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 기사등록 2008-08-26 14:21:12
기사수정
▲ 주왕산 가메봉

맑다.
여명의 시간을 떨친 신새벽이다.
새벽이 아름다운 이유는 고요와 소란을 경계짓고 있기 때문이다.
고요 안에서는 정지가 활동을 대신하고 있고,
소란 안에서는 활동이 정지를 대신하고 있다.
정지가 활동에 시간을 인계하는 찰나에 세상은 가장 맑은 것이다.

쿵쿵 인기척을 울리면서 주왕산의 아침정지를 깨운다.
세상에서 가장 맑은 아침을 절골의 계곡에서 만난다.
긴 계곡의 절경을 암시라도 하듯이 가녀린 단풍나무가 단청고운 일주문처럼 다소곳하게 자태를 뽐내고 서 있다.
열병으로 신열하듯 정신을 가다듬지 못하고 절골의 맑은 아침에 한 동안 감전된다.

단풍나무가 순일무잡의 원색으로 자신을 치장하고 있다.
마음에서 요동하는 감탄이 단풍의 채색처럼 빨갛게 시간을 물들이고 있다.
차가운 아침공기가 머리 위를 쫘악 뒤덮고 있었음을 넌지시 깨닫는 데 오랜 시간이 소요되고 있었다.
대자연의 차가움과 인공의 열기가 교감하고 있다.

세상에 만들지 못하는 조각이 없다.
세상에 형상하지 못하는 사물이 없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형형각각의 석상처럼 도열하고 있는 계곡양쪽의 거대한 바위들이다.
바위들은 단풍나무를 품안에 키워 자신에게 시선을 머물게 하는가 보다.

계곡 맑음에 착지한 작은 도요새가 된다.
하늘비상을 꿈꾸는 허공을 가득 가리고 있는 거대한 바위이다.
그 출구를 내밀하게 감추고 있어 그저 고맙다.
출구를 잃어 다시 세속으로 되돌아가지 않기만 한다면 영락없이 신선이 될 것이다.

터덜터덜 계곡 속으로 걸어 들어가면서 문득 한 생각이 떠오른다.
섬뜩한 적의를 가진 병사가 무리를 지어 이 계곡에 들어 왔다하더라도 절경에 빠져 곧바로 전의를 버리고 한없이 평화로움에 젖어들고 말 것이다.
더러는 아예 넋을 잃고 말 것이다.

햇살이 맑다.
푸드득 창공을 나는 새들도 아직 잠을 청하고 있다.
부시시 아침을 시작하는 햇살이 막 날개를 털어 비상을 준비하는 산새의 둥지 위로 따사로움을 보내고 있다.
새벽을 지새운 낮달이 하얗게 반원을 그리며 서산을 넘어가고 있건만 무얼 그리 서둘고 싶은 건지 태양은 산 너머에 몸을 숨긴 채 고운 햇살만 연신 비추고 있다.

노랗게 물든 솔잎사이로 햇살이 부채살을 그린다.
먼저 지상에 당도하기 위한 발 빠른 경주를 시작하고 있다.
맑은 계곡물에 햇살수줍음이 투영되고 있다.
밝은 색깔로 덧옷을 입은 계곡가득 고인 수정같이 맑은 물이 허공으로 영롱한 빛을 반사하고 있다.

햇살에 맞닿은 물 아래로 고기가 떼지어 정그리운 유영을 하고 있다.
적당히 숨을 공간을 만들어 주려는 듯 낙엽들이 지평처럼 물위를 가득 뒤덮고 있다.
햇살이며, 소나무며, 물고기며, 낙엽이 서로에게 상생의 소용이 되고 있기에 차가운 아침이건만 풍요와 평화가 넘친다.

한 사나이가 있었다.
지천으로 널린 낙엽을 요리 피하고 조리 피하면서 절대로 낙엽을 밟지 않으면서 길을 걸어가고 있다.
왜일까?
답은 "낙엽도 밟으면 꿈틀거리기 때문이다".
꿈틀거림을 잃은 낙엽이 살아있는 모든 것을 주재하고 있다.
지금 절골의 햇살은 낙엽 위에 더없이 맑다.

산이 맑다.
시간은 정지한 계곡물을 타고 흐르고 있는 듯,
늦게 시작한 바람이 더 서둘러 앞서 달려간 바람을 쫒아 나서 듯,
수수깡 무더기 속에 숨어버려서 끝내 들키지 않는 숨바꼭질을 하듯이,
시간은 그렇게 모습을 숨기고 있다.

기나긴 절골의 계곡을 다 지나치고서 가메봉으로 오르는 가파른 길로 접어든다.
1976년부터 시작된 송진채취의 상처를 안고 서있는 소나무가 애처롭다.
소나무는 상처의 뱃살을 다 내놓고서도 '괜찮아'라고 하면서 긴 가지들을 흔들고 있다.
애처로운 듯 소나무들을 위무하고 있는 파란하늘이 너무나 고결하여 보인다.

산의 맑음을 소나무에서 본다.
솔잎의 파란 맑음이 바로 산의 맑음이기 때문이다.
잎새 다 떨군 활엽수의 텅 빈 가지의 앙상함이다.
그 앙상함을 다 가리기엔 소나무의 파란 채색이 너무나 처절하다.

산은 벌써 겨울을 영접하고 있다.
또 다시 일 년의 세찬 세월을 기다려야 한다는 아쉬운 단풍나무의 하소연을 청음하기라도 한 듯 햇살이 경사면의 산을 광배로 삼아 빨갛게 물든 잎새를 가로질러 비추고 있다.
상흔을 안은 소나무의 몸체로 사이로 그 단풍들이 나래를 펴고 있다.
어드메쯤에 가고 있는지 통 알 수가 없이 가파른 산길에서 기나긴 역사를 본다.

대저 깊은 산속의 길이란 바로 경험의 역사이다.
오직 걸어 간자의 경험이 길을 만든다.
행여 둘러가든 혹은 최단 직선의 지름길로 가든 최소의 힘으로 오를 수 있게 산길은 만들어지는 것이다.
역사의 길이 안내하는 능선의 그 어드메쯤에 서서 사방으로 산을 올려다본다.
맑은 창공을 대동한 좌측의 정상인 가메봉,
우측의 최정상인 왕거암이 우뚝하다.

바위가 맑다.
가메봉 평바위에 서서 시간을 한량없이 보낸다.
절골에서보다 훨씬 더 가파른 제2폭포로 이어진 등산로를 따라 역으로 하산을 한다.
가파름의 길에 걸음을 내린다.
하염없는 마음을 진정시키고서 내려오는 발걸음이지만 못내 떨어지지 않는 미련을 잊으려고 전투를 나가듯 빠른 걸음을 내딛는다.
계곡의 기운을 닮은 나무들이 안온하게 키재기를 하고 있다.
듬성듬성 자라나고 있는 나무들 아래로 영겁의 세월을 본다.

유능제강.
부드러움은 능히 강함을 제압한다.
부드러운 물살이 쓰치고 쓰쳐 그 거친 바위들을 속살보다 더 부드럽게 만들고 있다.
영겁의 세월의 흐름을 타고 흐르는 계곡의 맑음 물을 한참이나 바라다 본다.
속살같은 바위사이로 맑은 물이 흐름을 이어가고 있다.
그 부드러움때문에 바위의 모양새가 거울같이 맑은 계곡의 물보다도 더 맑다.
유능제강.
"유능한 사람은 제강회사에 일한다."라고 말하고서 순간의 웃음으로 파안한다.
순간의 웃음이 영겁의 시간에 대비되고 있다.

하늘이 맑다.
아직 산중턱이건만 제3폭포 바로 아래에서 대전사로 이어지는 큰 길에서 사람의 북새통을 본다.
딴 세상에 온 듯이 사람들로 인산이다.
속좁은 산계곡들이 합일하여 만든 큰 계곡 가장자리의 돌들이 하얗게 미소하고 있다.
돌들은 아마도 하늘을 닮아 그렇게 하얀 속내를 보이고 있는가 보다.

어느 구석엔가 억새가 꽃을 피워 깃털처럼 꽃잎을 날리고 있다.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먼지 위로 올라다 보는 하늘이 처연하게 맑다.
세월에 처연하고 인간에 처연한 제1폭포에 도착한다.

마음에 묻은 때가 없다면 폭포의 절경에 혼절하고 말 것이다.
심성의 고움이 몸을 지배하고 있다면 엉엉 울고 말 것이다.
어느 곳을 바라보아도어느 곳을 느껴도 말문을 잃어버리고 말 비경이 눈앞에 창연하다.

멍한 마음을 달래려고 하늘을 올려다본다.
계란원형으로 생겨 모나지 않는 바위가 하늘을 머리에 이고 있다.
그 바위겹겹의 좁은 틈새로 올려다보는 하늘이 환하게 웃고 있다.
하늘조차도 너무 맑아 눈이 부시다.
폭포를 거치면서 만들어진 하얀 포말들이 이내 뭉쳐 파도의 파장같은 물결이 된다.
그 물결이 흥에 겨운 회돌이를 하면서 흘러내린다.

작은 돌층계 위에 거대한 원형바위가 고인돌처럼 포개고 있어 장엄하다.
주왕굴로 통하는 일출봉의 경사면을 바라다본다.
그 예전에 숨가쁘게 올라 돌탑을 쌓아놓았던 장군봉을 올려다본다.
하늘 맞닿은 공제선 저 너머에서 장엄했던 주왕이 전설이 떠오른다.
저편의 절골에는 숨어있는 신화가 있다면,
이편의 제1폭포에서는 살아있는 전설을 만난다.
신화와 전설을 동시 만나게 된다.

대전사 전체를 노랗게 물들이고 있는 은행나무 아래에서 주왕산의 상징인 거대한 바위의 위용을 바라다본다.
세월의 풍상이 그리도 버거운 것이었던지,
몸체로부터 이탈하여 간 바위들이 그 원래의 바위몸체에 흔적을 남기고 있다.
바위표면이 샛 노란색의 반점이 되어 확연하게 보인다.
곱게 비질을 한 땅위에 막 생을 마감한 노란 은행잎 하나 집어든다.
주왕산의 맑음에서 일탈하여 다시 일상으로 환속한다.

0
기사수정

다른 곳에 퍼가실 때는 아래 고유 링크 주소를 출처로 사용해주세요.

http://www.worldnews.or.kr/news/view.php?idx=458
기자프로필
프로필이미지
    정극원 취재기자 정극원 취재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 대구대학교 법과대학 학장
    대구대학교 법대 졸업
    독일 콘스탄츠대학교 법대 법학박사
    한국헌법학회 총무이사(전)
    한국비교공법학회 총무이사(전)
    한국공법학회 기획이사
    한국토지공법학회 기획이사
    유럽헌법학회 부회장

나도 한마디
※ 로그인 후 의견을 등록하시면, 자신의 의견을 관리하실 수 있습니다. 0/1000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