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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1-07-27 22:3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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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팔웅 논설위원


100년 후에 다시 본 베르사유 조약

 

* 1919년 제1차 세계대전이 종전된 후 31개 연합국과 독일 사이에 맺은 것이 ‘베르사유 조약“이다. 


1차 세계대전 후의 국제관계를 확정 지은다는 명분 아래 열린 파리강화회의(1919년 1월-6월)에 서 전체 440조로 구성된 조약을 내놓았다. 그래서 그해 6월28일 파리 교외의 ”배르사유 궁전“ 거울의 방에서 승전연합국과 패전국 독일 사이에 조인식을 갖고 탄샣된 것이 ”베르사유 조약이다.


 이상과 현실의 불안한 합작품이라는 또 다른 평가를 받고 있는 베르사유 조약은 패전국 독일에 대한 제재를 가하는 내용 들이 담겨져 있다. 연합국측이 독일에 물린 전쟁 배상금은 무려 1320 억 마르크로 갚는 기간을 연장해 59년에 걸쳐 지불해야 하고 도 중 배상금 4분의 1를 식감해 주는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그러나 배상금 문제는 1935년 3월16일 히플러가 바르세유조약을 폐기한 다고 선언함으로써 소멸되었다. 그리고 4년 후에 제2차 세계대 전이 일어난 것이다. 이밖에도 조약에 따라 독일은 해외식민지 를 모두 잃었고 알자스 로렌 지방을 프랑스에 반환하게 했으며 유럽 영토를 삭감 (면적 13% 인구 10%) 당하는 치욕을 경험했 다. 


전쟁사상 이처럼 과도한 배상금 부과는 독일이 처음이었다. 특히 베르사유 조약은 당시 독일에게는 과도한 제재라는 비판이 있었지만 영국과 프랑스는 이런 정황과 독일의 입장을 무시하고 자국의 이익만을 챙기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고 이 기회에 독일이 재기 못 하도록 아예 싹을 잘라버리자는 속셈이었다. 


그리고 육 군은 10만명 수준으로 줄이고 징병제도도 퍠지했다. 해군의 군함 보유량도 10만톤 이내로 제한 했다. 참모본부도 폐지 했으며 공 군과 잠수함의 보유는 금지했다. 육 해군의 무장에 대해서도 제 한과 감시를 강화했다. 


라인강 좌안은 비무장지대로 15년간 연 합국의 점령하에 두고 자도 지방은 15년간 국제연맹 관리하에, 그리고 15년 후에 주민투표로 그 귀속을 결정하기로 했다. 1933년 정권을 잡은 히틀러는 독일을 재건하기 위해 베르사유 조약으로 비무장지역이 된 라인란트를 다시 점령해 무장할 생각 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치 정권의 경제가 절망적이라 아무리 재무장이 중요하다고 해도 식료품 값이 폭등하는 등 식량문제를 방치했다가는 국민 항쟁이 염려되는 상황이다. 그런데 1935년 10월3일 이탈리아의 뭇소리니가 에디오피아를 무력으로 점령하 는 전쟁을 벌였다. 


그러나 국제연맹이나 영국 프랑스 등 강대 국들은 이탈리아의 에디오피아 무력 점령에 대해 미온적으로 대 응했다. 이런 국제 정세를 파악한 히틀러는 자신도 무소리니 같 은 행동을 하더라도 별다른 제재가 없을 것이라는 자신감을 얻 은 상태다. 


게다가 1936년 1월 뭇소리니는 오스트리아가 독일의 위성국이 되어도 관여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천명 했다. 이런 국제 정세 속에서 히틀러는 라인란트에서 재무장하기로 결 정했다. 히틀러는 국방장관에게 독일군이 라인란트지역에 진입 하도록 명령해 프랑스군의 저항 없이 라인란트 지역을 장악했 다. 그리고 히틀러는 곧바로 베르사유 조약과 르카르노 조약을 파기해 버린 것이다. 



 베르사유조약은 독일국민들에게는 큰 반발을 샀고 조약이 아니 라 명령이라고 불렀고 베르사유조약은 제2차 대전의 불씨를 안고 시행된 것이다. 다시 말해 영국 프랑스 등 강대국들은 독일의 패전 이후 입장을 무시하고 무리한 요구를 강요한 것은 제2 차 세계대전이라는 또다른 불씨를 잉태한 것이다.


1차 세계대 전 종전 후 1919년부터 1939년 9월 제2차 세계대전 발발까지 20년의 기간에 패전국 독일이 어떻게 재무장을 할 수 있었던 것인가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독일의 재무장 과 재건을 선언한 히틀러의 집권은 1933년 초였는데 불과 6년 동안 세계를 상대한 전쟁 무기를 준비했다는 것은 어떻게 평가 해야 할 것인가? 


이는 베르사유조약에 따라 여러 가지 제재를 가 했지만 승전에 도취한 연합국들은 제재 내용 등을 서류를 작 성해 처리해 마무리 한 것으로 여겨진다. 반면 패전국 독일은 1차 세계대전 때 사용했던 무기들을 폐기하는 등 시늉만 했고 원형 그대로 보관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다시 말해 1차 세계대 전에서 패배했지만 독일국민들은 그 패전을 인정하려들지 않았다. 독일국민들의 마음 속에는 언젠가는 반드시 앙갚음을 하겠 다는 의지가 있었던 것이다. 반면에 승전 연합국들은 승리에 몰입되어 독일이 재무장을 하건 또다른 전쟁을 기획하고 있는지 조차 알아보지도 않았다. 


패전적국에 대한 첩보활동이 전혀 없었다는 얘기다. 한편 독일은 연합국들의 이러한 자세를 이용해 무장을 강화하면서 기회만 엿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 한예로 강대국 소련과 비밀리에 불가침조약을 체결하는 전략을 구사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재무장을 완성한 독일은 1939년 9월 폴란드를 침공하므로써 히틀러는 20세기들어 인류의 가장 큰 재앙인 전쟁을 지구촌에서 벌어지게 했던 것이다. 한 때의 방심 이 인류에게 치유하기 어려운 상처만 안겨주고 끝낸 전쟁이 었 다. 


누가 그랬던가 인류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라고, 국제연맹은 무슨일을 했으며 승전 강대국들은 승전에 도취해 있엇음을 반성하고 역사의 죄인임을 인정하는 것 만이 도리일 것이다. 

 글: 이팔웅 논설위원 2021년 7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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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BS방송 프리랜서 시사해설 담당
    -시니어저널 신문 논설위원
    -관동대학교 출강(컴뮤니케이션강의)
    -월드뉴스 논설실장/보도총괄본부장
    -바른말실천운동시민협의회 사무처장
    -현재 월드뉴스 논설위원(논설실장)
    -월드뉴스 보도기획총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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