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 기사등록 2022-11-11 13:55:31
  • 수정 2022-11-12 14:03:45
기사수정

정상의 횡설수설, 죽은 자유

 

 

쇄신의 원류로서의 자유와 창조

 

아침햇살이 창을 타고 들어 거실에 길게 드리웠다. 거실의 먼지들이 길게 드리운 아침 햇살의 등에 올라 한껏 춤을 춘다. 그들의 춤은 새로움을 향해 나아가려는 그들의 의지와 내재적 자유의 표현이다.

 

그 같은 그들의 의지와 내재적 자유 속에 그들만의 생이 있다. 여기서 말하는 생은 생명활동의 생이 아니라 순환의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을 듯 하다.

 

인간의 눈에 의미 없을 것 같은 그들도 이처럼 의지와 내재적 자유를 바탕으로 자신 삶을 창조해 나간다. 그들도 '생애'라는 혁명적 변화의 진전 속에 있다.

 

이 진전, 곧 창조를 향해 나아가는 그들의 삶 또한 인간의 것처럼 고뇌에 차 있다.

 

혁명적 변화를 추동하기 위한 그들의 움직임 곧, 그들의 운동 역시 충격적 깊은 고뇌의 상징이다. 역설적이지만 그래서 무생물인 그들에게도 생애가 있다.

 

변화라는 추동에 의한 생애는 이처럼 인간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먼지조차도 생성에서 소멸로 나아가는 고뇌에 찬 생애가 없다고 단정할 수 없다. 먼지도 언젠가 다른 그 무엇들과 한데 엉켜, 물리적 결합이든 화학적 결합이든 상관없다, 그 결합을 통해 새로운 모습으로 거듭나고, 그 순간 먼지로서의 생을 마감한다.

 

먼지에서 또 다른 그 무엇으로 변한 그들의 혁명적 변화야말로 충격적 사건이다. 그들 중 어느 것은 다이아몬드가 되어 화려한 빛깔을 낼 것이고, 또 다른 것은 나무의 입자로 변해 성장하다가 어느 때 인간이 사용하는 탁자나 의자가 될 수도 있다.

 

인간에게도 생애가 멈추는 시기가 있을 것이다. 즉, 인간도 어느 땐가 인간의 몸속에 꿈틀대는 자유와 창조를 깨닫지 못한 때가 있다. 그때 그 인간은 비록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생애가 멈추었다는 점에서 그저 하나의 물리량만을 가진 고깃덩어리로 한 뭉치의 큰 먼지와 하등 다르지 않다.

 

그런데 그 특정할 수 없는 그 어떤 시기에 다이아몬드로 변해버린 먼지처럼 아주 특별한 한 인간 또한 탄생한다. 그는 자신의 몸속에 내재해 있는 자유와 창조의 능력을 깨닫고, 그것을 작동시킨다. 그리고 그는 다시 생각하고 행동(고뇌)하는 인간이 된다. 이는 죽었던 그에게서 인간의 생애가 다시 시작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더 나아가 이때 발현된 아주 특별한 그의 능력은 자신에게 새로운 자극을 준다.

 

그 자극은 생애가 멈춘 고깃덩어리로 하여 자신에게 내재(內在)된 자유와 창조를 일깨운다. 그 과정 역시 순탄치 않으며, 수많은 고뇌와 희생을 요구한다.

 

 

'진화'란 자연스럽게 일어날 것 같지만, 엄청난 고통을 수반한다. 먼지가 다이아몬드가 되자면, 그 먼지는 엄청난 크기의 압력과 그때 생성되는 에너지 곧 열을 견뎌야만 한다. 그 같은 고뇌를 견디지 못하면, 아무리 좋은 질의 먼지라고 할지라도 결코 다이아몬드가 될 수 없다.

 

먼지가 다이아몬드로 재탄생한 것처럼 문명 역시 인간 집단에 가해진 고뇌와 고통을 견딘 인간 집단 행위의 결집체다. 이렇게 해 생성된 문명은 탄생한 그 순간을 정점으로 하여 새로운 모습을 향해 나아간다. 즉, 문명은 탄생하는 그 순간의 모습으로 남기를 원하지 않는다.

 

문명은 탄생하는 그 순간 자신 속에 혁명적 변화를 갈구하는 자유와 창조의 의지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새로움을 향해 나아가도록 의지를 발현시킨다. 의지의 발현, 그것은 곧 혁명적 변화의 원동력으로서 에너지다.

 

이 에너지에 의해 문명 또한 생애를 시작할 생명을 부여받는다.

 

생명을 얻는 문명은 늘 또 다른 새로움을 향해 나아가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문명의 진보(진화)는 문명 속에 자유와 창조의 에너지가 내재(內在)되어 있음을 보여 주는 반증이다. 문명 역시 인간처럼 탄생의 순간 자신에게 내재(內在)된 자유와 창의를 발현시켜, 그것들을 새로움을 추구하는 적극적 도구로 활용한다.

 

지금 당신 손에 들린 스마트 폰은 단순한 기술 진보의 결과가 아니다. 문명이 혁명적 변화를 통해 당신에게 구체적인 모습을 내보인 것이다.

 

아침햇살에 잠이 깬 것은 나만이 아니다. 먼지들도 아침햇살에 눈을 떴다. 우리 모두 아침 햇살의 생기를 온몸으로 받았다. 새들의 지저귐이 그 어느 때보다 힘차다. 조용한 아침이 새들로 인해 고요한 소란 속에 있다. 이 소란에 놀란 것은 정작 대지다.

 

태양 빛을 맞은 대지는 부스스한 얼굴로 온몸의 여린 맑은 이슬을 털어내며 체온을 높이기 시작한다. 체온을 높인 대지가 바로 생명을 짓는 공장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곳에 몸을 의지한 모든 것에게 에너지를 공급한다.

 

 

이처럼 대지는 태양으로부터 받은 에너지를 그들 모두에게 원하는 만큼씩 골고루 나눠준다. 고요한 소란은 평화적이지만, 실은 충격적 혁명을 부르기 위한 격렬한 전투의 신호탄이다. 그들에게 내재(內在)된 혁명적 자유와 창조를 발현시키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이다.

 

그 몸부림은 종래 충격적 혁명의 결과를 가져오지만, 아직 우리 모두 그것에 대해 다 알지 못한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너희들에게 내재(內在)된 그 혁명적 자유와 창조를 사장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것을 끄집어내는 순간 그때 비로소 진화를 위한 모든 것의 혁명 또한 시작된다. 그런데 예외가 있다. 바로 윤석열 정부다.

 

 

더구나 불행히도 윤석열 대통령이 말하는 자유는 혁명이 추동되지 않는 죽은 자유다. 곧 윤석열 대통령이 말하는 자유 속에는 창조와 혁명이라는 새로움으로 나아가려는 내재적 에너지가 없다. 그래서 지금 국민은 윤석열 대통령을 신뢰하지 못한다. 마땅히 윤석열 정부와 윤석열 정부를 떠받드는 집권 여당인 국민의힘 당 또한 국민에게 신뢰를 주지 못하고 있다.

 

창조와 혁명이 배제된 윤석열 정부의 자유, 그 자유는 죽은 자유이다. 자유가 죽은 정부는 민주적 정부가 아니라 후안무치한 행동도 마다하지 않는 독재 정부와 크게 다르지 않다. 역사의 진전을 추동하는 진정한 자유, 지금 국민은 그같은 에너지 넘치는 창조적 자유가 기능하는 한국, 한국 정부를 기대한다.

 

 

2012.9.17

0
기사수정

다른 곳에 퍼가실 때는 아래 고유 링크 주소를 출처로 사용해주세요.

http://www.worldnews.or.kr/news/view.php?idx=24395
기자프로필
프로필이미지
나도 한마디
※ 로그인 후 의견을 등록하시면, 자신의 의견을 관리하실 수 있습니다. 0/1000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