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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09-03-15 18:4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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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량산(해발 870미터)

산에는 본래가 있다.
산에는 닮음이 있다.
산에는 경이로움이 있다.
그 경이로움 때문에 절망한다.
청량산에서 이 모든 것을 만난다.

산의 본래를 본다.
도산서원을 지나 휙 돌아서는 구비를 넘는다.
먼 눈높이의 청량산 산봉들을 어엿한 미소로 만난다.
위용을 내보이는 큰 바위를 먼저 올려다 보는 것이 아니다.
곁가지처럼 솟아 있는 작은 바위들과 먼저 눈인사를 나누게 된다.
아담한 바위와 만나는 미소가 마음에 음미의 시간을 준다.

소나무는 마치 바위위에 자라나는 나무인 듯 바위산의 중턱을 감싸않고 있다.
소나무의 푸르는 기개들이 산 전체를 아스라하게 다 감싸고 있다.
그 바위 뒤의 한 곳을 향하여 손을 내저으니 가파른 경사의 길이 하얀 웃음으로 융단을 깔고 있다.
그 곳에 청량사가 숨어 있다.
급경사이다.
마음은 서둘고 몸은 더디다.
그래서 마음이 먼저 산을 만나는가 보다.

청량사의 대웅전인 유리보전(현판은 공민왕의 글씨)이다.
그 앞에 풍경과 절정의 조화를 이루는 세 개의 가지로 서 있는 소나무가 있다.
이름하여 삼각우총이다.
가파른 터에 엄두도 낼 수 없는 불사를 할 때,
세 개의 뿔을 가진 힘센 소가 목재를 다 날라와서 절을 완공하고서 죽었단다.
그 무덤위에 소나무가 한 그루 자랐는데,
소의 뿔처럼 세 개의 가지라 삼각우총이라 부른다.
청량사에 실증하는 애틋한 전설이다.

맑음은 혼자서 만들지 못하는가 보다.
짙은 안개를 뚫고서 여미듯이 얼굴 내미는 산자락에 맑음이 있다.
어둠을 물리친 새벽 여명의 밝음을 주도하는 산공기에 맑음이 있다.
그 어디가 진원지인지도 모르게 흘러내리는 계곡의 물에 맑음이 있다.
높은 산중턱에 자리한 청량사에서 이 모든 맑음을 일상처럼 만난다.
유리보전 앞에서 맑은 마음이 되어 산의 본래를 만난다.
누군가가 '산의 본래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감히 '청량산이다'라고 말할테다.

닮음을 본다.
유리보전의 좌향을 따라서 길게 앞을 내다본다.
허공같은 깊은 계곡 하나 너머에 높은 산이 여름 무성한 덩쿨의 꼬임으로 안온한 우뚝함으로 서있다.
그 산에 의하여 고마움과 감탄을 만난다.
절보다 더 높은 앞산을 만나게 되는 경우가 드문데,
그냥 더 높은 것이 아니라 더 높이에 쏫아 있으면서도 기막히게 절을 떠밭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산때문에 급경사 올라 당도한 높은 곳에 위치한 절경관을 절감하게 만든다.
주관을 개입하자면 청량산의 비경은 바로 그 앞산이다라고 말 할 것이다.

유리보전 바로 뒤로 난 정상을 향하는 오솔길에 접어든다.
오르면서 좌측에 원형같은 통바위에서 시선을 접을 수가 없다.
생성 이후로는 어느 인간의 범접도 허락하지 않은 듯 태고가 묻어 있다.
거창에 의상봉(해발 1.046미터)이 있다.
청량산 정상의 이름도 의상봉(혹은 장인봉)이다.
정상의 이름이 같다.
정상을 오르는 길이 너무나 닮았다.
기로를 정하는 능선인 뒤실에 바람의 소통을 만난다.
이 능선이 거창의 의상봉 바로 아래 능선과 또 닮았다.

닮음에 대한 연상이 다 끝나기도 전에 정상을 향하는 좌측의 길을 힘차게 밟는다.
이후 의상봉(장인봉)에 이르는 산길에 힘찬 밟음은 없다.
어즈버 조심스러운 걸음만이 있다.
깎아지른 산봉우리와 산봉우리 사이를 오르락 내리락 하여야만 정상에 이를 수가 있다.
지금은 구름다리가 휘영청 산봉우리를 이어주고 있다.
급전직하 백미터 이상을 거의 수직으로 내려간다.
내려간 것 보다 더 가파른 경사를 또 오른다.
지리산의 장터목에서 천왕봉으로 오르는 길목의 통천문을 닮은 바위틈새로 하늘을 보면서 오른다.
정상이 그렇게 호락하지 않는다.
아마도 마음비우지 못하는 인간에게 몸지침을 만들어 겸허하게 만드려나 보다.
그 몸지침으로 정상에 서서 사방을 호흡한다.
정상에서 바라보는 자소봉(해발 840미터),

경이롭다.
다시 뒤실까지 돌아와 자소봉으로 향한다.
곤함을 잊으려 소나무잎 한 웅큼을 입에 넣고 씹는다.
자소봉 바로 앞 큰 바위들이 하늘에 먼저 닿으려는 듯 다투고 있다.
그 봉우리의 산정에 앉아 긴 휴식을 누린다.
앉은 사자의 형상을 한 바위가 내려보고 있다.
청량산의 절경을 가장 잘 볼 수가 있는 봉우리이다.
그 봉우리의 이름을 지어준다.
사자를 올려다보는 바위라 하여 '앙사봉'이라고,
앙사봉이라 이름 불러주니 기쁜 화답이라도 하 는 듯,
사방으로의 바위절경을 한 눈에 다 보여준다.
산에 턱하니 걸치고 있는 것은 경이로움뿐이다.

산에 가면 인간은 시인이 된다.
경이로움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산에서는 무슨 말을 하여도 다 '시인'하게 된다고 말을 하면서 한바탕 웃음을 만든다.
경이로움 앞에서 박장대소하고 있다.

절망한다.
형용할 수 없고 형언하지 못하는 절경을 뒤로 하고 하산을 한다.
청량산 그 어디에도 앉으면 명소가 되고 머물면 다 비우게 된다.
계곡에서 마음을 뗄 수가 없다.
몸이 떠날 수도 없다.
그래서 절망한다.
희망을 잃어 절망하는 것이 아니라 경이로운 경관을 두고 되돌아 가야 하기에 절망하고 있다.

원점에 되돌아 온다.
산초입의 나무의자에 앉아 한없이 산을 올려다 본다.
이 세상에 가치없는 산이 어디 있으며,
나름대로 의미없는 산이 어디 있으랴만,
산의 품평회를 연다면 장원으로 뽑는데 주저하지 않겠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그리하여 더 큰 절망을 한다.
산에 와서 처절한 절망을 느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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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극원 취재기자 정극원 취재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 대구대학교 법과대학 학장
    대구대학교 법대 졸업
    독일 콘스탄츠대학교 법대 법학박사
    한국헌법학회 총무이사(전)
    한국비교공법학회 총무이사(전)
    한국공법학회 기획이사
    한국토지공법학회 기획이사
    유럽헌법학회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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