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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09-03-19 13:4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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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럼니스트 정극원 교수
양산 토곡산(해발 855미터)


무슨 사연일까.
산이 그리도 높은 것은,
무슨 내막일까.
산이 그리도 푸른 것은,
무슨 까닭일까.
바람이 그리도 거침없는 것은,

토곡산의 맞바람이 매섭다.
낙동강에서 발원한 바람이다.
더는 평지에 불고 싶지 않은 듯,
그 방향을 틀어 토곡산의 능선으로 몰아친다.
바람은 스스로 말을 하는 법이 없다.
힘껏 몰아쳐 바위를 툭툭 친다.

그러면 바위가 위잉 말을 한다.
매섭게 몰아쳐 나뭇가지를 비집는다.
그러면 나무가 씨잉 말을 한다.
바위와 나무가 바람의 말을 대변하는 것이다.

산이 그리도 높이 솟은 까닭은,
그 만큼이나 더 넓은 터를 만들기 위함이다.
산은 높이 솟아서,
인간에게 그리도 큰 살터를 제공한다.
조금이라도 더 높이 솟으려고,
토곡산은 바위에 바위를 포개었다.
그래서 바위의 산이 되었다.
그 세찬 바람을 맞아 말을 하는 바위이다.

산이 그리도 푸른 까닭은,
그 만큼이나 더 젊은 기운을 주기 위함이다.
산은 푸르고 푸르러,
인간에게 그리도 맑은 심성을 제공한다.
바위위에 자라나는 소나무이다.

소나무의 푸름앞에 변절이란 없는 것이다.
그 매몰찬 바람에 흔들려도 금새 제자리이다.
세월은 풍상이 되건만,
견디느라 자라지 못한 소나무만 의연하다.

흐름이 멈춘 것일까.
그 도도함은 어디에 가도 낙동강이 고요하다.
가파름을 넘고서 능선바위에 선다.
내려다보기에 안성마춤이다.
낙동강의 하류를 하염없이 본다.
하류의 흐름에 묘한 기분에 젖는다.
물살의 휘몰아침은 없고,
평원처럼 넓게 드리운 평화로움이다.

바다에 이르면 더는 흘러갈 곳이 없기에,
바다앞에서 잠시 멈춤을 만드는가 보다.
강은 마침앞에서 태고처럼 조용한 것이다.
조용함이 끝나면 바다에 흘러들 것이다.
끝남은 결국 돌아가기 위한 여정인가 보다.

조망이 좋은 바위능선이다.
오르느라 힘듦에 보태는 휴식이다.
낙동강 칠백리가 여기에 다 운집하였다.
길게 거친 한 숨을 토해낸다.
낙동강 이백리가 한 눈에 보인다.
토곡산을 비켜가느라 낙동강이 다 뭉쳐 있는 것이다.

토곡산이 낙동강에게 쉬어가는 여유를 주건만,
분에 못이긴 낙동강이 세찬 바람을 산으로 날리는가 보다.
정작 낙동강 자신은 고요에 젖었건만,
낙동강의 소명을 받은 바람은 매서운 것이다.
토곡산이 바람의 산이 된 까닭이다.

자맥질이 끊긴 낙동강이다.
그 많던 어린아이들은 어디에 간 걸까.
산에서 자라는 어린이들이다.
자연에 가까운 심성을 가진 아이들이다.
높이 솟은 산은 터 넓은 운동장이 된다.
그들 눈엔 바라다 보이는 것이라곤 산일 것이다.

그러하니 산에 대한 동경이 유일한 것이다.
낙동강이 아이들처럼 토곡산을 동경하는가 보다.
사무침은 때로는 성남이 되는 것이다.
바람이 세차게 부는 까닭이다.

산은 홀로 있어도 사연을 품고 있다.
하물며 사람들의 자리에는 어김없이 사연이 남는다.
완성하여 탑이 만들어져도 사연이 쌓인다.
미완성이라 하더라도 그 과정의 사연은 남는 것이다.

산길에서 잘 보이는 곳에 돌탑이 있다면,
그 곳에는 세월의 추모가 있는 것이다.
바위위에 돌 하나를 얹어 놓는다.
세월의 풍상에 닳은 토곡산의 바위가 그저 창대하다.

산이 솟아 있어 좋은 또 다른 이유는,
산은 그렇게 자신의 몸체를 다 제공하고서도,
도무지 댓가를 바라지 않는다는 것이다.
호들갑으로 자신을 과시하는 인간에 비하면,
산은 누가 툭툭 시비를 걸어도 댓가없이 내놓기만 하는 것이다.
시비에 젖은 인간을 길들이고 싶은가 보다.
그 처음부터 그 끝까지 척박한 돌길이다.
한 명만이 겨우 지나가는 바위능선이다.

나뭇가지를 잡지 않고서는 건너지 못하는 능선이다.
그 오름이 너무 힘들어 통곡산이 불러 본다.
토곡산이 스스로 성깔을 부리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세찬 바람에게 배운 것인가 보다.
실은 바람이 만든 앙상한 바위의 길인 것이다.
바위가 바람의 말을 인간에게 그렇게 전하고 있다.

산의 푸름이다.
인간들에게 한결같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사는 것이 그 유명에 맞추어져 있는 세상이다.
그러나 그 누구라도 언젠가는 사라지는 것이다.
사는 동안에 유명이면 어떠하고 무명이면 또 어떠한가.

산은 그 누구라도 차별하지 않는 것이다.
봄에 소나무가 더욱 푸르른 빛을 내는 것은,
그 누구에게라도 그 차별없음을 신호하는 것이다.
그 의미를 담은 소나무가 바위위에서 더욱 선명하다.

호수가 만드는 잠잠함이다.
자신의 몸체에 거울처럼 산을 비춘다.
산은 그제서야 대칭이 된다.
호수의 수면을 경계로 하여서,
호수에 잠긴 산과 지상에 솟은 산이 정확히 대칭이 된다.
누군가의 손을 잡아 손끝에서 서로의 팔을 펼친다.

그 손은 저울추가 되어 타원형같은 대칭을 만든다.
세상은 인간의 그 대칭에서 원대한 것이다.
대칭을 이루는 이 손에서 저 손에 평화가 있기 때문이다.
토곡산의 정상이 좌우의 능선을 펼쳐,
정확히 죄우상하의 대칭을 만들고 있다.
정상에서 시작한 대칭이 세상을 열어 제치고 있는 것이다.

산행일: 2009년 3월 14일.





[덧붙이는 글]
위 토곡산 표지 사진은 http://baeksan.egloos.com 의 "백산의 오두막" 카페 산행기에서 퍼온 자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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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구대학교 법과대학 학장
    대구대학교 법대 졸업
    독일 콘스탄츠대학교 법대 법학박사
    한국헌법학회 총무이사(전)
    한국비교공법학회 총무이사(전)
    한국공법학회 기획이사
    한국토지공법학회 기획이사
    유럽헌법학회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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