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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0-06-23 22:3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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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남전에서 역사적인 오작교 작전

오작교 작전은 당시 맹호사단이 주둔하는 퀴논에서 백마사단 북단 투이호아 까지를 개통시키는 작전인데 미군제 101공수사단이 이 지역 투이호아 지역에 10개월간 있으면서도 개통작전에 실패했던 도로다.

이곳 1번 도로는 제일의 항만, 비행장 등의 군사시설과 또한 월남 산업의 중추 지역으로 월남 전체 경제의 80%이상의 수입원이 집중되어 있는 곳이다. 또한 한국의 기술인력의 진출여건을 보장하여 한국군과 한국의 국가 이익의 교두보 역할을 할 수 있는 중요성을 갖는 곳이다.

작전을 앞두고 주월 미군사령관 웨스트 모얼랜드는 채명신에게 "그 작전은 절대하지 마시오. 그 지역 주변의 주민들은 전부가 베트콩들이요"하고 극구 말렸다.

그러나 드디어 작전은 시작되었다. 1967년 3월 15일 맹호사단은 북에서 남으로 백마사단은 남에서 북으로 적을 소탕하는 오작교 작전의 서막이 올랐다.

먼저 맹호와 백마사단이 적진 깊숙히 들어갈 지역에 미 제7전술 공군의 항공 폭격이 시작되어 이 지역을 숙대밭으로 만들었다. 뒤이어 우리 장병들을 태운 수백대의 미군헬기는 하늘을 까맣게 덮고 적진을 향해 날고 있었다.

채명신은 이 광경을 보면서 헬기에 의한 공중 기동작전은 한국군이 현대화로 가는 시험이라고 만족하게 생각했다. 작전이 시작된지 한달이 넘으면서 맹호와 백마는 마지막 목표 지점을 향해 진격을 계속했다.

베트콩과 월맹 정규군은 곳곳에서 포착 사살되고 전의를 완전히 상실한 적들을 생포하여 이들을 통한 적들의 비밀동굴 진지를 폭파하는데 이용했다.

연 35일간 폭염이 내려쬐는 더위, 험준한 산악, 그리고 앞이 잘 보이지 않는 정글의 숲속에서 불굴의 투지로 전투는 계속되었다.

그 결과 지금까지 미군과 월남군이 난공불락으로 내세운 베트공의 푸엔성 본부를 파괴 소탕함으로써 드디어 맹호와 백마는 1번 도로에서 맹호사단장 유병현과 백마사단장 이소동이 감격의 포옹을 했다.

이 역사적인 연결식에서 채명신은 하늘을 향해 하나님께 뜨거운 감사기도를 했다. 이 작전을 그가 바로 구상하고 작전명 까지도 견우와 직녀가 상봉한다는 오작교 작전으로 정했다. 이날 연결식에는 미군 장성과 월남 푸엔성장 내외신 기자들이 총 집결 되었다.

이곳 1번 도로는 월남의 사이공과 월맹의 하노이를 연결하는 월남 제일의 동맥으로 우선 17도선 이남 지역의 1번도로가 개통됨으로서 군수물자와 산업설비, 통신, 기타 민간 버스까지도 신나게 달렸다.

이 오작교 작전의 성공으로 전세게 유력신문과 통신은 일제히 ‘한국군을 배워라, ’랑데뷰 작전의 성공, ‘맹호와 백마의 만남, 등으로 크게 보도했다.

이 오작교 작전의 전과와 손실을 요약하면 맹호사단은 적사살 608명 포로와 귀순 437명에 아군전사자 16명, 전상자 108명 그리고 백마사단은 적사살 266명 포로와 귀순 214명 아군 전사 19명 전상 59명이었다.

한편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오작교 작전의 위대한 성공에 대하여 본인은 주월한국군 사령관 채명신 장군과 휘하 전 장병에게 만강의 치하를 보내며 아울러 무운 장구를 기원합니다."라는 치하 전문을 보냈다.

또한 미군사령관 웨스트 모얼랜드는 "나의 군대 생활중 가장 인상깊었던 것은 한국군의 오작교 작전이며 전략적인 방침과 장병들의 완전 무결한 전술적인 행동으로 상상할 수 없는 베트남전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다"라고 공식 석상에서 여러차례 연설을 했다.

참고로 현 중앙일보 상임고문 전응덕 원로 언론인은 웨스트 모얼랜드는 채명신을 매우 사려깊은 위대한 장군으로 보아왔고, 또한 채명신도 웨스트 모얼랜드를 감성적이고 탁월한 장군으로 존경했을 것이다.

이렇게 두사람의 관계가 매우 친숙했기 때문에 한국군의 모든 작전에 미군의 항공작전 지원과 군수물자 지원이 크게 있었을 것이라고 증언했다.

- 브라운 각서의 내용

우리국군의 월남전 참전에서 경제적 기여도는 매우 큰 것이었다. 그것이 바로 브라운 각서에도 명시되었다. 브라운 각서는 1966년 3월 4일부 주한미국대사 브라운이 대한민국 외무부장관 이동원에게 보내는 서한 형식의 약정서이다.

그 주요 골자는 한국군의 1개 전투사단 증파에 따른 대체사단의 추가 비용을 미국이 부담하며 거기에 대해 군사 및 경제적 이익을 제공한다고 기록했다. 브라운 각서의 항목 중에서 특히 제6항의 미국의 해외 판매에 있어서 한국에 보다 많은 특별한 참여 기회를 부여한다고 했다.

이 6항목에 의해 한국기업, 한국기술자, 근로자들의 월남 진출이 열렸으며, 휴대식량, 군복, 군화 등의 수출이 시작되었다. 한편 1965년 우리 기술자의 베트남 진출은 93명에서 다음 해에는 2만명을 넘었다.

이들이 본국으로 송금하는 액수는 한해 평균 1억2천만 달러에 달했다. 또한 파월 장병들의 전투 수당은 기술자들에 비하면 훨씬 적은 액수였는데, 대령이 195달러, 대위 150달러, 상사 75달러, 상병 30달러였다.

당시 필자는 군 현역으로 국군의 방송에서 파월장병 가족들의 육성을 월남으로 보내는 <가족통신>이란 프로그램을 제작했는데, 40여년이 지난 지금도 이때의 감동장면이 잊혀지지 않는다.

"판걸아 내 애미여, 아까는 울면서 말을 했더니 우리 군수님이 소주를 사가지고 와서 큰컵에 한잔씩 쭉 부어 주길래 나도 뿔떡 뿔떡 단숨에 다 마셔버려서 내평생에 군수님이 주는 술을 마시고 나니 죽어도 한이 없겠다.

우리 군수님 사무실에도 처음 와봤고 차비도 주고 또 운동화도 선물 받았다. 선상님 나 이제 할말 없는데유" "더 하십시오. 아드님 보낸 월급은 어떻게 하고 있는지 그리고 아드님 애인 있으면 애인 소식도 전하세요" "아참! 니 월급이 올때마다 아버지가 돼지를 계속 사 넣어서 큰놈만 60마리가 넘었다.

새끼들은 나도 숫자를 몰라 얼마나 많은지 그리고 그동안 저금한 돈과 큰돼지 몇십 마리를 팔아서 노샛꼴의 소작으로 붇치든 논 열마지기를 사서 니 명의로 등기를 한다고 하니 그렇게 알고 있어, 그리고 니 애인은 그렇게도 자주 오더니 요새는 발걸음 싹 끊었다.

그 인간이 지 얘비가 이번에 면장이 되니까 또 엉덩이 뿔이나서 바람이 난 모양이다야" 이때 옆에 앉은 파월 가족 할머니가 "아이구 이 여자여 전쟁터에 있는 자식에게 애인 바람난 얘기를 왜 하는거여" 그러자 이 어머님은 깜짝 놀라면서 "아이구 어쩌잠, 판걸아, 니가 귀국하면 논 열마지기에 돼지 사장이 되는 거여 그때는 색씨들이 줄을 설테니까 장가갈 걱정은 손톱만치도 하지마라......

월급으로 돼지를 사고 논을 구입하고 또 직업 군인의 경우 사글세 집에서 전셋집으로 전셋집에서 드디어 내집 마련을 했다는 등의 방송이 나가고나면 장병들의 송금 실적은 100%에 달할 때도 있다.

- 박정희의 정권연장을 반대했던 채명신

채명신은 백마 9호 작전을 끝으로 1969년 5월 제2군 사령부 사령관으로 부임한다.

당시 군관계 여론은 채명신은 참모총장 아니면 1군 사령관으로 부임할 것으로 예측했던 것이다. 한편 당시 대통령의 지방 순시에는 꼭 2군 사령관 채명신을 동행하게 했는데, 이때 채명신은 가끔 국정에 대한 직언을 하기도 했다.

1972년 대통령이 2군 사령부를 전용 열차편으로 방문한다는 청와대 연락을 받고 대구역으로 마중을 나갔다. 이날 대구역에는 구자춘 경북지사를 비롯한 지방 유지들과 대통령을 보기 위해 역광장이 매우 혼잡했다.

군중을 정리하기 위해 경북경찰국장 서재근 경무관이 군중 정리를 위해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이때 경호실에서 나온 경호원 한사람이 경찰국장을 보고 반말로 호령을 내리는 것이었다.

그 광경을 본 채명신은 "어이 자네 이리와 경상북도 경찰국장 직위가 위냐 네 직위가 위냐? 네가 뭔데 경찰국장에게 반말로 이래라 저래라해!" 경호원은 고개를 숙이며 그 자리를 피해 갔다.

박정희가 대구에 오면 자주 들리는 식당에서 일행들과 식사를 하게 되었는데, 국회의장 이효상 등 고위 인사가 참석했다. 식사가 끝나자 참석 인사들이 다 나가고 대통령은 방옆 별실로 채명신을 불러 독대를 했다.

술상이 다시 들어와 박정희는 "오늘 한잔 합시다"하며 채명신에게 술잔을 권했다. 원래 술을 못하는 채명신은 술잔을 받아 놓고 마시는 시늉만 했다. 박정희는 술기가 오르자 채명신의 눈을 똑바로 보며 무거운 입을 열었다.

"채장군, 김대중에게 정권 맡겨서 앞으로 잘될까?" 뜻밖의 질문을 받은 채명신은 박정희의 의중을 대략 짐작하고 한참후 "각하 바뀌면 혼란이 오겠죠 경제가 지금처럼 잘 되겠습니까? 각하의 뜻은 100% 동감합니다.

그러나 각하께서 스스로 정권 연장하겠다는 말은 하지 마십시오. 3선 개헌때 대통령에 마지막 출마 한다며 눈물까지 흘리신 각하가 아닙니까? 모든 국민이 다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채장군 그래서 나도 고민이야" 채명신은 계속해서 박정희의 정권 연장의 부당성을 솔직하게 직언했다.

"그래 그래 그래서 고민이야" 고뇌에 찬 목소리로 고민을 되풀이 했다. 그로부터 두어달 후 또 대구의 그 식당에서 채명신을 불렀다.

"여보 채장군 아무리 생각해도 집권을 연장해야 겠어 욕을 먹더라도 내가 십자가를 메야겠어" "각하, 십자가란 말을 함부로 쓰지 마십시오" "응 그래 채장군은 기독교 신자지 그건 맞아" 그 말이 끝나자 박정희는 일어섰다. 작별 인사도 없이 헤어졌다. 1970년 여름의 어느날 경주 관광호텔에서 박정희가 직접 전화를 걸어왔다.

"각하 웬 일이십니까?" "나 경주에 왔어 지금 이곳으로 올 수 있나"....

채명신이 호텔방에 도착하자마자 박정희는 "채장군 오해하지마"하면서 시작한 말은 당시 중앙정보부장 김계원이 채명신의 비행이라면서 올린 보고서에서 서울 강남에 땅이 많고 스위스 은행에 비밀구좌 등 갖가지 비행을 조사했다는 것이다.

이 보고서를 본 박정희는 크게 충격을 받고 재 조사를 철저하게 해서 다시 보고를 하라고 지시했다. 재 조사결과 모두가 허위모략으로 밝혀졌다면서 박정희는 이 사실을 알리기 위해 채명신을 불렀다고 했다.

한편 채명신 자신도 여러 정보기관에서 자신을 감시하는 것을 알았고 2군 관할하에 있는 ROTC를 통해 학생을 선동한다는 것 또 채명신이 어떤 야먕을 가지고 뭔가를 노린다는 엉터리 소문 등등이 계속 나돌고 있었다.

이런 저런 정황으로 봐서 자신의 군대생활도 끝나가고 있음을 감지했다. 드디어 1972년 5월 30일 중장계급 정년이 되는 날인데 상부에서는 아무 소식이 없었다.

그날 오후 5시가 될 무렵 국방장관 유재흥의 전화 연락을 받고 헬기편으로 상경 국방장관실로 들어갔다. 유재흥은 매우 안타까운 표정으로 서랍에서 서류를 끄내어 채명신에게 주었는데 박정희의 친필이었다.

『채명신 중장 예비역 편입, 노재현 중장 대장 승진 임육군 참모총장 본인에게 통보는 5시 이후에 할 것. 1972년 5월 30일 대통령 박정희』

옛 고사(古史)에서도 왕은 개선장군을 오래두지 않는다고 했다. 바로 다음날 2군 사령부에서 거행된 전역식(轉役式)에는 연락 조차하지 않았는데, 미8군 사령관과 미1군단에서 까지 참석했다.

전역사를 마치고 사열차를 탈때에는 그도 인간인지라 슬픔이 복받쳤지만 꾹 참고 사열을 했다. 사열차가 기수단을 도는데 기수단의 장병들이 눈물을 흘리는 것이 보였다.

식을 마치고 정문까지 가는동안 도열한 장병들도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고 만감이 교차했다. 그가 탄 차가 고속도로 돌게이트에 들어서자 꾹 참았던 눈물이 주룩 흘렸다. 차창 넘어로 전개되는 먼 하늘을 보면서 채명신의 입에서 하나님! 하면서 기도가 터져나왔다.

6.25 전쟁과 베트남 전쟁 두 전쟁터에서 포연이 지축을 뒤흔들고 총탄이 빗발치는 그 생사의 교차로! 그 때마다 지휘관으로서 사명을 완수케 해준 하나님께 눈물의 감사 기도를 드렸다.

한편 전역한지 얼마후 박정희는 채명신을 멀리 스웨덴 대사로 보냈다.

그후 다시 그리스 대사 브라질 대사를 역임하는 동안 고국에는 계엄령과 더불어 유신시대로 들어갔고 다시 박정희 시해 사건을 듣게 된다.

지난날 대구 식당 별실에서 박정희의 집권연장을 반대했던 그날밤 박정희의 고뇌에 찬 그 모습이 자꾸 눈앞에 떠올라 며칠간 잠을 잘 수가 없었다.

10여년간 외교관 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후에도 그는 박정희가 사준 후암동 자택에서 살았다. 부인은 자꾸 아파트로 이사 가자고 날마다 졸랐지만 성냥갑 같은 곳에서는 살수 없다고 했다.

그래도 대통령이 하사한 집인데 어떻게 이 집을 팔고 가겠느냐고 30여년을 버티다 결국 아파트로 이사했다. 과거 주월사령관 시절 일시귀국때 채명신과 대담 녹화를 하기 위해 제작진이 자택을 찾아갔는데, 차가 들어갈 수 없는 골목길이어서 TV녹화 기자재를 메고 올라가는데 큰 고생을 했다.

이런 사실을 청와대 모 대변인이 박정희에게 보고하자 박정희는 깜짝 놀라 차가 들어가는 큰집을 한채 사주었던 것이다. 2009년 여름 퍽 오랜만에 필자를 만난 채명신은 "아파트가 이렇게 좋은 줄 몰랐소, 이 서재에서 저기, 저기좀 보세요, 한강도 내려다 보이잖아요" 하고 껄걸 웃었다.

서재에는 40여년전 중장 계급장에 지휘봉을 든 주월사령관 시절의 멋있는 사진이 걸려 있었다. 그때의 그 모습과 지금은 이미 할아버지가 된 (2009년 83세) 모습을 보니 인생 무상이 마치 흘러가는 구름처럼 생각되었다.

한편 채명신의 오늘이 있기 까지는 부인 문정인(권사)의 기도가 마치 다람쥐 채바퀴처럼 쉴새없이 달려왔다. 문정인은 이화여대 제1회 메이퀸으로 지성미를 겸비한 훌륭한 신앙의 여인이다.

한편 채명신은 월남에서 귀국할 때부터 여의도 순복음교회 협동장로로 적(籍)을 두고 있다. 끝으로 채명신은 월남 전선에서 산화한 옛 전우들과 아직도 고엽제로 고통 받는 전우들을 위해서 교회 갈때마다 그들을 위해 하나님께 간절한 기도를 하고 있다.

글 : 김수호 (안드레명상 발행인 주님의 교회 협동장로)

(이글은 www.worldnews.or.kr, 또는 www.월드뉴스.kr의 칼럼연재 내 김수호 코너에서 볼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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