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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7-04-20 20:3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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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아버님의 비망록                                구담(龜潭) 정 기 보

 


경상북도 청송군 현서면 갈천리는 보현산 상봉의 천문대에서 서쪽편 산아래로 내려다보이는 한적한 마을이다.

이씨조선 말기에 한일합병으로 우리나라 전국 곳곳에서 민란이 끊이지 않을 때 필자의 증조부님께서는 울산 대외면(지금의 지명 대현) 일대에서 관아의 곡물창고를 관리하면서 한양까지 선박으로 운송하시는 정참봉 어른이셨다고 아버님께서 말씀 하셨다.

증조부님께서는 한일합병 민란중에 선비들이 곡물창고를 털어가기도 했고 한일합병의 조정군사에 털리기도 했다.

증조부님께서는 한일합병된 관군을 저주했든 차에 어느 날 야심한 밤중에 관군의 곡물창고를 증조부님 수하의 나전들과 함께 불을 찔렸다고 하셨다.

증조부님을 체포하려온다는 소식에 울산에서 건천(옛 이름 선동)으로 피신하셨다가 건천까지 추적을 당하자 그 시대 호랑이가 들끓는 청송군 보현산 깊은 산속으로 숨어 사시게 되셨다고 했다.

그래서 야화에서나 나올 범 한 호랑이와의 얽힌 실화 중에서 조부님의 밤길 행각(行脚)에는 호랑이가 길을 인도하여 줌으로 고맙다고 닭 한 마리를 던져 주면 닭이 땅 바닥에 떨어지기도 전에 낙가 채어서 사라지는 이야기.

집에서 키우는 송아지를 잡아먹으러 으르렁 거리는 호랑이를 장작개비를 들고 호 대개 고함을 쳐서 쫓아버린 이야기들이 전해오고 있다.

필자의 아버님께서 다섯 살 되시던 어느 날 할머님께서 해산 중에 운명하셨다.

아버지는 여섯 남매중의 다섯째다.

다섯 살 어린나이에 어머님을 잃으신 관계로 부양(扶養)이 어려워서 우여곡절 끝에 그 일제강압시절 우리민족이 한 많은 고초를 겪어야 했던 그 시절 고아원에서 지내셨다.

고아원에서 영농 일을 거들며 보통학교를 다니셨는데 항상 1등을 놓치지 않았다 고 했다.

일본인 담임선생님이 아버님의 남다른 재주를 생각해서 젊은 시절 사회 희망권유로 철도원(현 KORAIL) 추천을 받게 되었다.

 

아버님께서는 부산의 철도 공작 창에서 천직을 다 하셨다.

직장근무 중에 많은 기술제안을 하셨는데 기관차 자동제동기 부분에서는 특별히 실험부서를 만들기도 했다.

일제 강점기 그 시절 일본 현장감독자가 말체를 들고 “조센 진 바가야로” 하면서 날마다 한국인을 닥치는 대로 후려갈기는 통에 한국인에 가하는 공포와 불안을 차마 볼 수가 없어서 일본감독자를 크게 뚜들겨 패어서 쓰러뜨렸는데 한국인은 잽싸게 일본인 철도공작창장에게 알리면서 아버지를 밀고 하였다 한다.

아버지는 즉시 공장에서 쫓겨났으나 며칠 후 창장이 인편을 보내 출근요청을 하여서 다시 근무 할 수 있었는데 아버님을 철도원에 추천한 학창시절의 담임선생님 동문이 일본교통대신으로 되어 있어서 사건이 잘 무마 될 수 있었다.

36년간 참혹한 일제치하에서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이하여 흙을 한줌 쥐고는 드디어 대한민국이 이제 해방이 되었구나.

눈물을 머금으며 온 국민들이 장롱 속 깊이 간직해둔 태극기를 손에 들고 밖으로 쏟아저 나왔는데 넘치는 그 기쁨을 오래도록 필자에게 새겨 주셨다.

아버님은 나라 물건이라면 못 한 개라도 집으로 가져 오시질 안았다.

자유당의 부패가 난무할 때 철도직장인들은 돈 될 물건을 몰래 훔쳐 팔아서 본인의 승진을 위해 출세가도를 달릴 때도 아버님은 공직자로서 바르게 만 살다가 평직원으로 만 정년퇴임을 하셨다.

집 안방에 드시면 가끔 취하신 술 낌에 눈물을 흘리며 부패된 나라 걱정을 하시는 모습이 필자의 마음 한편에 늘 남아 있다.

아버님께서는 8.15 해방을 맞아 지니셨던 태극기를 고희 간직하셨다가 필자 청년시절에 잘 보관하라며 주셨는데 태극기를 접어서 허리에 차고 있었는데 군 제대 후에도 버릇이 되어 배에 두르고 있었는데 너무 닳고 헤어져 소멸되었다.

아버님은 6.25 사변 피난시절 전쟁고아를 위한 고아원 수용 부지를 찾고 있을 때 부산시 부암동 일대의 2.500평 전답을 기부 제공하셨다.

87세에 들어 운명하신 아버님.

자식으로서 떳떳하게 효도를 못 들어 드려서 가슴이 무겁기 만 한 아버님께

지금 필자가 남긴 시(詩) 한수로 되세 깁니다.

 

[詩]. 훌훌 버리고 가신 아버지

 

청송 들어 보현산 비탈에는

외딴 오두막집 한 채 있었다네.

허술한 외양간에다 방 두 칸 겨우 낸 집

한 때는 외양간이 무너지기도 하였다네.

다섯 해들어

편부 슬하가 되신 아버지

눈물 없이는 못 듣는 오막살이 이야기들

그래도 수수, 지정 잡곡 맛은 잊을 수가 없다 네여.

가난한 고향 산천에는

그리운 정들 못 잊어

한평생 외지 돌면서도

마음 한 편에서는

고향의 정들 그리움에 싸였다네.

오두막도 집이라고

그 가세마저 기울어서

아버지 어린 시절은

영농원에서 잔뼈를 키웠다네.

마루 밑에 숨어서

등잔불에 글 읽으신 아버지

남 몰래한 동냥글이

철마와 함께 하는

40년 천직이 되썼다네.

가난은 타고난 업 이련가

제 아무리 벗어나려도

어릴 적에는 편부슬하에 고생하고

젊은 시절에는 대의의 근본 지키느라 고통 받고

중년에는 자식 애간장 태우느라

가슴 쬐이며

늘그막까지 좋은 세월 못 보내신

아버지의 일생

훌훌

이제는 버리고 가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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