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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09-02-04 10:3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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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 남산(해발 870미터)

천년의 소나무...
잎이 푸르러 그 모습이 청연하다.
껍질이 두꺼워 그 속내가 심연이다.
소나무의 산 남산에 접어든다.
소나무가 나의 마음을 읽어 낸다.

“소나무가 제일 멋지다는 나의 생각을”
내가 소나무의 마음을 읽어 낸다.
“걸음걸음 환영이라는 소나무의 마음을”
소나무의 이심이 나에게 다가와 전심이 되었다.
나의 전심이 소나무에게 다가가 이심이 되었다.

소나무에 빼곡 에워 쌓였다.
그조차도 미덥지 않은지 돌담을 둘렸다.
정사각모양의 절 신둔사(薪芚寺)가 아담하다.
절 울타리의 돌담에는 세월의 인정이 녹아 있다.

노동의 고역이 아니라 쌓는 것의 공덕이었을 것이다.
돌담 너머로 음식을 나누던 시골의 인심처럼,
돌담의 구멍으로 이편과 저편의 공기가 소통된다.
돌담은 가두는 울타리가 아니라 저편으로 펼치는 통로인가 보다.

휑하니 바람이 분다.
터벅터벅 낙엽위로 걷는다.
그 출처가 정하여진 북풍이다.
북풍이 아니니 달려온 곳을 모른다.

혹한이 지난 능선의 바람이 세차다.
머물지 않기에 가속이라 그렇다.
그러니 머무는 것의 의미는 완충인가 보다.

멀리에서 달려온 바람에 휘어지는 가지이다.
그 가지를 원상으로 돌리는 데에도 버거운 소나무이다.
힘겨운 소나무가 그 속마음을 내보일 틈이 없다.
다가가 뚫어져라 눈을 맞추어 보면,
소나무의 언어를 알아 챌 수 있는 것이다.
소나무가 인간에게 마음의 문을 연 것이다.

속내를 들키지 않는 인간의 마음이다.
그 품은 것이 들키지 않기에 속임이 통한다.
속여서 세속의 명리를 얻을 수 있는 것이기에,
섣불리 속내를 내보일 곳도 없어진 세상이다.

진솔함이 무대책으로 당하기 때문이다.
돌길의 비스듬한 경사에도 아랑곳 않고서,
하늘에 수직으로 자라나는 소나무가 의연하다.

구부린 가지조차도 올곧음을 향함이리라.
내가 소나무를 한참 동안 바라보자,
드디어 소나무가 나의 마음을 독해한다.

나의 마음을 송두리 째 다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내가 소나무에게 마음의 문을 연 것이다.
소나무 앞에서는 속마음까지 다 보여주어도 되는 것이다.

언어가 다르니,
소나무와는 말로서는 대화를 나누지 못한다.
그러나 심중이 같으니,
소나무와는 마음으로서 대화를 나누는 것이다.

사람 앞에서는,
경계하느라 감추기에 바쁜 속마음이다.
소나무 앞에서는.
세속의 한 갓 욕심도 다 버린 텅 비운 마음이다.

내가 소나무의 마음을 알았다.
소나무가 나의 마음을 알았다.
나는 곧 소나무가 되었다.
소나무는 곧 내가 되었다.
꾸며낸 감정이입이 아니다.

천성에서 나오는 원래의 감응이다.
나무와 인간이 감응을 하였으니,
더는 감추어야 할 것이 없는 것이다.
산의 본성이 원래 그러한 것이다.

아스라한 능선이 아름답다.
그 까닭은 절묘한 대칭에 있다.
능선이 거느린 낭떠러지이다.
좌우의 질량의 비중이 같은 것이다.
그 능선에서 만나는 거북바위이다.
물기를 막 털어낸 생생한 실물 같다.

바다의 그 먼 곳에서 걸어와 능선에 떡하니 자리 잡았다.
무슨 사연이었을까.
산의 수명을 지켜주고 싶었을까.
소나무의 푸름에 살고 싶었을까.
거북바위 등에서 기원의 절을 올린다.
소나무와 더 원활한 대화를 가능케 하여 달라고,

잎새를 다 떨구고서,
능선위에 우뚝 선 활엽수이다.
겨울을 견디는 것의 지혜는 떨구는 것이다.
마치 고개를 떨구고서,
새로운 다짐을 이루는 어린아이 같다.

활엽수의 끝가지에 눈을 맞춘다.
활엽수의 끝가지는 산의 첨병이다.
제일 먼저 바람을 맞는 것이다.
그리하여 산이 대비할 수 있게 한다.

제일 먼저 눈발을 맞는 것이다.
그리하여 산이 하얀 치장을 할 수 있게 한다.
제일 먼저 비에 맞는 것이다.
그리하여 산이 산뜻한 세면을 할 수 있게 한다.
여리고도 연약한 끝가지이다.
그 끝가지가 산을 통째로 주재하는 것이다.

소용됨이 있어서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게 쌓는 것만으로도 적선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쌓는 것이 자식에 대한 바램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쌓을 적합한 터가 있고,
거기에 안성맞춤인 돌이 있었으니 쌓았던 것이다.

능선을 따라 쌓은 석성에서 세월의 흔적을 본다.
석성에 소용되었던 바위와 돌과 흙이다.
세월을 겪느라 둥글어 모난 곳이라곤 없다.
인생이 그러하여야 하는 것임을,
석성의 길이 봉수대에서 정상까지 이어진다.
시공을 초월하여 그 적석의 돌위로 걷는다.

계곡보다 능선에서 더 푸른 소나무이다.
산의 능선이 가지처럼 뻗었다.
계곡을 타고 솟아오르는 능선이다.
짙은 화장을 마친 누님처럼,
능선위의 소나무가 짙은 청색의 풍경화 같다.

평수를 차지한 남산의 정상에 선다.
펼쳐진 조망이 원형경기장 같다.
능선위 소나무의 빛깔이 크레파스채색 같다.
그 푸름이 너무 짙어 동해바다 같다.
능선은 그 기운들을 소나무를 통해 푸른 하늘에 전하는가 보다.

바위에 턱 걸터앉는다.
바위에 기댄 소나무 아래다.
사방으로 그 푸른 가지를 펼쳤다.
솔잎 끝자락의 방향을 응시한다.
순간 심장의 박동이 천지를 요동치게 한다.
야밤을 휘젓는 박쥐날개의 각진 모습처럼,
저 편의 화악산이 날아오르고 있다.

펼쳐진 박쥐날개의 한 가운데에 솟은 봉우리이다.
그 봉우리가 뾰족한 머리가 되었다.
화악산이 오랜 출정준비를 다 마친 듯,
박쥐가 되어 남산으로 맹렬하게 날고 있다.
저편의 화악산과 이편의 남산이 시공을 현세로 되돌리고 있다.
그 소용돌이 속에서 누군들 심장이 박동하지 않을 것인가.

추신: 능선 아래쪽에 "빨래 할머니 바위"가 있는데,
그 바위가 흰색을 띠게 되면 비가 내린다는 전설이 있다.


산행일: 2009년 1월 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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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극원 취재기자 정극원 취재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 대구대학교 법과대학 학장
    대구대학교 법대 졸업
    독일 콘스탄츠대학교 법대 법학박사
    한국헌법학회 총무이사(전)
    한국비교공법학회 총무이사(전)
    한국공법학회 기획이사
    한국토지공법학회 기획이사
    유럽헌법학회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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