 기상이 계곡의 맑은 물처럼 위용차다.
생명이 더딘 바위가 활활 살아있는 소나무를 배려하고 있는 것이다. 그 고마움을 아는지 소나무들의 크기가 바위의 눈높이를 넘어서지 않고 있다.말없는 바위의 만년세월의 역사와 의기양양하게 자라는 소나무의 천년 세월의 역사가 바로 설악이다.
산앞에 서면 한갖 미물의 존재에 불과한 인간들이 그 역사가 무엇을 전하여 주려는 것인지 끝내 알 수가 없지만, 장엄할지라도 배려하라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 유규할지라도 겸허하라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
설악은 침묵이다. 산에서는 더 세차게 헉헉 일수록 더 맑은 산의 공기를 호흡할 수가 있다. 한 시간여의 힘찬 발걸음으로 단숨에 남설악기점(공원매표소)에서 1.7키로 지점까지 오른다. 대청봉까지 3.3키로라는 이정표 아래 평넓은 나무마루 쉼터가 있다.
힘껏 뛰어가다 넘어져 무릎이 깨어져 다쳐도 엄마 앞에서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털고 일어나 다시 더 힘껏 자신을 자랑하는 어린애마냥 설악 앞에 자랑을 하고 싶은 장난기가 발동한다. 정상에 오르는 통상의 길을 체념하고 오솔길의 형태만 남아있는 능선의 외딴 길로 정상에 도전한다.
한여름에 벌써 청색 가을이다. 하늘에 휘몰아온 하얀 구름이 큰 바위산에서 하늘을 상봉을 하고 있다. 아름다운 풍광이다. 그 바위끝자락에 미소를 보내어 장난기로 선택한 그 길의 온전함을 물어보건만 돌아오는 대답은 역시 침묵이다. 시선을 보낸 암봉만이 침묵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산 전체가 합창으로 침묵하고 있다. 이 거대한 침묵을 알고 있기나 한 듯, 새들은 더 크게 재잘된다. 초목은 푸른 잎새를 연신 더 크게 흔들어 되고 있다. 나도 함께 침묵에 빠져든다. 이 순간 설악은 시인의 산이 아니라 묵객의 산이 되고 있다.
요량도 할 수 없고 가늠할 수도 없다. 어디로 나아가야 하며 어디에 당도하여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다. 험난한 오름길을 묵묵히 나아가는 방법밖에 없다. 통과하는 사람의 짐수색이라도 하려는 듯 바위문이 나온다. 이름하여 청왕문이란다. 심술이 나서 툭 건드리면 와르르 넘어질 듯이 가파른 공간을 비집고 서있는 청왕문을 지난다. 전나무 사이에 우뚝 솟은 평면바위에 앉아 시야가 트인 곳으로 내려다보니 어디에서 휘몰아온 온 구름인지 하얀 밤을 만든다.
눈이 없으면 마음이 대신한다. 가만 눈감고 하염없이 산에 몰입하여 본다. 억제된 침묵이 아니라 저절로의 침묵이 만들어지고 있다. 인간은 산을 가르치려 온갖 개발로 파헤치는데, 산은 인간을 가르치려고 침묵을 만들어 주고 있는 것이다. 설악에는 태고가 있다. 산의 구비 하나 넘어서면 금세 나타날 것 같은 대청봉의 자태가 드디어 구름을 대동하고 나타났다.
드디어 해발 1604미터 봉우리의 끝청에 올라 산 전체를 조망한다. 하늘조차도 시샘하여 고이 숨겨놓은 설악의 비경에 마음비운 맑은 의식이 혼미하여 온다. 인간의 말로는 형언할 수 없는 비경앞에 혼절하고 만다.
끝청에서 바라다보는 귀때기청봉방향의 단순미의 장엄한 바위는 어떠한가!
운해에 잠겨 반틈만 그 위용을 드러내고 있는 비선대의 세련미의 바위들은 또 어떠한가! 잡힐 듯 눈앞의 봉정암의 중후한 위세는 또 어떠한가!
혼절한 정신으로 산의 진수를 만나고 있다.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멀리 대청봉을 바라다본다. 끝청에서 중청을 지나 대청봉까지 1.8키로의 길에 태고의 시간이 머물고 있다. 표고의 높이때문에 더 이상 하늘로 자나나지 못하는 눈잣나무의 군락에는 높은 지상을 다 점령이라도 할 듯 생기가 넘실된다. 나무의 이름이 절묘하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위로 자라지 못하고 누운 듯이 자란다하여 지어진 이름일 텐데, 한철 짧은 시간만 제외하고서 세 계절을 눈을 맞으면서 자라나고 있어 눈잣자무라하는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도 하여 본다.
백설이 휘몰아치는 한 겨울에 다시 와보리라. 그 때에는 날씨의 변덕도 없을 것이다. 대청봉에 이르는 목전의 길에 연한 바위이며, 나즈막한 고산목에서 태고의 시간이 겹겹으로 묻어있다. 태고의 시간을 후두둑 달려 대청봉에 이른다.
설악은 애처롭다. 대청봉은 말이 없다. 몸체를 운무속에 감추어 형상도 없다.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음으로서 자신의 유구한 위엄을 보여주고 있다. 오후의 시간임에도 금세 어둠을 만들어버린 운무때문에 백담사방향의 절경도 설악동방향의 경관도 오리무중이다. 너무나 아름다워 감히 말을 꺼낼 수도 없고 '아'하는 비명을 지르는 외에는 입도 열지 못하는 설악의 비경이 오히려 애처롭다.
행여 절경의 바위 한 조각이라도 풍상이 버거워 떨어져 나가면 얼마나 애처로울 것인가 하는 생각에 가슴이 여미여 온다. 태고의 세월을 말하려는 설악이 바위조각 하나에 손상이 갈리는 없겠지만, 그게 안타까운 것이다. 설악이 그렇게 안타까운 것이다.
정극원 취재기자
2008-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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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맥 파장이 생명을 노리고 있다.
수맥 파장이 생명을 노리고 있다.
풍수와 수맥을 항목으로 분류해 보면 환경으로 볼 수도 있다.
환경에서 유형적으로 대기. 수질. 토양으로 분류되고 무형적으로 소음. 악취. 습기. 진동. 전자파. 일조권. 풍 량 권. 환경 디자인 . 등으로 분류되고 있다.
한눈에 봐도 풍수지리와 수맥이 환경의 항목으로도 볼 수 있다.
이렇게 환경은 어떠한 시간과 공간에서 음양오행을 수반한 운명이 좌우되기도 한다.
수맥을 측정하기 위하여 인간의 인체에 흐르는 기를 응용해서 땅속의 지하수를 감지하는 방법이 있는데 버드나무 가지를 꺽 어서 사용하기도 하고 수맥 검침 봉이나 추로서 감지하기도 한다.
어느 마을에 실제로 있은 실화를 소계 하겠다.
그분의 외갓집에서 묘 터를 썼는데 장손과 외손의 가문이 파산되는 흉 지로 평가하는 지관들의 귀 속말을 엿 듣고 그 사람은 마음이 편하질 못 했다.
그런데 그 외갓집의 장손은 군에 가서 죽었는지 살았는지 소식이 없기를 수년이 되어서 포기한 상태였기에 알고도 쓴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그해부터 그 집에 산바람이 무섭게 불기 시작하는데 모친은 평지를 가시다가 넘어 졌는데 다리뼈가 뿌려지고 형제들이 교통사고. 고소추락사고. 사기로 재산탕진 이렇게 일시에 가정이 파산직전으로 몰렸다.
그로부터 그 집의 장자는 언제 어디에서나 터 잘 보는 지관 소문이 들리면 명 지관을 찾아 구원을 애원하며 매달렸다.
마침 서로가 해도 없이 흉 지를 길지로 돌리는 묘책을 받게 되어서 시도 하였는데 그 다음 날부터 효력이 나타나드니 악몽 같은 그 집 가문의 멸문을 막을 수 있었다고 필자가 풍수지리 공부를 하면서 명 지관에게서 들은 이야기다.
시골의 깊은 산중을 찾아다니기를 숫한 해를 넘기면서 풍수에 얽힌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았다,
수도서울은 한강을 따라서 명당 왕생이 터가 즐비하다.
서울의 땅과 주택 값이 천정부지로 올라서 투기꾼으로 부터 부동산 매매 붐을 부추기고 있다고들 하지만 풍수 지리학적으로 해설해보면 땅값은 투기자들이 수요와 공급의 차이를 부추긴 것이 아니라 땅의 기운이 세력화 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쉽게 말해서 도시 땅과 시골 땅의 가격이 같을 수가 없다는 평가가 당연하고 동일한 인식을 말한다.
어느 날 이였다. 필자와 두터운 친구가 전경 좋고 풍향 권에 일조권 까지 가추워 진 주택으로 이사를 가서 그 집에서 첫날밤을 지내게 되었는데 잠이 설 처져서 자는 둥 마는 둥 수잠으로 아침이 되니 머리가 무겁고 개운치 않았는데 한낮이 되어서 사방으로 활동하고부터 그 고통이 씻은 듯이 풀렸다.
그런데 그 다음 날도 똑같은 현상이 시작되었지만 새로 이 사온 집이라서 그러느니 하며 삼일이 지나면서 마음이 집히는 데가 있어서 필자에게 수맥검사 의뢰가 들어왔다.
집 주의로 수맥검침을 해보니 수맥 파장이 워낙 심하게 감지되었다.
그날 바로 친구에게 수맥부분을 차단하는 조치를 취해주었는데 그날 밤부터는 잠을 청하니 그리 편할 수가 없었고 아침에 잃어나니 온 몸이 개운하게 정상을 찾게 되었다고 알려주었다.
만약에 이러한 현상을 모르고 그냥 지나쳤다면 그 친구의 아내가 해마다 연초가 되면 용하다는 점집을 찾아 온 가족 한해의 신수를 봤는데 이사했던 그해에는 친구에게 중병설이 나왔다 한다.
수맥파장으로 당할 징조가 아니었나 하는 아찔한 느낌이 들었다.
내친김에 공동주택의 주위를 살펴보니 대다수 연로한 노인들이 중풍을 맞아 반신이 마비된 사람이 숱하게 많이 눈에 띠었다.
그 분들에게 수맥의 위험을 말해 주었는데도 의학적으로 생각이 굳어서 전혀 이해하려고 하지 않기에 그대로 넘겼다.
특히 임산부나 유아 ( 3 세 까지 )의 잠자리만큼은 수맥 파장이 없는 곳이나 차단 하여서 성장발육이 잘되게 해야 한다.
일단 수맥 파장에 뇌혈관의 장해나 신체의 말초 신경이 파괴되면 뒤늦게 수맥차단이 되었다고 되돌릴 수는 없는 것 같다.
다 만 수맥차단으로 더 이상의 진행이 방지 될 수는 있으며 일단 파괴된 상처의 완치부분은 의사진료의 처방으로 찾아야 된다.
정기보 취재기자
2008-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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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산률과 고용정책
박교서 기자
2008-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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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지리산.
지리산종주산행(노고단-천왕봉구간)
노고단에 비가
내린다.
기다림이었다.
어둠이 잦아든다.
어둠이 기다리는 것은 새벽이다.
새벽이 열린다.
새벽이 기다리는 것은 어둠이다.
어둠이 내린다.
어둠의 기다림에 견주어
새벽의 기다림이 더 길다 말하지 못한다.
어둠과 새벽은 서로 교차하는 기다림이기 때문이다.
시간이 공평한 것이다.
지리산의 기다림이 그러하다.
산의 어둠과 새벽은 다툼이 없는 것이다.
기다림이 있다.
어머니의 기다림이다.
오로지 자식을 기다리는 것이다.
자식은 어머니를 기다리지 않는다.
제 잘난 자식에 견주어
어머니의 기다림은 애간장을 녹이는 것이다.
그것은 내리기다림이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기다림이 아니라면,
인간의 기다림은 일방적인 것이다.
그러하니 인간의 다툼은 종결이 없는가 보다.
기다린 노고단이었다.
얄궂은 비가 내린다.
노고단돌탑에 눈짓을 보낸다.
염원이 있어서가 아니다.
비와 함께 출발하는 장도이다
그 준엄한 장도를 가늠하여 본다.
비가 내린다면 바람이 동반될 것이다.
층계 하나 내려서서 숲의 터널에 든다.
비는 내리고 나는 걸음을 옮겨 종적을 감춘다.
돌아보니 노고단도 종잡을 수가 없다.
숲의 터널에 가린 노고단이다.
노고단이 종적을 감춘 것인지,
내가 종적을 감춘 것인지 분간키 어렵다.
지리산에서는 주객을 구분키 어렵다.
비가 내려 서두른 탓만은 아닐 것이다.
지리산이 장엄한 연유인 것이다.
피아골의 달맞이꽃
달맞이꽃 한 떨기가 유난하다.
잎새의 끝자락에 핀 꽃잎이다.
노란색 마디마디가 하나의 은유이다.
꽃잎마다 할 말을 보듬고 있어 그렇다.
피아골삼거리에 당도한다.
경사면이 끝나 평지이다.
한낮의 시간을 조형하고 있는 달맞이꽃이다.
꽃잎에게 시간을 묻는다.
꽃잎이 연하여 오후인 것이다.
어둠을 비추는 달이 떠오르면,
달맞이꽃은 짙은 단장을 할 것이다.
밤이 짙으면 꽃잎도 농밀할 것이다.
꽃잎이 진하여 어두운 밤인 것이다.
세상이 잠들어 적요할 때에,
절절이 할 말을 뱉어놓을 심산인가 보다.
밤을 기다리지 못하니,
시간을 더는 지체할 수 없으니,
달맞이꽃의 그 밀어를 들을 수가 없다.
피아골은 동족상잔을 고스란히 겪어야 했다.
아마도 그 처절한 절규를 들려주려 하는가 보다.
아랑곳하지 않고서 피아골은 처연한 것이다.
여름엔 옥빛 계곡물이 흐를 것이고,
가을에는 오색단풍으로 자태를 뽐낼 것이다.
달맞이꽃 저 홀로는 그 세월무상에 역부족이라 밤에 피는가 보다.
노루목의 좌표
노루목의 공터가 고즈넉하다.
숲과 나무를 비켜 타원형이다.
얼굴마주보기에는 타원형이 적격일 것이다.
공터는 사람이 그리운 것이다.
허공이 곧 하늘이다.
하늘덕에 불현듯 시야가 트인다.
올려다보는 것이 곧 내려다보는 것이다.
하늘에 맞닿은 풍광이다.
노루가 고개를 숙이면,
그 뿔이 길이 가르킨다.
뿔을 따라 양갈래의 길이 되는 것이다.
노루목에서 바라보는 양갈래이다.
좌측의 방향이 반야봉이며,
우측의 방향이 삼도봉이다.
삼도봉의 단애
녹음에 파뭍힌 시간이다.
시간은 녹음속에 스며들어 자취를 감춘다.
달맞이꽃을 볼 수 없으니,
시간을 연역해낼 방도가 없다.
시간을 잊고서 삼도봉에 선다.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삼도봉 조형물의 균형을 본다.
바위의 난간에 서서 내려다본다.
난간이 천길단애같다.
돌 하나를 툭 던져 본다.
산이 깊으니 호기심에 생명을 잃을 개구리도 없다.
푸름이 짙으니,
돌의 낙하가 공허할리도 없다.
낙하하는 돌이 까마득하다.
직각의 가파른 단애가 바치고 있는 삼도봉이다.
구름이 차오르면,
너무 깊어 그 심연을 헤아리지 못할 것이다.
삼도봉의 난간이 버티고 있는 것은
그리도 깊은 계곡이 바치고 있기 때문이다.
난간으로 높이 치켜 올린 삼도의 화합인 것이다.
화합이란 어쩌면 상대를 치켜 올리는 것인가 보다.
그러하니 불화란 상대를 업신여기는 것이다.
화개재의 만남
햇살이 내린다.
고지가 높으니 그 뜨거움도 가깝다.
작열하는 햇살이다.
태양은 화개재를 태울 듯 뜨겁다.
그 옛날 장터의 고단함이 녹아있다.
뱀사골의 농산물이,
남해의 소금과 물물교환 되었던 곳이다.
그 높은 곳의 화개재의 역할이었다.
뱀사골에서 불어온 찬공기에 더위를 맡긴 채,
상념에 젖어 본다.
일용에 필요한 물물교환이었을 것이다.
허기를 채우는 양식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실은 사람이 중심이었을 것이다.
원초적 생존본능으로 움직인 것이다.
그것은 바로 만남이었을 것이다.
연이 닿아 혼사가 이루어졌을 것이다.
화개재덕에 배필을 만나 성가할 수 있었으니,
그것은 장터가 아니라 살터였던 것이다.
연하천의 월광
토끼봉이다.
구름이 손살같다.
명선봉이다.
가파름이 사다리같다.
발걸음이 지친다.
보무도 당당한 기세를 잃었다.
화살표처럼 나무계단을 걷는다.
나무계단이 끝나는 지점에 연하천산장이 소슬하다.
연하천산장에 여장을 푼다.
더 줄일 것이 없는 듯,
헤쳐보지만 몇 톨의 살외에는 펼쳐놓을 것이 없다.
펼친 부채의 곡선이듯,
그 곡선을 타고서 달이 떠오른다.
월광이 애간장을 스민다.
하늘 한가운데의 보름달이다.
선명하게 보려고 눈을 부비니 달이 사라졌다.
하얀 구름이 달을 통째로 삼킨 것이다.
사라졌던 달이 다시 중천을 가로지른다.
보름달에 정신이 함몰된다.
월영이 만들어질 만도 하건만,
하도 밝아서 월영은 없고,
월광만 있는 연하천의 달이다.
달에게 길을 물을 필요가 없다.
오늘은 더 진군하지 않고 잠을 청할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만 월광에 얼어붙었다.
몸도 마음도 이미 나의 것이 아니다.
오직 달빛이 주재하는 데로 임한다.
형제봉의 중심
바위가 우뚝 솟았다.
하늘은 철따라 변하지만,
바위는 그저 말이 없다.
바위를 대하는 나의 마음은 한결같다.
바위는 살아 숨쉬고 있다고,
작열하는 태양이 내리쬐어도,
그 본래의 체온을 잃지 않는 바위이다.
바위가 숨을 쉬면서 태양열을 쫓는 것이다.
살아있기에 바위가 애절하다.
사모하는 마음이었다면 숭고할 것이다,
우애를 나눌 수 있기에 장구한 것이다.
형제봉이 지리산의 한가운데를 징표하고 있다.
보란 듯이 그렇게 형제애를 나누고 있다.
그 우애가 너무나 묵묵하여 불변인 것이다.
딱히 노고단에 12.6키로 지점이다.
노고단에서 천왕봉까지가 25.9키로이니,
대중잡아 그 가운데인 형제봉이다.
장엄하기에 무정돈한 것이 아니라,
장엄하기에 기승전결이 명료한 것이다.
동생은 형을 올려다보고,
형은 그 품을 펼쳐 동생에게 기댐을 허락하는 형제봉,
바람도 걸음을 멈추고 연신 형제봉을 숭배를 한다.
형제봉에 부는 바람이 숙연하다.
형제봉을 부는 바람은 청아하여 속까지 시원하다.
동생바위의 머리위에 자라는 소나무 한 그루가 애처롭다.
푸르디 푸르러 그 사연조차도 건장하다.
큰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지 않는 형제봉이다.
촛대봉의 투구
일출은 흐르는 것이다.
산의 바쁨이다.
돌들은 도망하여 더 숨을 곳이 없다.
차라리 광활한 평전이 되었다.
세석평전이 생성된 까닭이다.
세석산장에서 촛대봉을 바라본다.
촛대봉의 일출은 천하의 장관이다.
겨울 혹한에서 솟아오르는 일출이다.
초대받지 못한 바람이 연신 분다.
촛대봉에서는 바람이 태양을 이긴다.
바람이 불어 바위를 조각한 것이다.
바람이 영겁의 세월에 힘입어 바위를 이기는 것이다.
그러나 태양은 바위를 이기지 못하는 것이다.
촛대봉에서는 바람이 태양보다도 더 연장자이다.
바람결에 편승하여 형상된 촛대봉이 투구같다.
돌로 평전을 만들었으니 지켜야 할 곳은 아래인가 보다.
투구바위가 응시하는 곳은 산아래이다.
산은 위로 솟았으니,
바위는 아래를 지키는 것인가 보다.
투구는 무찔러 정복하기 위함이 아니라,
현상을 지키기 위한 위용인 것이다.
투구의 소용됨이 원래 그러한 것인가 보다.
장터목의 주행
연하봉의 흙길이다.
그 감촉이 새색씨 속살같다.
천년의 세월이 발에 와 닿는다.
광풍이 몰아칠 것이다.
혹한이 밀려올 것이다.
백설이 휘날릴 것이다.
사람들의 발길이 잦아들 것이다.
그러나 종내에는 사라지는 것이다.
그러하니 유구하지 못하다.
시간은 그 속성이 사라지는 것이다.
그러나 그 의미는 남는 것이다.
그 의미위로 나는 연하봉을 걷는다.
그 누군가가 남긴 의미를 견인한다.
그 누구를 위하여 나도 의미를 남긴다.
연하봉을 굽이돌면 장터목이 나타난다.
장터목의 밤은 바람이 휘젓는 밤이다.
연하천의 월광이 장터목에 재연된다.
아직 더 연주할 것이 남은 연주가처럼,
장터목에 흐르는 월광이 고혹스럽다.
그 누구라도 달빛에 빠져들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마치 종이배모양을 한 계곡이다.
달은 떠올라 종이배의 돛에 걸린다.
종이배를 이끌고 하늘로 올라가려는 심산이다.
나는 달빛에 마음을 실어 보낸다.
세속의 허장성세를 다 버린다.
산속의 무심에 젖는다.
깃털보다도 더 가벼운 몸이 된다.
가벼우니 새처럼 비상이 가능한 것이다.
나는 몸도 마음도 이미 창공을 날고 있다.
천왕봉의 길
제석봉의 참담한 사연을 떠올린다.
도벌꾼이 불을 지른 것이다.
자신의 도벌흔적을 감추기 위한 화마였다.
산림은 재가 되어 사라지고,
폐허의 터에 풀들이 무성하다.
새로 식목한 어린 주목나무가 수호하기에는,
제석봉이 너무 광활하다.
천왕봉을 오르는 지친 걸음이다.
걸음이 지쳤으니 마음은 더 겸허한 것이다.
통천문은 통과의례가 된다.
발을 씻는 세족식처럼,
마음을 씻은 자에게 길을 터줄 것이다.
그 언제라도 가슴이 여미어 온다.
천왕봉을 대면하는 순간이다.
그 언제라도 너무나 벅찬 것이다.
천왕봉에 오르는 순간이다.
운무가 호위하는 천왕봉이다.
풍상이 차단하는 천왕봉이다.
월광에 투영되는 천왕봉이다.
백설에 그려지는 천왕봉이다.
천왕봉에 앉아 눈을 뜰 수가 없다.
차마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다.
보는 것만으로는 성이 차지 않는다.
안 보이는 것이 더 장엄한 것이다.
나는 참지 못하는 인간이다.
그래서 다시 눈을 뜬다.
천왕봉의 길을 바라다본다.
구름이 군무처럼 달려온다.
천지를 깜깜하게 포위한다.
하얀 구름은 거대한 휘장이 된다.
장막처럼 아무것도 볼 수가 없다.
올라왔으니 내려보라는 것이 아니라,
올라왔으니 그 길을 잊으라는 것이다.
천왕봉이 구름을 대동하여 흔적을 감춘 이유였다.
천왕봉의 지엄한 명령은 바로 그것이었다.
대구대 법대 교수 정극원 씀
정극원 취재기자
2008-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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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산기행을 시작하며,
정극원 취재기자
2008-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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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옥신에 인류 종말이 오고 있다.
다이옥신에 인류종말이 오고 있다.
연대를 추적 할 수 없는 고도로 발달한 문명이 갑자기 사라지고 고고학자로부터 토양의 퇴적층에서 백악기의 유물이 발견되고 있다.
공룡시대를 현대문명에서 볼 수도 있고 현대문화에서도 가공이 불가능한 고대유물에서 우리가 말 할 수 있는 대답은 불가사이 한 히스토리로 남아있다.
연대 추적으로 일억 오천만년 전으로 추정되는 자루달린 쇠망치라든지 수억 년을 뛰어넘은 불가사이 하기만 한 조형물이 언제 어떻게 해서 사라지고는 오늘 날 우리가 사는 지구촌이 되었을까 ?
창조와 신기한 유적의 의문점들이 인간의 시야를 흐리게 하고 있다.
전쟁과 평화는 공존하는데 전운이 감 돌 때 마다 우리는 인류 종말이라는 위험을 알리며 자재를 당부하는 말을 듣게 된다.
전쟁이 지나가고 나면 그 뒤를 이어 어김없이 평화를 맞이하게 된다. 이렇게 활발한 사회생활이 새로운 변화를 가져올 때가 되면 인류종말론도 씻은 듯이 사라진다.
만약에 지구의 종말이 시작 된다면 대략 여섯 가지로 압축해 예상되고 있다.
1. 지구 밖에서 접근하는 유성 충돌의 종말.
2. UFO 출현으로 별들의 전쟁에서 맞게 되는 종말.
3. 지구의 순환적 시기로 인한 대륙의 수몰 또는 천재지변의 종말.
4. 가공할 만한 무기전쟁에 의한 지구 종말.
5. 지구촌 환경파괴로 인한 종말.
6. 세균성 물질과 유독물질에 의한 지구 종말.
필자는 여섯 번째의 세균성 물질과 유독물질로 인한 지구 종말이 더 가까워지고 있다는 예상에 경종을 울리고 싶다.
현대문명은 세월이 갈수록 인간의 수명이 길어지고 있다는 장수의 비결이 인생종말론과 맞물리면서 행복과 공포의 이중적 양면성이 공존하게 된다.
필자는 Endocrine disruptor(환경호르몬) 중에서 특수유독 물질로 알려지는 다이옥신에 대하여 평가하고자 한다.
일제 강점기로 부터 해방을 맞이하여 1950년.1960년대의 우리나라 땔감은 앞산 뒷산 넘어다니 면서 나뭇짐으로 조석을 해결하였고 百年大計로 자란 나무가 아궁이의 땔감으로 다 들어가고 우리나라 전국이 황토 산이 되었다.
70년대는 십구공탄으로 조석과 남방에 조달되었는데 그 당시 일산화탄소의 중독으로 생명을 잃거나 모두가 한두 번쯤은 위기를 넘기기도 했다.
경제계발 계획으로 산업 시설이 늘어나면서 가정의 생활용품이 증가되고 이에 따른 생활 쓰레기 처리량이 도시마다 난제로 등제 되었고 쓰레기 처리장이 도시마다 지정되며 소량으로 분류가 되면 땅속에 묻기도 하였으나 부패과정에 발생되는 메탄가스가 2차 처리 문제로 야기되기도 하였고 유독성 악취에 파리와 모기가 생성되는 노천 바닥의 비위생적인 쓰레기 매립 방식은 지역주민들의 운영반대에 시달려야 만 했다.
이윽고 서구 유럽의 선진 소각시설이 국내에 도입되면서 열병합 발전으로 전기에너지도 생산하고 소각장 주위 중소기업과 마을에는 따듯한 물이 공급되었다.
폐기물과 일반 쓰레기가 전량 소각처리 되면서 쓰레기 반출이 순조롭게 운반되었으나 소각로에서 발생되는 대기 공해의 매연과 다이옥신이 사회생활의 장애가 되었다.
바람의 방향에 따라서 도심지로 날라드는 쓰레기 소각매연이 사람의 호흡기를 통해서 인체에 축적되고 오장육부의 체질이 약한 부분부터 발병되어서 인간의 생명을 노리고 있다.
차량소통이 적고 대기가 맑기로 소문난 동남아시아는 약국이나 병원이 도시에 한두 개가 있고 찾는 환자가 적어서 한산하게 운영하고 있다.
차량소통이 복잡하고 산업시설의 악취 매연이 심각한 우리나라는 골목마다 약국과 의원 병원들이 활성화되어있어도 병원마다 발 디딜 틈이 없다.
대기오염의 비산 먼지가 산성비를 내리게 하고 산림초목과 농작물까지 오염을 유발 시키고 있다.
음용수 오염의 주원인은 대기오염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발암환자가 많은 것은 지나친 음주와 흡연. 태운음식. 짠 음식의 과용섭취 원인도 되지만 대기공해로 인한 다이옥신이 우리인체에 노출된 오염이 더욱 유력하다.
오늘날 환경과학은 쓰레기 소각으로 발생되는 매연과 다이옥신을 방지하기 위하여 쓰레기를 재활용하는 미생물 처리가 응용되고 있다.
쓰레기를 미생물 처리 Silo에 넣으면 Circulation 과정에서 발생되는 매탄가스등을 회수하여 연료로 사용하고 미생물 처리로 생성되는 수액은 양질의 액체비료가 된다.
쓰레기 일백 톤을 일정기간 미생물처리 하면 소량 Sludge는 몇 킬로의 응고된 덩어리로 남게 된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쓰레기 소각장에서 발생되는 매연으로 발생되는 다이옥신을 완전히 제거 하려면 고도처리 기술과 고액의 시설 투자가 선행되어야 되는데 현실은 그대로 방치되고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Endocrine disruptor(환경호르몬)과 매연다이옥신에 주의해야 할 도시민들의 환경유해 상식이 부족한 관계로 일방적으로 신체장애가 발생되면 어련히 그런 거라는 책망에 그치고 만다.
다이옥신은 물에 녹지 않고 지방분에 잘 녹는다.
수십 년 수백 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유독성물질이며 인체에 축적되어 발암이나 신체장애의 원인이 된다.
고엽제도 다이옥신의 일종이며 유전적 1차 오염. 2차 오염까지도 진행 되고 있다.
다이옥신의 함유물질이 돌연변이의 세균으로 생성되면 인류는 지구상에서 멸종 되고 말 것이다.
미약하지 만 필자는 석유화학 수지로 인한 Endocrine disruptor(환경호르몬) 제품과 다이옥신 발암물질의 정화처리를 위하여 과학기술처에 환경부설 연구실을 등록하여서 수년간 운영하기도 했으나 정부의 무관심과 빈약한 개인의 연구 투자가 한계에 부딪쳐 좌절되고 말았다.
황혼에 접어들어서 그나마 환경 스페셜 집필을 하게 되어 환경오염 방지 미숙에 대한 한탄과 부끄러움을 감할 수 있어서 좋다.
정기보 취재기자
2008-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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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태지의 컴백
월드뉴스
2008-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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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성과 맨유의 인재 등용 원칙
월드뉴스
2008-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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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땅 독도,학자들도 발벗고 나서자 !
우리의 독도(獨島), 독도는 우리 땅이다.
독도가 아무리 우리의 땅이라고 우긴들, 소리치며 일본식 할복자살을 한들, 막상 분쟁 해결단계에 이르게 되면 그런 우격다짐은 전혀 통하지 않는다.
어린 학창시절부터 당연히 우리 영토라고 생각했던 독도가 아직도 이런 상황에 처해 있다는 것에 대해 정부와 관련분야 학자들의 노력이 부족한 것만으로 여겨왔다. 그저 그들을 비난하는 마음이었고, 국민 모두가 비슷했다.
어제 내가 큰 관심을 갖고 참여하는 한 학회의 주요 임원회의가 있었다. 금년에는 부회장 겸 연구이사를 맡았다. 새 집행부의 첫 학술대회 주제를 무엇으로 할 것인가가 중요한 이슈 중 하나였다.
독도를 법학, 특히 공법학(公法學) 영역에서 다루자는 제안을 했다. 근래, 아니 어쩌면 나도 모르게 30여년을 고민해왔던 주제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처음에는 모두가 의아스럽게 쳐다봤지만 곧바로 납득이 되었다.
여러 제안이 있었지만, 의외로 좋은 호응을 얻었고, 10월 학회를 “독도문제의 공법적 접근”으로 하기로 결정했다.
제안 취지는 이랬다. “이제까지 독도(獨島) 문제를 너무 정부와 일부 관심 있는 역사학자나 국제법학자들에게만 맡겨왔다. 일본은 수십년 전부터 영토확장의 관점에서 장기적인 정책과제로 엄청난 예산을 쏟아 부으며 독도연구를 해왔다. 힘 있는 주요국가들에 로비도 했다.
그것이 작금의 사태를 초래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독도가 우리 것임을 재확인하는 데 온 나라가 들썩이고 있다. 독도가 우리 것인 데 그것을 1주일 전 것으로 되돌려 준 것에 대해 모두가 미국 부시 대통령에게 감사하는 것 같다. 이런 사태에 대한 책임은 우리 모든 학자들에게 있다.
이제 독도는 다학문적(多學問的) 연구대상으로 삼아야 한다. 예술가는 그림과 공연, 음악으로, 공학자는 공학적으로, 인문학자들은 시와 수필로,... 그리고 우리 법학자(法學者)들도 법리적으로 검토해야 한다.
적어도 우리나라에 전문가집단인 대학교수만 하더라도 10여만명은 족히 될텐데, 각자 자기 분야에서 독도 연구를 논문이나 활동으로, 시론으로, 수필로 최소 한 편은 쓰도록 해야 한다. 독도문제의 해결은 고함 지르기 보다는, 논거를 갖춘 전문적 자료로써 승부를 걸어야 한다.
이제부터라도 전 학문 영역에서 덤벼야 하고, 독도와 관심 없는 듯 여겨왔던 우리 헌법, 행정법 영역에서 먼저 시작하자!”
문제는 이 행사를 어떻게 치를까에 있다.
발표를 할 적임자가 있을 것인가 그리고 그동안 우리가 관심을 갖고 키워왔는가, 헌법․행정법 등 공법학 영역만의 접근이 타당할 것인가 즉 타 학문 영역에서 깊이 연구한 학자까지 모셔야 할 것인가, 과연 정부나 주요기관에서 큰 관심을 가져줄 것인가, 그리고 언제 행사를 할 것인가 등이 당장의 문제들이다.
헌법상의 영토조항과 국제법적 발전에서의 ‘독도’, ‘독도’의 법적 지위 - 행정조직법, 환경법, 경찰․군사법, 지방자치법적 관점에서 -, 이른바 ‘독도특별법’의 제정과 그 내용, 규범역사학적 관점에서의 ‘독도’ 등이 그에 적합한 주제가 될 것이다. 적임자는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문제는 이 심대한 주제에 대한 정부의 관심 여부이다.
왜 우리는 국익적 관점의 시급한 연구과제를 놓고도 이렇게 고민해야만 하는가.
정부의 이웃나라 눈치보기는 국민들의 자존감을 억누르게 하고 전문가들의 연구의욕을 꺾어버린다. 이제까지 정부가 한 일이라고는 형식적인 모양새 갖추기뿐이었다.
이제라도 새로운 예산을 확보해야 한다. 독도전문가를 키워야 하고, 다양한 방법으로 독도 연구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아야 한다. 그에 대한 책임은 연구지원 전담기관인 교육부와 학술진흥재단에게도 있다. 책임회피는 안된다.
‘독도는 우리 땅’이라고 목이 터져라 외치고 소리 질러 봤자 남들은 민족주의적 발로라고만 몰아세운다. 우리 국민 모두가 ‘독도의 파수꾼’이 되어야 한다는 구호도 국제법적 분쟁해결 단계에서는 속수무책이다.
이제 전문가들이 나서야 한다. 그리고 정부는 전문가들의 지속적 ‘독도’ 연구에 양은 냄비 물 끓이듯 일회성 관심에 그쳐서는 안된다.
독도는 모든 학문 영역에서 우리 학자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주어진 역사적 소명이자 연구과제이다.
신봉기 취재기자
2008-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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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로스쿨 졸업생들의 비전(2)
월드뉴스
2008-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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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로스쿨 첫 졸업생들의 비전 (1)
박교서 기자
2008-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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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운동은 후손의 교훈이요 값진 선물이다.
환경운동은 후손의 교훈이요 값진 선물이다.
흘러 간 저 지난 세월의 부끄러운 이야기가 필자에게는 늘 교훈으로 남아 있다.
6.70년대 는 한국의 산업경제계발이 활발히 실현되고 있을 때였다.
우리나라는 대다수 기업운영을 선진국의 기술과 자본의 합작으로 이루어 졌는데 한국의 기술자들이 선진 기술을 배우기 위하여 해외 기술파견 왕래가 많았다.
타국의 세계적인 기업들은 고용자들의 편이시설이 작업장마다 잘 진열되어 있었다.
약 한 시간씩 일에 집중 하고는 10분정도 휴게실에서 흡연과 커피나 기호에 맞는 차가 제공되고 있는데 그 시절 만해도 전자제품으로 자동 처리되는 자판기가 너무나 신기했고 고용자들의 인권을 충분히 배려하는 분위기였다.
우리나라도 국내의 산업시설이 석유화학과 자동차와 중공업 쪽으로 발 빠르게 확장되면서 선진국의 사회 복지 시설을 국내에서도 볼 수 있게 되었는데 처음에는 호응도가 높았다.
땀과 값진 노력의 결실로서 꿈에 부풀은 준공식은 전 공정이 우렁찬 가동 소리를 내면서 그 동안 다져온 우리기술이 생산 가공품으로 솟다져 나왔다.
노사 간의 입장이 대립되기도 하고 개인적인 노력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는 일부 한 두 사람의 과격한 행동이 휴게실의 음료수대와 커피나 기호에 맞는 차 진열장의 문짝을 발로 차기도하고 작업공구로 두들기는 화풀이로 마모되어서 문짝이 견디다 못해 떨어져 나가는가 하면 노사 간에 이를 원래대로 고치려 하는 정성은 찾아 볼 수가 없다.
그 후로는 일 년도 못되어서 휴게실의 모든 편이 시설이 자취를 감췄다.
그런데 불과 2년이 지나서 선진 타국의 휴게실을 또 다시 두르게 되었는데 세월이 지날수록 작업자 편이시설이 더욱 위생적으로 보완 되어 왔고 차의 종류도 다양하게 비치되어 있었다.
그 시절 우리나라는 공중도덕과 공공시설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면서 개인의 소유권에 대해서는 사리사욕에 너무 집착하는 생활 습관이 있었다.
버스가 오면 서로 먼저 타려고 우루 루 모여서 밀고 당기고 하다가 보면 단추 한두 개가 떨어져 나가는 일이 허다했다.
한마디로 우리는 그 시절의 공중심리가 너무나 미약했다고 봐야 겠다.
모든 사람들은 현실의 장점이 많을수록 본인의 자부심이 되었고 단점이 나타나면 너무나 인색하게 회피해 버리는 습성이 있다.
사회생활 속 부도덕 한 단면에 자신의 행위만을 예외로 하는 습관적인 개인 이기주의 인식을 많은 사람들이 가지게 될 때 그 사회의 질서는 준엄한 법이 없이는 유지가 안 된다고 봐야한다.
1970년대부터는 우리나라 방방곳곳에 산업시설이 들어서면서 대기와 산천이 오염되고 가정으로 부터 넘쳐 나오는 일반생활 쓰레기 처리가 민. 관이 골치 꺼리로 등장 되었다.
이른 상쾌한 아침이면 마당 빗자루로 대문 앞까지 빗질하며 골목길과 이웃대문 가까이 청소하는 날이면 이웃 간에 흐뭇한 인사가 오고갔는데 금세기부터는 산업시설의 발달로 아름다운 개천과 동산들이 환경오염에 시달리고 농작물의 수확량이 감소하는 현대 문명의 환경공해가 홍수처럼 범람 하여서 오염정화처리를 기계화에 의존하는 공해산업이 활발히 생성되었다.
지구촌의 환경오염은 근세기에 끊임없는 연구과제가 되었고 정화처리에 과분한 투자가 소요 되므로 세월이 갈수록 사람들로부터 외면되고 있다.
산업폐기물과 일반쓰레기가 지천에 깔려도 3D현상으로 더럽고, 힘들고, 위험한(dirty, difficult, dangerous) 노동을 기피 하는 것이 현실이다.
누군가로 부터 시대적 사명감으로 헌신하는 환경운동 정신이 아니고는 하나 밖에 없다는 지구를 오염유발로부터 지킬 수가 없다.
환경운동은 많은 사람들이 호응하는 모임이 되어야 좋은 결실을 맺는다.
공업도시 울산광역시 도심을 가로 지르는 태화강은 울산시민의 식수원이며 산업시설의 급수 공급원이다.
강 하구에는 그 옛날 고래잡이로 유명한 장생포 항이 있다.
태화강의 고수부지는 우리나라 전국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십리 대밭이 있고 들국화 향기와 태화강 유역을 휘 감으며 흐르는 풍경에 길손들의 발길을 멈추게 했다.
이렇게 맑고 아름다운 고장이 산업시설의 환경오염으로 그 자연현상이 무참히 파괴되었다.
이를 보고만 있을 수 없어서 울산시민들이 환경운동에 눈을 뜨게 되었고 처음에는 태화강의 고수부지를 대상으로 회원들이 하나 둘씩 모이기 시작했고 일시불로 헌납하는 모금으로 꽃밭을 일구게 되고 시민의 여가 선용거리로 호응 되면서 여러 종류의 체육 시설이 자리 잡게 되었다.
태화강 고수부지는 시청관할 꽃씨 묘 종 배양단지로부터 철따라 묘 종을 공급받아서 향기가 그윽한 울산의 얼굴이 되고 있다.
울산의 공해방지운동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박 맹우 울산광역시장은 2004년 6월9일 에코폴리스 (ecopolis) 울산을 선언하여 십리 대밭을 생태계 자연 학습 공원으로 조성하고 태화강으로 유입되는 산업 폐수와 생활오수를 고도 수 처리로 정화하여서 태화강이 옛 모습과 같이 연어가 먼 바다를 회유하여 태화강으로 올라오는 생태보전 재생의 강으로 태어나게 되었다.
대한민국의 경제성장을 한강의 기적이라 부른다.
부존자원이 특 부족한 대한민국이 6.25 전란을 격어야 했고 해마다 보릿고개를 넘기느라고 굶주림에 쓰린 고통이 되었다.
국민들은 서로가 살아남겠다고 부정부패의 권력과 무질서 속에서 몸부림칠 때 박정희 정권시절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자는 슬로건을 바탕으로 범국민적인 경제개발을 전개하였다.
전국토가 헐벗은 황토 산을 사방공사와 육림운동으로 새 생명의 숲을 가꾸고 도시와 농어촌이 새마을 운동으로 살기 좋은 우리 마을이 탄생되었다.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가난한 나라가 계발 중진국이 되고 세계최고의 조선 세계최고의 자동차와 초고속인터넷 정보화의 나라로 발전되었다.
임금도 구하지 못한다는 가난을 박정희 대통령은 국민과 함께하는 경제 지도력으로 희망과 꿈이 있는 나라 대. 한. 민. 국 우렁찬 메아리로 울러 퍼졌다.
한강의 기적은 헌신하는 값진 땀이 서린 환경운동의 정신이 있기에 길이 열리게 되었다고 본다.
개인이 소유한 황금 같은 휴식 시간에 틈을 내어 사회에 봉사하는 애국정신이 바로 환경운동이기에 언제 어디에서나 희망의 길이 있는 곳마다 솔선하는 기수가 되었다.
미래를 위하여 해야 할 일이 무어냐고 물어본다면 필자는 주저 없이 환경운동이라고 말하겠다. 환경운동은 우리들 후손을 위한 교훈이며 희망적인 미래의 선물이기 때문이다.
정기보 취재기자
2008-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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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공 토공 통합, 재고해야 한다
주공은 복마전(伏魔殿)인가?
또 주공의 비리가 터졌다. 이번에는 2005년 퇴사한 전직 주공 고위간부가 부회장으로 있는 토목설계회사가 전관예우로써 거액의 사업을 수주한 것이 들통난 것이다.
경찰 수사발표에 의하면, 최근 3년간 수백억원대에 이르는 20여건의 설계용역 수주과정에서 뇌물공여 등 혐의가 포착되어 급속도로 수사가 진전되었고, 죄질이 심한 현직 김 모 간부 등이 곧바로 구속되었다. 주공 내부의 관련 부서 3개가 쑥대밭이 되었다.
밖으로는 서민의 주거생활 안정을 목표로 하는, 국민 혈세로써 운영되는 국가공기업으로서, 아름다운 모습을 광고하면서도, 안으로는 이렇게 썩어 문드러져 있는 것이다. 주공에서 이런 일은 한 두 번이 아니다.
주택법 개정 당시 분양원가공개제를 '분양가 내역공시제'라는 용어로 바꾸고, 위헌성을 이유로 수도권내 낙후지역까지 분양가상한제 적용을 제외하는데 일조하는 등 토지공법학 분야에 깊이 관여하고 있는 한 사람으로서 볼 때, 지금도 여전히 이러저러한 이유를 대며 분양가를 밝히지 않고 있고, 법원 판결까지 무시하며 버티는 주공의 모습은 결코 좋을 리가 없다. 말로는 무주택 서민을 위한 공기업이라면서도 파고들어 보면 민간 건설기업의 행태와 특별히 다를 바 없다.
얻그제 국회 공기업특위에서 한나라당 김성태 의원이 모 공기업에 대해 10명이 할 일을 60명이 하고 있다며 질타를 했지만, 주공도 그 정도가 약할 뿐 예외가 아니다. 인력도 봉급도 넘치는데 성과는 낮은 극히 비효율적인 구조인 것이다. 신의 직장의 전형(典型) 중 하나인 주공은 이제 안일한 공기업의 범주에서 벗어나 시장경제원리에 따라야 할 때가 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그러면서도, 이런 쑥쑥이 판에서도, 최근 주공․토공 통합 여부 논란에서는 통합반대론자들에 대해 거대공룡기업으로서 그 위력을 동원하며 압력을 행사하고 있다.
말인즉슨, 지난 7월 2일, 상공회의소에서 개최된 한국토지공법학회 제61회 학술대회는 주공과 토공의 통합 여부 논의가 핵심이었는바, 그 전반적 발표논지가 통합반대로 결론이 나자, 공기업으로서는 해서는 안되는 행동을 보여 빈축을 사고 있다.
즉, 당일 행사를 가진 토지공법학회를 상대로 "곡학아세", "토공의 앵무새" 운운하며 규탄성명서를 '2008. 7. 대한주택공사 직원 일동' 명의로 발표하여 메일을 수백 수천명에게 보내어 학술단체의 학문활동에 압력을 행사하였다. 주공 전(全)직원 일동으로 성명서를 발표했다면, 이는 필시 조직의 원리상 일개 직원 한 명이 했을 리는 만무하다.
발송자 스스로 실토했듯이, 또 주공의 전략기획단 김ㅇ범 차장이 자기 혼자서 4~50명 짜리 단체메일 2개만 보냈다고 했다가 1개 메일에만 100명의 단체수신자가 있는데 어찌 합쳐서 100명뿐이냐는 추궁에, 나중에는 100명짜리 메일 2개만 보냈다고 했다. 메일 주소록 구조상 최소 3개 많게는 그 수가 훨씬 넘치는데도 끝까지 2개밖에 즉 합쳐서 200명 정도밖에 안보냈다고 우겼다. 더 드러나면 책임을 지겠다고도 했다. 그리고는 지금까지 침묵을 지키고 있다.
도대체 주공은 거짓이 명백한데도 어찌 손으로 하늘을 가리려 하는가? 독일인들은 이럴 때 "Oh, arme 주공(住公)!"이라고 한다. "아, 안타깝고 불쌍한 주공이여!"
뿐만 아니라, 그 중 특히 발송 메일 본문에 필자의 이름을 명시적으로 거명함으로써 메일을 열어본 이들로 하여금 내가, 바로 신봉기 경북대 법대 교수가, 토공(土公)과 무슨 검은 거래라도 한 듯 오해를 받도록 한 것에 대하여 이를 시정해 줄 것을 요구하였으나 주공은 이를 단호하게 거부하였고, 그에 강력히 항의하자 이튿날 전략기획단 소속 여러 직원들이 학회 사무실을 직접 방문하여 학회장에게 흥분하며 항의하고 돌아갔다고 한다.
그것은 거대 공룡 국가공기업인 주공이 일개 학회의 학문의 자유에 대한 심각한 위력 행사한 것이었다. 학문의 자유에 대한 침해였다.
더욱 가관인 것은, 이러한 행위들이 일련의 기획하에 조직적으로 진행된 것이라는 사실이다.
필자는 주공 관계자와 그가 소속된 주공 및 그 사용자인 주공사장에 대하여 분명히 민․형사상의 사법적 조치를 취하겠다고 선언을 해 놓은 상태이다. 물론 현재 그 준비를 하는 중에 있다.
이러한 나의 행위에 조직적인 반발을 하고 있을 뿐 아니라, 어느 필명 '주공인'은 나의 블로그에 장황한 글을 올려 나의 글의 가치를 떨어뜨리려 하였고 내 블로그를 조잡하게 하려 했고 또 이를 더럽혔다. 아무리 해명이라 하지만, 내용적으로는 강요이고 회유이지 그것이 해명이 아님은 그들 스스로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 댓글들이 의도적인 것이 아니라고 스스로 실토하기도 했다.
물론 그 댓글들조차, 그들의 '치고빠지기' 식으로 곧바로 지워버릴까 봐, 모두 프린트와 다운로드를 해 두었다(지우지 않기를 바란다!).
주공은 전국적인 조직망을 통해 지난 학술대회 발표자들을 상대로 로비에 들어간 것 같다.
무슨 말인고 하니, 어느 지방의 주공 지부(支部) 직원이 그 곳의 교수를 방문하여 정중히 도움을 청하였다고 한다. 아니, 앞으로 발표와 토론을 할 때 양측을 균형있게 해 달라고 요청을 했다고 한다(개인적 문제여서 그 이름은 생략한다). 그것이 압력인가, 로비인가, 아니면 지난 행사에 대한 항의방문인가?
대한민국의 주택공사와 그 지부는 이런 일을 하는 기관인가? 도대체 주공이라는 국가공기업이 하는 일이 이런 일인가? 아니면, 주공 본사의 일부 권력(權力) 가진 부서 직원들의 행태만 이렇게 고압적인 것인가?
학회와 학자의 개인적 명예훼손과 모욕을 입히고, 거대 국가공기업의 위력으로써 소박하고 힘 없는 일개 학자의 입을 막아버리려고 하는, 개인의 학문의 자유를 침해하려고 하는 것이 과연 그냥 넘어갈 일인가?
심지어는 "나중에 통합되면 그 통합공사와 잘 지내야 하지 않겠냐"며 회유성 내용의 글을 보내는 것이, 우리가 참고 넘어갈 성질의 것인가? 앞으로 적당히 공생하자는 것인가? 도대체 이게 뭐란 말인가?
이제 이것은 나 혼자만의 명예훼손과 모욕의 문제로 그칠 일이 아닌 상황으로 전개되었다. 이것은 무주택 서민들의 눈물을 거두어 먹고 살아가는 주공이, 백 원, 천 원이 아까워 밖을 나가지 못하고 라면으로 매 끼니를 때우는 그 힘든 임대주택 주민들로 하여금 피눈물을 흘리게 만드는 일이다.
한쪽으로는 온갖 부패(腐敗)의 온상으로서, 다른 한쪽으로는 비판 학자(批判學者)들의 목을 옥죄며 입을 틀어막아버리려고 위력과 로비를 하는 기관이 주공인가?
이제까지 주공은 그런 방식으로 기업을 키워왔는가?
그리고 그렇게 하면 모두 먹혀들었는가?
어제 오늘, 온 종일 국회 '공기업 특위'의 논의를 지켜보면서, 다시 한번 주공과 토공의 통합은 이루어져서는 안된다는 확신을 더욱 갖게 되었다.
이번 일을 겪으면서, 우리나라의 주공이 이렇게도 대단한 위력을 가진 기관인가 하는 것도 새삼 다시 깨달았다.
나 역시 지난 주택법 개정이나 재건축초과이익환수법 등 각종 입법의 제․개정에 깊이 관여하는 등 그렇게 무명(無名) 교수가 아닌데도, 그들 눈에는 한낮 용역이나 구걸하러 오는, 자기들에게 굽신거리는 교수들 중 하나로 보였던가 보다. 그들이 이러한 시각으로 학회와 교수에 군림하는 이상, 그들의 이러한 행위는 더 이상 두고 보지 못한다.
주공은 더 맑아져야 하고, 더 깨끗해져야 한다...
주공 스스로 내부의 자정을 해야만 한다.
일부(一部) 권력 있는 부서 직원들'만'의 사고와 행태가 그런 것이라면, 내부적으로 그들의 행위의 당부(當否), 적부(適否), 그리고 범법(犯法) 여부에 대해 고해성사를 하듯이 그들을 과감히 조직에서 도려내야만 한다.
그것만이 지금의 주공이 살아날 길이다.
내가 알고 있는 주공 직원들에게는 이 글로 인해 미안한 마음을 밝힌다. 그러나 보다 개선된 주공이 되기 위해서는 뼈를 깎는 자정의 소리가 있어야만 한다는 것을 밝힌다.
앞으로 주공의 개선을 위해서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척 많아진 듯하다.
신봉기 취재기자
2008-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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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락 오바마와 존 매케인의 취업외교
월드뉴스
2008-07-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