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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2-07-31 00:37:14
  • 수정 2022-08-06 18: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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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 고문

 

정득환 논설위원


 살면서 우리는, 늘 일상의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라는 막연한 ‘꿈’을 꾼다. 앞 문장에서 말한 ‘꿈’이 희망임은 굳이 예시하지 않아도 다들 알아들을 일이다. 아무튼 희망은 절망의 날을 앞두고도 매 순간 우리 모두에게 봄날 꽃 피듯 피어난다.

 

 그 탓에 우리로 하여 비록 오늘 삶이 고되어도 내일을 고대하며 삶을 잇도록 한다.

 

 그런데 그 희망이 5월의 장미처럼 활짝 피어나지 못하고, 외려 우리에게 고문으로 다가서기 일쑤다.


 고문이란 우리의 육신(肉身)에 고통을 가하는 일이다. 


혹 글제인 ‘희망 고문’이란 말을 두고 그 뜻을 바르게 새겨 이해하지 못하면, 희망이 우리 육신에 고통을 가하다니 이 무슨 괴변인가 하겠다. 


이는 그 말을 잘못 들으면, 엄동설한에 만개한 장미꽃을 보았다는 허망한 말처럼 들릴 수도 있다. 그러나 현실에서 우리의 삶은 모든 것이 늘 잘 될 것이라는 희망 고문 속에 있다. 삶이 으레 그렇듯이 이 점은 너나 할 것이 없다.

 

 우리는 삶 중에서 우리에게 닥친 크고 작은 고난의 일들이 내일이면 모두 해소될 것이라 여기지만, 어디 그렇게 되던가. 흰 눈 위에 서리가 중첩되어 쌓이듯 고난의 일들은 겹쳐 쌓이지 않던가. 


그런데 다행히도 내일 뒤엔 또 내일이 있다. 그리고 그 내일이 닥치면 핑계 삼을 또 내일이 다가서서 버텨준다. 이 탓에 우리는 내일 내일 하면서 우리 자신을 위안 삼는다.

 

 그러나 그 위안은 이내 고문으로 다가오기 마련이다.


 이렇듯 내일에 대한 그 기대가 쌓이고 쌓여 마침내 희망 고문을 짓는다. 희망 고문이란 실현이 안 될 것을 알면서도 실현될 것이라 믿으며 하루하루 인내를 쌓는 것을 이름이다.


 그런데 그 인내를 쌓다 보면 너의 육신에서 일어나는 일이 있다. 바로 너의 육신을 강박하는 스트레스다.

 

 너의 육신을 강박하는 이 스트레스가 쌓이고 싸여 특정 임계점에 도달한 때, 너의 육신이 그 고비를 최종 넘지 못하면, 너의 육신은 깊은 병증의 늪에 빠지고 만다. 이때 삶을 향한 제어되지 않은 격한 사투가 너의 몸속에서 일어난다. 이 경우 너의 다리에 힘이 빠진 나머지 너의 몸을 지탱하던 너의 다리가 먼저 중력을 견뎌내지 못한다. 당신의 다리가 중력을 견뎌내지 못해 거동하지 못하는 당신을 상상해 본 적 있나. 그 상상은 당신을 참혹함 속으로 밀어 넣을 것이다. 요즘 전동휠체어가 있어서 그나마 위안 삼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 전동휠체어를 탄 당신을 많은 사람이 주시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 당신 등골에서 일어난 오싹한 기운이 당신의 정신을 좀먹는다. 곧 우울증이 당신 육신을 삼키게 되는 것이다.

 

 어찌 됐든 희망 고문이라는 우울증이 당신으로 하여 전동휠체어를 타게 하였다면, 당신의 말을 누군가 믿긴 할 텐가. 하루를 살아도 마음 편히 살 수 있었으면 하는데, 우리에게는 그것조차 잘 실현되지 않는다. 


스님 독경 소리에 마음을 내려놓으려는데 그 독경을 뚫고 들려온 알 수 없는 이의 고함이 왼쪽 귀를 치고 들어 오른쪽 귀로 흘러나갔다. 마음 내려놓을 곳을 찾아보지만, 그 장소 또한 쉬이 찾기지 않을 것만 같아 그저 서럽다. 그래도 우리는 또 내일이 있다며, 고단한 오늘의 삶을 버텨 잇는다.


 우리는 누구랄 것도 없이 모든 이가 늘 삶의 희망 고문 속에 던져져 있는 셈이다. 하여 나는 말한다, 그저 닥친 날 하루하루를 맞아 편히 살면, 그게 천국의 삶 곧 행복한 삶이라고. 자! 하늘과 땅을 마음에 품어보라. 희망고문을 극복할 방안이 떠오를 것이다. / 2022.7. 정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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