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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08-10-24 10: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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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극원교수
< 매화산(남산제일봉, 해발 1015미터>

시련이 있다.
그 위에 극복이 있다.
계곡이 있다.
그 위에 능선이 있다.
청색이 있다.
그 위에 홍색이 있다.
10월의 매화산에는 홍색의 단풍을 먼저 만난다.
10월의 매화산에는 능선 위의 바위를 먼저 대면한다.

붉음이 말한다.
홍조띤 단풍이다.
계곡이 말한다.
홍류동으로 흐르는 물이다.
바위가 말한다.
천불상의 도열이다.

자연앞에 서면,
인간의 언어가 가히 공허하다.
자연의 표현을 보면,
인간의 시계는 가히 청맹과니이다.
비우고 나서야 그 말을 듣는다.
눈을 감고서야 그 풍광을 연상한다.

침묵이다.
가야산 옆의 매화산이다.
큰 품을 먼저 펼쳐 환영하고 있다.
일명 남산제일봉이라 부르는 매화산이다.
홍류계곡으로 휘이 접어든다.
못 다한 말을 접는다.
산을 닮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못 다한 상상을 접는다.
감명하여야 할 바위를 만나기 때문이다.

터덕터덕 걷는다.
옮기는 발길이 아니라 따라나서는 발걸음이다.
새참을 이고 들길 나서는 아낙네의 총총 걸음같다.
졸졸 따라 나서는 강아지가 있어 가을 들판은 심심하지 않다.
동행이 있어 산이 멋진 것이다.
동행이 있어 무심함을 떨친다.
털석 먼지를 턴다.
어머니앞에서 힘자랑을 하는 어린애처럼,
넘어져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일어나는 어린애처럼,
좀 더 빨리 정상에 이르려는 서두른 걸음의 숨참도 잊는다.
북서면의 바위에 햇살이 내린다.
햇살을 볼 수 있다면 산의 정상이 가까이 있다.

굽이쳐 왼편으로 꺾는다.
그 예전의 가파름이 한풀 꺾여져 있다.
겨우 기어오르던 옛길이 비켜서고 있다.
정상으로 오르는 길이 그렇게 변모하여 있다.
순서를 기다려 매화산정상에 선다.
정상에서 퍼져나간 사방의 바위였을 것이다.
사방에서 달려온 바위의 기운이 정상에서 멈추어 있다.
바위는 형체로 퍼져나가고
바위는 기운이 되어 돌아오고 있는 것이다.
그 기운에 세상이 정지한 듯하다.
방향을 가늠할 필요가 없다.
방향마다의 바위가 다 위용이다.
차마 품평할 수가 없다.
정상에 서면 바위가 곧 천지가 된다.
천불산이라 부르던 옛이름이 딱 맞다.

청량사방향으로 하산한다.
최치원에 가까운 가야산이다.
청량사는 최치원이 머문 절이다.
하산의 종점이 바로 그 청량사이다.
겨울에 더 맑은 절이다.
적막함이 있기 때문이다.
겨울의 차가움도 아랑 곳 하지 않는 샘물이 떠오른다.
샘물소리가 그 적막을 깨우던 기억이 문득 떠오른다.

내려다본다.
형형이 바위이다.
올려다본다.
색색이 단풍이다.
바위와 단풍의 절묘한 조화를 본다.
자연을 닮지 못한 인간이 왜소하다.
자연을 담은 하늘이 푸르다.
그 아래의 가야산을 올려다본다.
가야산 해인사가 배시시한 모습으로 그 반틈을 보여주고 있다.

아찔하다.
바위의 철계단에 붐비는 사람이다.
먼 발치에서 다투는 단풍의 향연이다.
놓칠세라,
시선을 두리번거린다.
멀리 보지 않았더라면,
가파른 철계단이 무서웠을 것이다.
가까이 보았더라면,
아련한 꿈결같은 바위의 풍광을 놓쳤을 것이다.
보지 못하여도 말하리라.
여기 또 하나의 금강산이 있노라고,

불상의 형상만이 아니다.
수미산을 지키는 천왕의 형상만이 아니다.
일주문을 만드는 기둥의 형상만이 아니다.
오매불망의 망부석의 형상만이 아니다.
바위는 보는 대로 다 형상이 된다.
상상하는 대로 다 모양이 된다.
매화산의 바위가 그렇게 인간과 소통하고 있다.
소나무에 기대어 상상한다.
상상이 소나무의 키를 넘어서지 못한다.
자연에 비교할 수없는 연약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자연에 들킨 무안을 떨치려 멀리 본다.
내려오면서 보지 못한 바위들을 관상한다.
미소가 된다.
희열이 된다.
차마 돌아서지 못하는 이별처럼,
차마 떠나지 못하는 고향처럼,
아쉬움이 된다.
애절함이 된다.
마음이 급전직하하고 있다.
마음에 담아두어야 할 것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다음에 또 와도 산은 그대로일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마음이 그렇게 아쉬움이 되고 있다.

경사가 급하다.
굴참나무가 경사를 지켜보고 있다.
활엽수가 굴참나무 그늘에서 푸르다.
햇살이 만드는 낙엽을 깨닫는다.
길 위의 돌들이 매끄럽다.
세월이 그렇게 만들고 있다.
돌과 나무가 서로를 기대고 있다.

마음이 흡족하다.
지나쳐 온 경관이 그렇게 만들고 있다.
마음이 정결하다.
걷는 동안의 무념무상이 그렇게 만들고 있다.
마음이 한산하다.
더불어 챙기려는 산행의 시간이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마음이 허허하다.
더 비워야 할 것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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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구대학교 법과대학 학장
    대구대학교 법대 졸업
    독일 콘스탄츠대학교 법대 법학박사
    한국헌법학회 총무이사(전)
    한국비교공법학회 총무이사(전)
    한국공법학회 기획이사
    한국토지공법학회 기획이사
    유럽헌법학회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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