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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6-02-28 14:3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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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사람들의 경우, 그동안 살아오면서 겪었던 경험들로 인해 그 자신의 정신세계가 형성될 가능성이 높다. 주관적 경험들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사람들은 그렇게 형성된 자신만의 관점, 가치관으로 세상을 해석하고 이해하며 받아들인다. 살아오면서 치렀던 경쟁에서 실패한 경험이 많은 사람은 경쟁제도를 악이자 불행의 씨앗으로 여긴다. 그가 생각하는 시험, 경기, 게임이란 인간을 불행에 빠뜨리기 위해 먼저 살고 간 선조들이 고안해 낸 제도악인 것이다.

어릴 적에 친부로부터 성폭행을 당한 여자는 보통가정에서 보여지는 부녀지간의 情에 대해 공감하지 못한다.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타인을 이해하기 때문이다. 즉, 자신이 겪었던 친아버지는 결코 좋은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다른 집 아버지들도 역시 그러하다고 생각하기 쉽다. 성장과정에서 주변사람들로부터 박해와 냉대를 줄곧 받아왔던 사람은 타인을 불신하게 되고, 자신의 아프게 했던 일들과 전혀 무관한 사람들에게까지도 적개심을 품는다. 이처럼 주관적 경험에 따라 세상사와 인간들을 이해하는 관점이 달라지는 것이다.

그런데 보통사람들과 달리 주관적 경험에 구속되지 않고 보편적 관점으로 세상사과 인간들을 이해하는 관점을 가지는 사람도 분명 존재한다. 자신은 비록 평생 잊을 수 없을만큼 남들과 다른 특별한 경험을 가지고 있지만, 자신의 겪은 주관적 경험이 특별한 예외임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보편적 시각이나 관점으로 세상사와 인간을 이해하는 경우도 있다는 뜻이다.

앞서 예를 든 사례로 설명해보면 어릴 적 친부로부터 성폭행을 당한 여성이 자신이 겪은 특별한 경험(성폭행)은 예외에 속하는 것이고, 친부가 딸을 사랑으로 키우는 것이 일반적인 경우에 속하는 것임을 아는 것이다. 이처럼 자신의 주관적 경험에서 벗어나 객관적으로 사물을 바라보는 사람도 분명 존재한다. 학문(특히 인문학)은 인간이 주관적 경험이나 특수한 예외에 얽매이지 않고, 사물을 보편타당하게 볼줄 아는 능력을 갖도록하기 위해 인류가 유산으로 남겨놓은 知的 산물이다.

학문적 콘텐츠는 보편타당한 記述이기에 한 개인의 주관적 경험이나 자신이 속한 사회적 계급등에 의해 그 내용이 이랬다저랬다 하지 않는다. 만약 자신이 겪은 주관적 경험이나 자신이 속한 사회적 계급에 의해 학문적 내용을 記述하려는 자가 있다면 , 그는 학문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사람이다.

예전에 오마이뉴스에 이런 기사가 실렸다. 어느 시민기자가 올린 글이었는 데, 그는 9급 공무원에 붙어서 매우 기뻐 흥분된 상태였다. 그의 글에서는 노력을 통해 경쟁을 뚫고 합격한 것에 대하여 대단히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보통 한겨레신문, 경향신문, 오마이뉴스에서 평상시에 보도하는 기사나 칼럼의 내용들과는 사뭇 달랐다. 만약 그 시민기자가 9급 공무원시험에서 번번히 떨어졌으면 어땠을까. 아마도 그는 평상시처럼 경쟁은 악이다 하면서 경쟁제도를 혐오하는 글을 써댔을 것이다. 이처럼 자신의 주관적 경험이나 입장에 따라 이랬다 저랬다하는 것은 학문하는 사람의 올바른 자세가 아니다.

전통적으로 인문학은 지혜로운 자, 전쟁이나 경쟁에서 승리한 자, 부자, 권력자, 마음이 어진 자, 인품이 훌륭한 자, 사회적 영향력이 있는 자, 경험이 풍부한 자들이 하던 것이다. 이런 사람들이 다음 세대의 사람들에게 지적 유산으로 남겨준 것이 바로 인문학이다.

반면 어리석은 자, 전쟁이나 경쟁에서 패배한 자, 빈자, 피지배자, 마음이 각박한 자, 인품이 낮은 자, 사회적 영향력이 없는 자, 경험이 없는 자, 그날 그날 막일하며 사는 자들은 인문학이라는 지적인 작업에 참여하지 못했다. 설령 참여할 기회가 있었다 하더라도 별다른 지적인 공헌을 할만한 능력도 없었다.

여기에서 前者에 속하는 부류를 `A그룹`이라고 부르고, 後者에 속하는 부류를 `B그룹`이라고 부르기로 하자. 민주주의가 성립되고 현대사회로 넘어오면서 누구나 학문을 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학문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자신이 속한 사회적 계급에서 벗어나 사물에 관한 보편타당한 내용을 배우고 記述하는 知的인 행위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A그룹은 자신의 사회적 계급으로 인해 인문학을 왜곡할 가능성이 별로 없다. 반면 B그룹은 자신이 속한 사회적 계급으로 인해 인문학을 왜곡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 B그룹에 속한 사람들은 대체로 학문에 대한 기본적 이해가 부족한 사람들이고 또 사물등을 이해하고 받아들일때 자신이 속한 사회적 지위, 계급 또는 주관적 경험에 의해 좌지우지될 가능성이 큰 사람들이다. 즉 보편타당한 관점으로 사물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학교는 B그룹에 속한 사람들에게 제일 먼저 가르치는 것이 주관적 경험이나 자신이 속한 계급에 좌우되지 않고 보편타당한 관점으로 사물을 이해하는 학문적 태도를 갖추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대한민국은 80년대를 거치면서 운동권세력이 성장하였고, 그들은 전통적으로 내려온 인문학에 대하여 반기를 들었다. 운동권세력들은 학문을 공산주의 혁명의 도구쯤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 예술도 공산주의 혁명의 도구로 여긴다. 문학도 마찬가지인 데, 그 대표적인 예가 전태일문학상이다. 그들은 노동운동이나 사회주의운동을 독려하는 문학을 최고로 여기고 그런 작품에 이 상을 준다.

전통적으로 인문학은 A그룹 사람들이 해왔는 데, 80년대 이후부터는 새로운 집단(운동권세력)이 출현하여 그들만의 인문학(?)이 구축되었고 그 콘텐츠들이 한국사회에서 널리 유통되었다. 운동권세력들은 주로 `B그룹에 속하거나, 자신은 A그룹에 속하지만 B그룹을 선동할 필요가 있는 자`들이 모여 만들어진 집단이었다. 좌파세력이 표방하는 인문학은 제각각 중구난방인 데, 그 중에서 그들이 가장 많이 하는 인문학을 편의상 마르크스인문학이라고 불러도 될 듯하다.

인류가 지적 유산으로 남긴 인문학의 주요테마중 하나가 `(이성적인 판단에 의해) 차이를 아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다. `차이를 아는 능력`을 우리는 식별력, 구별력, 선별력, 차별력, 분별력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한국좌파들이 말하는 인문학에서는 평등이 최상의 지고지순한 개념이자 가치이다. 그래서 그들은 평등과 배치되는 차이를 아는 능력을 키우는 전통적 인문학에 반대한다. 좌파인문학은 삼라만상 모두 다 평등하다는 식이다. 그들은 인문학 자체를 형해화시켜버린다. 이런 인문학은 다른 나라에는 없는 인문학이다. 심지어 공산주의 국가에서도 이런 류의 인문학은 없다. 한국좌파 또라이들이 개발해 낸 인류 역사상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인문학이다.

인류가 지적 유산으로 남긴 인문학에서는 좋은 것과 좋지 않은 것, 옳은 것과 옳지 않은 것, 지혜로운 것과 어리석은 것, 가치있는 것과 가치없는 것의 차이를 가르친다. 즉, 우열(優劣)을 가르친다. 예를 들어 설명해보면 공자는 유익한 벗과 해로운 벗에 대하여 논했다. 법학이나 윤리학에서는 가치있는 행위와 반사회적인 행위를 논한다. 역사는 勝將과 敗將에 대해 논한다. 그리고 성공과 실패를 논한다. 승리와 패배의 원인이 뭔가에 대해서도 연구하여 지혜로운 가르침등을 남긴 것이 바로 인문학이다.

이에 대해 한국좌파들은 대상이 다른 둘을 비교하는 것에 경기를 일으킨다. 누가 더 뛰어나고 누가 더 미숙한 지에 대해 논하면 펄쩍 뛴다. 그런 인문학은 평등을 깨뜨리기 때문에 반대한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대상이 다른 둘을 비교하여 우열을 논하고 劣을 지양하고 優를 지향하는 것은 경쟁개념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한국좌파들의 인문학은 모두가 1등되는 세상, 골고루 가난한 사회,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 개천에서 용나면 안 된다 등 모두가 공산주의식 평등개념과 연결되어 있다. 모두가 1등이면 그 누구도 1등이 아니라 다 똑같은 등수인 것이다. 그러함에도 `모두가 1등되는 세상`을 구호로 내세운 건, 모두가 다 1등이 아닌 세상이라고 외치면 아수나로학생들을 현혹시키기 힘드니까 그리 외치는 것이다. 이처럼 좌파들은 공산주의 혁명을 위한 말장난에 불과한 수사(修辭)를 인문학이라고 떠들어대는 것이다.

좌파인문학에 잘 선동되는 사람들은 주로 경쟁에서 좌절한 경험이 많거나 사회에 불만이 많은 사람들이다. 주관적인 경험이나 사회적 계급에 의한 피해의식때문에 좌파세력들이 만들어낸 사이비 인문학의 열렬한 추종자가 된다. 그들이 경쟁제도를 혐오하는 것은 패배의식때문이다. 즉, 그 어떤 경쟁에서도 자신은 늘 뒤떨어질 것이라는 패배감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늘 경쟁에서 패하면서 사는 건 아니다. 어떤 경쟁에서는 충분히 합격하지만 (사회적 대우가 부실해서) 스스로 합격자의 지위를 던져버리는 경우도 많다. 즉 `경쟁제도의 문제`가 아니라 `합격자 처우의 문제`인 경우가 많다. 대표적인 예가 중소기업 취업일 것이다. 생산직 중소기업의 경우 취업경쟁에서 충분히 합격할 수 있지만 대우가 좋지 않아서 포기하는 경우 말이다.

인문학의 주요테마중에 하나가 바로 `차이를 아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다. 그와 유사한 것으로는 바로 케이스 바이 케이스가 있다. 즉 `경우에 따라 사안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A 사례와 B사례가 유사한 듯해도 서로 다르며 따라서 달리 취급해야 한다는 것을 아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다.

다음 칼럼에서는 `차이를 아는 능력`에 대해서 좀더 상세히 논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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