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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4-03-10 22:5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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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능력은 크게 둘로 분류할 수 있다. 정신적인 능력과 육체적인 능력으로 말이다. 정신세계에서 나오는 능력은 학문적 능력, 예술적 능력, 정서적 능력, 商業적 능력등이 있다. 학문적 능력이 뛰어나면 판검사, 의사, 세무사등 전문직종이나 고급관료, 정치인, 교사 등이 업무에 수월하다. 예술적 능력이 뛰어나면 주로 창작의 일을 하게 되는 데 화가, 작가, 시인, 영화감독등이 업무에 수월하다. 그리고 정서적 능력이 뛰어나면 고객유치행위, 보험등 계약분야, 심리치료, 간호, 유치원등의 일에 수월하다. 상업적 능력이 뛰어나면 장사하는 일에 수월하다.


또 다른 인간의 능력인 몸뚱아리에서 나오는 육체적 능력을 살펴보면 체육능력, 안무능력, 몸개그능력, 성대묘사능력, 가창력, 악기연주력, 섹시한 매력등이 있다. 그래서 육체능력이 뛰어나면 운동선수, 연예인, 개그맨, 성우, 악기연주등의 일에 수월하다.


인간은 정신적 능력과 육체적 능력을 함께 가지고 있으므로 실제에 있어서는 그 두 종류의 능력을 가지고 조합적인 활동을 하긴 하겠지만 어느 쪽에 더 비중이 크게 작용하는 가는 분명히 구별할 수 있다. 쉽게 설명해보면 바이올린 연주가인 장영주가 연주회를 연다고 하자. 그러면 그녀는 무대에 올라가서 `정신적 능력에 해당하는 예술적 능력(곡을 해석하고 이해하는 능력) + 육체적 능력에 해당하는 악기연주력`을 동시에 조합적으로 사용하게 되는 것이다.


각설은 이쯤으로 하고 본론으로 들어가 보겠다. 본 칼럼에서 다루고자 하는 능력은 인간의 능력의 하나인 정신적인 능력중에서 특히 `학문적 능력`에 관한 것이다. 여기서 학문적 능력이라는 말은 쉽게 말해서 `공부를 잘할 수 있는 능력`이라는 뜻이다.


공부에는 왕도가 없으므로 그냥 열심히 하면 조금씩 학문적 능력이 업그레이드 되면서 공부를 매우 잘하게 된다. 이 말이 정답이다. 그런데 문제는 어떤 학생은 열심히 하니까 공부를 잘 하는 데, 다른 학생은 열심히 해도 공부를 잘 못한다. 여기에서 `공부를 열심히 한다는 것이 과연 무엇을 뜻하는가`에 대한 철학적 물음이 생기게 된다. 이 물음에 답하기에 앞서 `공부를 열심히 하려면 어떤 방식이 좋은 지`에 대해서 먼저 이야기해 보기로 한다.


1. 공부를 열심히 하려면 혼자 공부하는 게 좋은가, 친구를 자기 집으로 오라고 해서 상을 펴고 같이 공부하는 게 좋은가


이것이 첫 번째 질문이다. 이 질문은 우리나라 좌파들이 떠들어대는 북유럽식 협력학습과도 맞물려 있다. 우선 협력학습의 개념이 무언가를 확정지을 필요가 있다. 필자가 생각하기에 협력학습이라는 것은 진리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學人들이 서로를 도와 최종적 목표에 도달하는 학습이라는 뜻으로 이해된다. 협력학습이라는 의미를 이렇게 파악한다면 `과연 인류 역사상 협력학습이 아니었던 적이 있었느냐`하는 의문이 생긴다.


우리가 수천년 동안 있어왔던 과학자, 철학자, 인문학자들의 지식과 이론에 대해서 아는 것은 그들과 같이 만나봐서 아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써놓은 책을 봤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에서처럼 각자 자기 집에서 인터넷 켜놓고 청년실업이나 학교폭력에 대한 토론, 물리학, 생물학, 법학 학습등이 가능한 것은 매개체가 있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책이 그것이었고, 요즘은 책에 쓸 내용을 인터넷의 블로그에 써놓으면 그것이 과거의 책의 역할을 하는 매개체가 되는 것이다. 한 사람은 노르웨이에 살고, 다른 사람은 일본 도쿄에 살고있고, 또 한 사람은 아르헨티나에 살고 있어도 협력학습은 가능하고 또 한 인류는 쭉 그렇게 해 왔다.


꼭 만나서 새우깡을 상 위에 놓고 같이 먹으면서 해야 협력학습인 것은 아니다. 역사에는 서신교류를 통해서 학문적 이론에 대한 논의를 한 사례도 있다. 이렇게 협력학습의 개념을 살펴보면 인류는 단 한 순간도 협력학습 아니었던 적은 없었다. 그러함에도 한국 좌파들이 떠들어대는 협력학습이라는 것을 들어보면, 아마도 그들이 말하는 협력학습이란 그런 의견교류가 동일 장소에서 시간적 텀이 짧은 순간에 이루어져야 하는 것을 말하는 것 같다. 즉, 한국좌파들의 주장에 따르면, 서신이나 책으로 의견이 왔다갔다하면 시간이 오래 걸리므로 `우리 일단 만나`로 한 장소에 모인 다음에 그 자리에서 즉각적으로 의견이 오가는 토론학습을 그들은 협력학습이라고 이해하고 있는 것 같다.


한국의 좌파애들이 떠드는 협력학습이라는 것이 참 웃기는 들리는 이유는 이러하다. 학문적 토론이 될려면 참가자들 각자가 상당한 수준의 지식을 축적된 연후에나 가능한 것이다. 전혀 지식이 없는 상태에서 모아놓고 떠들면 진척되는 것이 하나도 없다. 그렇다면 어느 정도 지식을 안 상태에서 어떤 지적인 과제를 던져놓고 해야 하는 데, 그럴려면 우선 事前적인 학습이 이루어져야 한다.


핀란드에서 행하는 협력학습이라는 것도 알고보면 어느 정도의 지식을 학생들에게 가르쳐주고 그에 관한 지적인 과제를 주어 학생들 서로 토론하게 하면서, 교사의 주도하에(또는 암암리에) 올바른 지식으로 유도하는 것일게다. 이런 수업방식은 학생들에게 수업시간중에 지루함을 느끼지 않게 해주고 ,학생 스스로 학습에 참여케 함으로써 능동적으로 공부하는 태도를 길러줄 것이다. 그러나 단점도 만만치 않은 데 학문적 토론이라는 것을 시켜놔봐야 말장난 수준에서 끝나는 경우가 많고, 하나의 지식과 지적인 과제를 터득하는 데 드는 시간이 엄청나게 많이 소요된다는 점이다.


이미 앞서 살다간 선배 학자가 완성시켜 놓은 지식을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프린트물이나 서적을 보고 1시간 정도 집중해서 읽어보고 이해하면 끝날 내용을 가지고, 토론협력학습이라는 명목하에 그것에 대한 답을 찾는답시고 이 얘기 저 얘기 하면서 시행착오를 엄청 거치고 하면서 100일이나 지난 이후에나 겨우 그에 관한 지식을 습득하게 된다. 만약 학습지도교사의 능력이 탁월하다면, 목표로 삼은 지식도달에 대한 시간적 소모를 대폭 줄일 수는 있을 것이다. 결국은 핀란드의 협력학습이라는 것도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교사의 학습지도력에 의해 학생의 지식축적 여부의 성패가 갈리는 것이다.


`완전히 이해하고 숙지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교사가 학생들에게 시행착오나 시간적 소모없이 일방적인 주입식으로 전달하는 한국식 수업방식`과 `완전이 이해하고 숙지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교사가 학생들로 하여금 비록 시행착오나 시간적 소모가 있을 지라도 서로 탐구한 내용을 토론하게 하여 지식을 알아가도록 유도하는 핀란드식 수업방식을 비교해봤을 때 과연 어떤 것이 더 좋은 것인가는 쉽게 판정짓기 힘들다.


필자는 한국식 수업방식이 결코 핀란드식 수업방식보다 뒤떨어지는 방식이라고 생각치 않는다. 한국식 수업방식은 워낙 학습해야 할 양이 방대하고, 하루종일 학교에 잡아두는 시스템이라서 학생들이 공부라면 학을 떼게 하는 단점이 있긴 하지만, 학습흥미도는 떨어질지라도 지식축적에는 매우 효율적이라고 본다.


학문능력을 업그레이드 시키는 것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첫번 째 방법은 이미 확립된 지식과 지식체계를 일방통행식으로 주입받아 이해 암기한 연후에, 그것에 대한 좀 더 깊은 의미를 스스로 음미해서 깨닫는 방법이 있다. 또 다른 방법은 처음부터 자기 스스로 탐구하여 확립된 지식과 지식체계를 구축하는 방법이다. 그런데 後者는 천재들에게나 해당되는 것이지, 평범한 학생들에게는 어림도 없다. 물론 천재 흉내를 내다보면 어느 정도 수준까지 도달할 수 있다는 근거 때문에 그 방법도 나쁘지 않다.


한국식 수업방식은 前者의 방식을 택했다. 반면 핀란드식 수업방식은 後者의 방식을 택했다. 필자의 판단으로는 초중고등학생때에는 한국식 수업방식을 따르다가 대학가서는 핀란드식 수업방식으로 하면 좋다고 본다. 즉, 초중고등학교 때에는 교사의 주도하의 주입식 수업방식으로 하다가 대학가서는 토론식 수업방식으로 하는 것이 최상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의 우수한 학생들의 학문적 능력이 `매우 쓸모가 있지만 결정적으로 가장 값어치있는 최상의 학문적 능력인 창의성이 없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워낙 공부량이 방대하고 달달 외우고 해서 축적된 지식의 양은 상당하고 그 수준도 높다. 그런데 창의성이 없는 이유는, 앞서 말한 바대로 한국의 수업방식을 충실히 따라서 이해하고 암기하는 데에는 성공했으나 자기 스스로 이미 습득한 지식에 관하여 그것에 대한 좀 더 깊은 의미를 음미하는 작업을 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한국의 우수학생들은 교과과정에서 배운 것을 이해하고 암기하는 데에는 매우 능숙하다. 그러나 한국의 우수학생들은 한국식 수업방식에서 스스로 하도록 남겨 둔 부분 즉, `이미 배워 암기한 지식에 관하여 새로이 음미해보고 스스로 그 깊이있는 탐색을 하는 작업`은 하지 않는다. 한국의 우수학생들은 시험점수에 필요한 정도에서 학습을 딱 멈춘다. 오히려 한국식 수업방식에서 스스로 해보라고 남겨 둔 부분을 했다가는 시험점수 경쟁에서 불리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초중고등학교 수업방식에서 남겨 둔 부분에 관한 학습을 대학에 가서는 해보아야 하는 데, 한국 대학은 그런 학문적 능력을 키워주지 못한다. 요즘 대학들은 어떨지 몰라도, 필자가 대학다니던 시절에는 대학에서 하는 공부가 고등학교 공부의 수업방식과 하등 다를 바 없었다. 필자가 다니던 시절에는 중고등학교의 연장선이 대학이었다.


이제 정리해서 첫 번째 질문에 답해보자. `공부를 열심히 하려면 혼자 공부하는 게 좋은가, 친구를 자기 집으로 오라고 해서 상을 펴고 같이 공부하는 게 좋은가`에 대해 답변해 보겠다. 선생님에 의해 일방적으로 주입된 내용을 이해하고 암기하여 지식을 습득한 이후에 스스로의 능력으로 그 지식에 대한 음미와 깊이있는 탐구하는 일련의 학습행위는 혼자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고 유익하다. 만약,그런 학문적 능력이 약하거나 공부에 지루함을 많이 느낀다면 친구를 집으로 데리고 와서 상펴고 같이 공부하는 게 좋다. 결론적으로 필자가 첫번째 질문에 내린 답은, 前者가 최선이고 後者가 차선이라는 것이다.


2. 공부를 열심히 하려면 혼자 공부하는 게 좋다고 하는 데, 그렇게 혼자 공부해서 성공한 사람으로는 구체적으로 누가 있는가


우리가 배우는 교과서를 만든 사람들 대부분은 다 그에 해당한다. 뉴튼, 아리스토텔레스, 아인시타인, 그리고 수많은 노벨상 수상자, 교과서에 나오는 인문학자가 모두 여기에 해당된다. 당대의 최고들은 모두 여기에 해당된다. 그런데 그들 모두에게는 공통점이 하나 있다. 일방적 지식주입을 해주는 선생들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점이다. 소위 천재급(창의성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스승이 없다. 다 혼자 탐구한 것이고, 그들은 그렇게 관련 책을 보는 것 외에는 혼자 공부하는 사람들이다.


앞서 말했듯이 한국의 우수학생들은 천재급을 목표로 삼고 있지 않다. 한국의 우수학생들은 크리에이티브한 학문적 업적이나 성취에 목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명문대학을 입학졸업하여 고수익의 직업을 목표로 삼는다. 한국의 우수학생들의 대다수는 천재들이나 하는 학문적 노력은 내 인생에 피곤만 가져다주며 돈 잘벌고 사회에서 명문대출신으로 대우받고 줄 잘서서 국회의원 뺏지달면 성공한 인생이라고 생각한다. 그러하기 때문에 시험 점수에 최적화된 학습의 범주를 넘어서지 않는다. 그 이상으로 이미 습득한 지식에 대한 음미나 깊이 있는 탐색은 관심에 없다. 천재급으로 학문적 성취를 이루지 못하더라도 그 정도면 만족한 인생이라고 여긴다.


크리에이티브한 천재급에 들지는 못하지만 혼자 공부해서 성공한 사람에 대해 알아보자. 여기에는 두 부류가 있는 데, `가르쳐 줄 선생이 굳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에 혼자 책보고 공부해도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혼자 열심히 공부해서 성공한 사람들`과 `그래도 선생이 가르쳐주는 거 받아먹고 집에가서 혼자 열심히 공부해서 성공한 사람들`로 나뉜다.


제55회 사법시험에 수석합격한 신지원씨와 이번에 검찰총장으로 임명된 김진태총장이 前者에 해당한다. 그들은 굳이 선생님한테 배울 필요 없이 혼자 열심히 해도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혼자 책보고 공부해서 성공한 사례이다. 고교중퇴 후에 신지원씨는 집에서 혼자 열심히 공부했다고 하고, 김진태총장은 절에가서 혼자 열심히 공부했다고 한다.


대부분 수재들은 자신이 남들보다 뛰어나다는 것을 스스로 알기 때문에, 소신껏 고교중퇴하고 공부해서 성공하는 것이 충분히 가능하고 쉬운 일에 속한다. 그러나 이런 수재들은 숫자가 매우 적다. 그 외에 혼자 공부해서 성공한 사람들은 모두 다 선생님한테 배운 거 가지고 집에와서 혼자 열심히 공부한 케이스에 해당한다.


3. `공부를 열심히 하는 데 있어서 가장 좋은 방식은 혼자 공부하는 것이다`라는 결론이 의미하는 것들


위에서 우리는 `공부를 열심히 하기위한 최선의 방식은 혼자하는 것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결론이 맞다면, 그 동안 우리 사회에 퍼져있고 있던 고정관념들이 틀렸음을 깨닫게 된다. 독자 여러분들도 알고 있다시피, 대한민국에서 벌어지는 담론들의 이면에는 정치적인 계산이 들어가 있는 것이 많다. 교육에 관한 담론도 예외는 아니다. 다른 담론에 비해서 가장 정치적인 계산을 깔고 퍼뜨린 의견이나 주장이 가장 많은 담론을 꼽으라면 아마도 교육에 대한 담론이라고 할 수 있다.


필자가 과거 칼럼에서도 여러 번 지적했듯이,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 `입시경쟁으로 어쩌구 저쩌구하는 내용의 의견들` `모두가 1등되는 교육` `아무거나 하나라도 잘 하면 대학가는 대입제도` `서울대 폐지론` `모든 직업이나 직종이 동일한 월급을 받는 사회를 만들자` `협동학습`등등 좌파진영에서 외치는 구호나 교육정책의 이면에는 공산주의 사상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좌파언론들은 지속적으로 그런 내용들을 정신적으로 아직 높은 수준의 분별력을 갖추지 못한 일부 청소년들에게 주입함으로써, 사상적으로 좌파 성향으로 만들어서 좌파자신들이 추구하는 정치적인 목적을 이루고 싶어하는 것이다.


좌파진영이 수 십년 동안 역점을 두었던 사업중에 하나가 ` 대한민국을 매우 살기 힘들고 불행한 나라라고 생각하도록 하기 위해 좌파 자신들의 주장을 국민들 머리속에 주입시켜서 불만을 갖는 사람들을 많이 만들어내는 것`에 있었다. 불만을 갖는 국민들의 숫자가 많아지면 혁명을 할 수 있는데, 좌파들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혁명은 앞에 말한 공산주의 내지는 사회주의 혁명을 뜻한다. `골고루 가난한 사회` ` 협동농장에서 공동 작업하고 모두가 똑같이 동일임금 받으면 경쟁이 없어지고 빈부 격차 또한 없는 사회가 된다` 는 주장이 그것이다.


이것은 좌파 운동권중에서 주로 PD계열에 의해 주장되고 있다. NL은 대한민국이 미국의 핍박을 받는 식민지이고, 그로 인하여 조국의 현실을 비참하다고 설정해놓고 좌파자신들이 불행에 빠진 조국을 해방시켜야 한다는 이론이다. 둘 다 논리구조는 비슷한 데, 대한민국을 비극적이고 불행한 나라라도 떠든다는 점과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자기들 주장대로 공산주의 사회로 만들면 다 해결된다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없다


이런 정치적인 계산하에 좌파신문사인 한겨레,경향, 오마이뉴스는 `대한민국은 썩을대로 썩었고 불행하고 비극적인 나라`라는 내용을 최대한 많이 퍼뜨리려고 한다. 그 반대진영인 우파진영은 `대한민국에 있어서 간혹 나타나는 안좋은 모습들은 다른 선진국에서도 일어나는 그런 것일 뿐, 좌파들이 말하는 것처럼 우리 사회가 그렇게 비극적이고 썩은 불행한 나라가 아니다`라는 내용을 많이 퍼뜨린다. 즉, 좌파들은 `대한민국은 썩고 불행한 나라이니까 뒤집어 엎자`이고, 우파들은 `대한민국은 자랑스럽고 살만한 나라이니까 수호하자`이다


좌파들은그동안 `대한민국이 썩고 비극적이며 불행한 나라라는 주장`을 교육담론 속에서도 펼쳐왔다. 사실 그들의 주장을 들어보면 현실적으로 그게 맞는 주장들처럼 들리기도 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들의 교묘한 언변과 논리에 속아 넘어가는 청소년들이 상당히 많다. 수 십년동안 국민들로하여금 대한민국을 부정적인 시각으로 원망하고 불평불만을 갖도록 만들기 위해서 펼쳐왔던 좌파들의 교육담론 논리를 좀더 상세히 살펴보자.


(1)좌파들은 입시경쟁때문에 서로가 짓밟고 올라서려고 하는 비인간적인 사회가 되었고, 누구는 좋은 대학에 가고 누구는 좋은 대학에 못가게 되는 일이 생겼으며, 월급이 많고 적은 직업이 생기는 바람에 빈부격차가 생겨서 국민들이 비극적이고 불행하게 되었다고 주장해왔다. 따라서 이런 대한민국은 사랑하고 가꾸어야 할 대상이 아니다. 부조리하고 불의한 대한민국이라는 것이 좌파들이 주장이었다. 상당히 교묘한 논리를 전개하는 것을 필자가 격파하였으며 이미 끝난 논쟁이다.


(2) `누구는 공부를 잘하고 누구는 공부를 못하는 데, 그 이유는 부잣집 아들은 사교육을 받고 가난한 집 아들은 사교육을 받지 못해서이다. 빈부격차로 인해 가난한 집 아들이 부잣집 아들과 비교하여 절대로 공부를 잘할 수 없는 사회가 되었다. 이렇게 부조리하고 불의한 대한민국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라고 좌파들은 주장해왔다. 그외에도 국민들과 청소년들이 대한민국에 대하여 불평불만을 갖게끔 만들 수 있는 숱한 논리를 생산해왔다.


지금 우리사회는 사교육 열풍때문에 골머리를 썩고 있는 데, 거기에 일조한 것이 바로 좌파이다. 그들이 만들어 낸 위와 같은 논리들이 국민들에게 상당부분 먹혀들어간 것이다. 오늘 날 대한민국의 상당수는 학생들에게 있어서 사교육이 명문대학이나 인생성공의 성패를 좌우하는 중요한 요소라고 믿는 듯하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세상에 공부만큼 공정한 게임이 없다. 왜냐하면 공부성적은 전적으로 그 학생 자신에게 달려있기 때문이다. 부모가 대신 공부해 줄 수 없고, 당사자에 해당하는 학생에 대해 제 3자가 해줄 수 있는 일은 격려나 학원보내주기가 고작일 것이다. 그런데 학원보내주기도 당사자인 학생이 성적을 올리는 데 있어서 그렇게 효과적이고 유익하지 않다.


학원을 다니는 이유는 혼자 공부하기가 안되는 학생이기 때문이다. 학생의 공부 의지와 자질 자체가 부족하니 고심하게 되고, 그나마 잡아볼 지푸라기라도 잡아야겠다는 심정으로 사교육에 몰빵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최소한 마음만은 편안하기 때문에 `사교육 효과가 그리 크지 않음에도 효과가 크다`고 애써 믿는다. 공부를 잘하는 데 있어서 차선의 방식을 택했다는 것은 결국 결과에 있어서 차선 이상의 좋은 성적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류는 수 천년 동안 살아오면서 변하지 않는 사실이 있다. 그것은 수 천년동안의 경험을 통해 알게 된 사실인 데, 공부에는 왕도가 없으며, 공부에 있어서 `제 3자가 해줄 수 있는 것은 말(馬)을 마실 수 있는 물가에 데려다 주는 것이 전부이고 물을 마시는 것은 말(馬)이 스스로 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결국 공부는 남이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학원에 의지하는 것은 그다지 쓸모 없다. 또한 부모의 빈부격차때문에 공부를 더 잘할 수 있는 가난한 집 아들이 부잣집 아들보다 공부를 못하게 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핑계일 뿐이다.


1960년에서 1980년도까지에는 좌파들의 그 같은 주장에 대해서 조금은 수긍해줄 수 잇는 부분이 있었다. 그 당시에는 공부를 잘 함에도 돈이 없어서 중학교를 못 가는 학생들이 꽤 있었고, 공부 교재도 설명이 상세하지 않고 허술한 편이어서 이해하기가 쉽지 않아서 과외선생이 있는 학생이 조금 유리한 경우가 있었다.


그러나 오늘 날에는 그런 일들은 거의 다 사라졌다. 돈 없어서 공부잘하는 학생이 학업을 포기하는 일이 사라졌고, 공부교재도 혼자 공부하기에 충분할 정도로 설명이 상세하고 매우 이해하기 쉽게 되어있다. 게다가 TV과외도 해준다. TV과외에 나오는 선생님들은 대부분 실력이 검증된 사람들이다.이런 상황에서는 학원다니는 데에 시간을 빼앗기기 보다는 혼자 공부하는 시간을 늘릴수록 성적이 좋게 나오는 것이다. 아주 필요한 부분에서 최소한으로 학원에 다니는 것까지는 뭐라 말할 수 없으나 학원에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은 좋지 않다. 여기서 좋지 않다는 것은 성적 향상에 좋지 않다는 뜻이다.


`뭐든지 결과가 좋지 않으면 자신의 부족함을 돌아보기 보다는 사회 탓을 하는 국민성`때문에 상당수는 좌파들의 그런 주장에 쉽게 현혹되는 것이다. 자기보다 더 공부를 잘하는 사람은 자기보다 더 훌륭해서가 아니라, 부잣집 부모를 만나서였다고 핑계를 대는 것이다. 국민들에게 이런 마인드를 심어놓는 신문이 한겨레,경향, 오마이뉴스이다.


한국의 학부모에게 한마디 해 주고 싶은 말이 있다. 자기 자식이 학원에 보내달라고 하던가, 우리 아들을 학원에 보내지 않고서는 가망이 없다라고 생각하고 학원에 몰빵하는 학부모들은 자식의 공부에 대한 기대를 많이 접는 게 좋다. 무리하게 공부시키지 않는 것이 좋다는 뜻이다. 혼자 공부할 수 없다는 것은 적어도 자기 자식이 천재나 수재는 아니며 노력형 우수학생의 자질도 부족하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에 `좀 덜 성공하는 사람`으로 만족하는 게 좋다. 자기 아들이 능력과 의지가 안되는 데 죽자고 서울대 의대, 판검사 시킬려고 악을 쓰면 , 부모도 고통이고 자식도 고통이다. `자기 자신에게 맞는 적당함`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사교육열풍은 `공부는 결국 혼자하는 것이다라는 역사적 경험사실에 동의하지 않고, 돈 처바르면 성적이 오를 수 있다는 거짓된 믿음에 근거하는 것`이다. 국민들의 의식이 바뀌어야 사교육열풍도 잠재울 수 있다. 물론 국민들의 의식개혁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사회개혁도 필요한 부분이 있다. 병행해서 나가야 함은 물론이다.


4. 혼자하는 공부에 있어서 유의해야 할 점은 무엇인가


혼자하는 공부에도 위험성은 있다. 혼자하는 공부가 최악일 때에는 자칫 또라이가 많이 나올 수 있다는 점이다. 이에 관해서 전에 칼럼을 쓴 적이 있다. 노르웨이에서 브레이빅크라는 인간이 섬에서 열리는 학생캠프에 가서 총기를 난사한 사건이 있었다. 그는 혼자서 역사공부를 독파했으며 실제로 그에 관한 지식이 상당하다고 한다. 그런데 그의 잘못은 자기만의 정신세계(지식)를 구축했기 때문에 자신의 지식과 그로 인한 역사관, 세계관이 옳다고 여겼다는 점이다.


아인시타인, 에디슨도 혼자 공부했지만, 자신의 정신세계(지식)에 대하여 세상과의 소통을 통하여 검증을 받는 과정을 거쳤다는 점이다. 학계의 발표나 언론매체 발표를 통하여 객관적으로 입증하고 인정을 받았다는 것이 브레이빅과 다른 점이다.


선생님없이 혼자 공부하는 사람 중에는 개똥철학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 혼자 공부하는 자질과 능력이 안됨에도 혼자 공부하다가 그런 엉뚱한 정신세계를 갖는 사람들이 많게 된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김대중 前대통령이다. 감방에서 혼자 책 놓고 엄청나게 읽었다는 데, 훗날 그의 철학과 지식들은 공론장에서 개똥철학으로 판명난 게 많다. 고려연방제 통일론, 한가지만 잘해도(접시만 잘 닦아도) 누구나 대학갈 수 있다는 신지식인론, 대중경제론 이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다.


혼자 공부를 하되, 자신의 정신세계(지식)가 세상에 객관적으로 인정받을 만한가에 대해서는 항상 고민해봐야 한다.


5. 공부를 열심히 하려면 혼자 공부하는 게 가장 좋다고 하는 데, 나는 혼자 공부하는 것이 무지 힘들고 그렇게 혼자 공부해서 성공할 자신이 없다. 그러함에도 굳이 공부로 성공하려면 어떻게 하면 좋은가


사실 위에 언급한 혼자 열심히 공부해서 성공하는 우수학생들의 숫자는 매우 적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일반학생들은 3번 질문의 당사자들일 것이다. 우선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극소수의 우수학생들보다 조금 덜 성공하면 된다. 한달 전 쯤에 쓴 칼럼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초등학생때에는 boys be ambitious였다가 졸업할 때쯤에는 자기가 그 꿈이 자신의 능력에 맞게 조정된다고 말이다. 그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모습이고, 그렇게 되어야 이 사회가 정상적으로 굴러가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3번 질문의 당사자에 해당되지만, 노력을 열심히해서 우수학생들과 같은 성공을 거두고 싶은 사람들은 차선의 방법을 택하면 된다. 혼자 공부하는 것이 힘들면 우수학생을 친구가 된 후 같이 공부하거나, 우수학생의 공부하는 방식을 눈여겨보고 혼자 공부하는 법을 억지로라도 따라해 보는 것이다. 그러다보면 자신도 혼자 충분히 공부할 수 있는 능력과 의지가 생긴다.


6. 공부방법론에 있어서 요즘 문제가 되고 있는 선행학습에 대한 考察


(1) 序


국회는 20일 본회의에서 초·중·고교의 '선행 학습'을 금지하는 내용의 '공교육 정상화 촉진·선행교육 규제 특별법'을 통과시켰다. 여 야의 합의로 통과된 이 법안은 접근방법과 규제 범위가 매우 적절하게 이루어져 있다고 보인다. 그에 관한 입법 필요성이 꾸준이 제기된 상황에서 지금에야 통과되었으니 다행이라 할 수 있다. 이하에서는 이 법안에 대하여 간단히 논평을 해보기로 한다.


(2) 공교육 정상화 촉진. 선행교육 규제 특별법에 담겨있는 선행교육 규제접근방식에 대하여


본 법안은 公的 영역과 私的 영역으로 나누어서 접근하고 있다. 먼저 공적 영역(제도권 內)을 간략히 살펴보면 이러하다. 초중고교 학교과정에서 선행교육을 금지하고, 선행학습을 유발하는 평가를 금지했다. 그에 대한 실효성 확보를 위해 각급 학교장에게 의무를 부과하고 어길 시, 교육당국은 그에 대하여 징계권을 행사하게 된다.


제도권(공적영역) 에서 이루어지는 교육커리큘럼과 수업방식에 대하여 국가가 적절한 방식을 찾아 사회적 필요에 맞게 입법을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고 해야 할 책무에 속한다.


문제는 私的 영역을 어떻게 규제할 것인가가 문제가 되는 데 , 그 이유는 국민 개개인의 정신적인 자유권에 속하는 영역에 국가가 함부로 개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전적으로 국민 개개인들이 자기 판단에 따라 삶을 영위해야 할 자유의 영역으로 국가가 인위적으로 개입할 수 없음이다.


(3)선행학습금지에 관해 私的 영역을 어떻게 규율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방법론


필자는 과거에 이런 글을 쓴 적이 있다. 사회에서 과도한 사교육 열풍은 교육열과도 관계가 있는데, 교육열을 다소 누그러뜨리면 사교육열풍도 상당부분 수그러들 것이다라고 말했었다. 교육열은 교사,학부모 기타 제 3자가 학생들에게 공부의 필요성과 공부시간을 많이 갖도록 고취시킴으로써 높아진다. 따라서 교육열을 누그러뜨리려면 학생들에게 공부를 열심히 하라고 독려하지 못하도록 하면 된다. 그런데 교육열을 부추기는 행위금지는 교사나 일선학교에게 그에 관한 의무를 부과할 수 있으나, 학부모에게는 의무를 부과할 수 없다고 필자는 주장한 바 있다. 그 이유는 20일 통과된 本 법안의 선행학습규제 접근방식과 동일하다.


사적 영역은 여기에서 두 부류로 나뉜다. 하나는 학부모와 학생에 해당하는 개인적 정신적 자유영역이다. 또 다른 하나는 사교육기관(학원, 교습소)으로서 개인적 정신적 자유 영역에 속하는 것이 아닌, 영업에 관한 사회활동 영역이다. 前者는 국가가 개입하여 규제할 수 없는 영역임은 당연하다. 따라서 학부모와 학생이 설사 선행학습을 강행한다고 하더라도 국가는 그에 관하여 규제하지 못한다. 국민 개개인의 정신적 자유 영역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교육 기관의 영업에 관한 사회활동 영역은 입법 목적과 필요성에 의하여 그 영업방식에 관하여 규제를 가할 수 있음은 당연하다. 따라서 本 법안은 학원·교습소 등 사교육 기관에 대하여 선행교육을 광고하거나 선전하지 못하게 하고 있다. 이 역시 타당한 입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학원강사와 학생이 선행학습을 강행한다고 한다면 이 역시 개인적 정신적 자유영역에 속하므로 국가가 입법규제를 가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결국 남은 부분은 개인적 정신적 자유영역에 관한 부분인 데 , 이 부분에 대하여 국가의 입법규제가 불가능하다면 이 영역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의 문제만 남았다.


(4) 개인적 정신적 자유영역에 속하는 부분에 대하여, 입법적 규제를 취하지 않으면서 선행학습금지라는 사회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방법


인간은 잘못된 상식(또는 생각)에 의하여 어리석은 행위를 할 때가 종종 있다. 그것이 군중심리로 형성되어지면 일종의 신드롬이나 유행처럼 확산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설명하면 이러하다. 어떤 농촌이나 시골에서는 불에 데인 어린아이의 상처에 된장을 발라주는 경우가 있다. 일종의 민간처방인데, 그것은 별로 화상에 좋은 방법이 아니라는 것이 의학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또 다른 예를 보자.공무원시험을 치르는 수험생들이 있다. 그런데 그들 사이에는 근거없는 믿음에 의하여 다음과 같은 유행이 번져 있었다고 치자. 팬티를 뒤집어 입으면 합격한다는 속설로 때문에 많은 수험생들이 시험장에 들어갈때 팬티를 뒤집어 입고 들어간다고 하자.


위의 두 가지 경우처럼, 인간의 잘못된 상식에 의하여 저지르는 어리석은 행위에 대하여 그런 사회적 현상이 벌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한 방법으로 입법규제를 한다면 그것이 옳은 방법일까? 국가가 나서서 火傷을 입은 사람에게 된장을 바르는 자는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벌금에 처한다고 하는 것인 타당한가이다. 팬티를 뒤집어 입고 시험장에 들어오는 사람은 합격을 취소한다고 입법규제하는 것이 타당한가이다. 그런 데까지 국가가 나서서 입법규제하는 것은 자유민주주의에서는 허용되지 않는다.


입법규제가 부적합하다면 인간의 잘못된 상식에 의하여 저지르는 어리석은 행위를 더이상 하지 못하도록 할 수 있는 무엇인가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그것은 私的 영역은 私的 영역에서 해결하면 된다. 즉, 위와 같은 것들은 전혀 잘못된 상식에 터잡은 어리석은 행위라는 것을 일깨워주면 된다. 즉, 이런 경우 보통 TV나 라디오, 신문에 전문가들이 나와서 화상에 된장을 바르는 행위는 의학적으로 좋지 않다는 것을 일깨워주면 된다. 그리고 공무원시험에 팬티를 뒤집어입는 것과 합격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일깨워주면 된다. 따라서 이런 경우 국가의 입법규제를 통하지 않고서도 우리는 원하는 사회정책적 목표를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즉, 시민사회에서의 의식개혁운동으로 충분히 가능한 것이다.

잘못된 생각(또는 상식)에 의하여 저지르는 어리석은 행위중에는 선행학습도 포함된다. 필자가 앞서 지적했듯이 돈을 처바르면 실력이 향상될 것이라는 믿음에 의해서 사교육열풍이 일어나는 것도 이에 해당한다. 사교육열풍에 관해서는 이미 설명하였으므로 이하에서는 선행학습이 얼마나 잘못된 상식에 의한 어리석은 행위인가에 대해서 이야기 해보기로 한다.

(5) `잘못된 생각에 의해서 저질러지는 어리석은 행위`인 선행학습에 대한 비판

우리 사회에서는 선행학습이 보통의 학부모들이 믿고 있는 것처럼 명문대학 입학에 있어서 필수적이고 매우 좋은 공부방법인 것처럼 당연시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명백히 잘못된 생각이며 전혀 근거가 없다. 선행학습을 시키는 이유는 딱 한가지 인데, 명문대학입학 때문인데, 선생학습은 오히려 역효과를 낼 가능성이 훨씬 더 크다.


대한민국의 교육제도와 교육내용, 진도등의 커리큘럼을 짜서 제도권에서 그대로 시행하는 것에는 많은 교육적, 사회적 고려가 되어 있었다. 자라나는 학생에 있어서 그 나이에 맞는 지식량과 진도를 감안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경험한 바에서 알수 있듯이, 각 학년별로 부과되어있는 지식량은 그 나이의 학생이 감당할 정도의 양을 다소 초과하는 분량으로 이루어져 있다.

물론 학생마다 다르겠지만 극소수의 천재나 수재가 아닌 한, 그 학년에 부과되어 있는 지식량을 충분히 소화하려면 상당한 시간과 노력, 성실한 태도를 요구한다. 그런데 진도에 맞게 설정된 지식량 이상을 짧은 기간내에 먼저 학습시킨다는 것은 해당학생에게 너무나 버거운 짐을 지우는 것이다.


마치 그것은 초원길 10km를 걸어갈래? 아니면 사막길 1km를 걸어갈래? 하고 물었을 때, 이왕 하는 거 짧고 굵게 고생하고 나중에 편하자고 사막 1km를 선택하는 것과 같다. 그런데 문제는 선행학습의 궁극적 목표인 명문대합격은 이를 악물고라도 1km 사막길을 한번 지나갔다고 성취되는 것이 아니다. 초등학교 때 이를 악물고 간신히 사막길을 1km 지나갔다고 해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욕심이 앞서면 생각이 어긋나게 되고 생각이 어긋나면 어리석은 행위를 하게 된다. 옛말에 아무리 급해도 바늘 허리에 실 매서 못 쓴다고 했다. 선행학습은 장기전으로 가면 갈수록 必亡하는 학습방법이다. 마라톤에서 초반부터 빨리 앞서간다고 해서 먼저 결승선에 들어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처음에 좀 천천히 여유있게 하다가 중요한 시기에 스퍼트를 내는 것이 더 효율적이다. 고스톱에서도 첫 끗발이 개 끗발이라는 말이 있다. 선생학습을 많이 시키면 학습에 학을 떼게 되고 일찍 지치고 죽기보다 싫은 공부를 하게 된다. 명문대학입학은 커녕, 그런 목표도 이루지 못하고 액궂은 학생만 잡는 꼴이 된다. 선행학습으로 정신병원을 찾게 될 수도 있다.


'공교육 정상화 촉진·선행교육 규제 특별법`이 제정되기 이전에는 선행학습을 해야 할 이유가 그나마 한 가지는 있었다. 즉, 학교시험에서 선행학습을 해야만 풀 수 있는 문제가 나왔는데, 이 법이 시행되면 그나마 남은 한가지 이유조차 없게 된다. 더군다나 어떤 학생이 학원에 가서 선행학습을 했다하더라도, 本 법안이 시행되면 학교에서의 수업시간에서 지켜지는 진도에 매일 수 밖에 없다. 학원에서 어떻게 가르치든 공교육에서는 정해진 진도에 따라 배우고 시험을 치르니까, 학원 다니는 학생입장에서는 선행학습이 결코 자신에게 유리한 학습방법이 아님을 깨닫게 될 것이다. 선행학습을 충실히 한 학생이라면 그 시간에 딴청을 피우며 시간을 허비하던가 복습하던가 할 것인데, 그렇게 되면 학원에 가서 돈 갖다 바친 것이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결국 그 학생이 학원에 가서 선행학습을 한 것이 의미있으려면 차라리 학교를 중퇴하고 학원 진도에 맞게 공부하는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초등학교 6년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 도합 12년을 학원 선행학습으로 8년으로 단축해서 먼저 배웠다고 입시에서 성공할 가능성은 거의 제로에 가깝다. 그 정도가 될 머리면 차라리 김진태총장의 경우처럼 절에서 공부해도 되는 학생일 것이다.


남들보다 진도를 일찍 나가서 먼저 안 다음에, 그 남는 시간으로 되새김질을 계속하면 명문대입학에 유리하다는 입시전략은 필자가 다니던 시절에도 있었다. 그렇게 했음에도 sky 합격율은 저조했다. 공부는 잔대가리를 부리면 부릴수록 낭패를 보게 되어 있다.


(6) 결론


위에서 살펴본 바대로 본 법안은 잘 된 법안이고 사회에 유익할 것으로 평가된다. 이번에 통과된 법안으로도 규제할 수 없는 개인적 정신적 자유영역은 시민사회의 의식개혁운동으로 충분히 목적달성이 가능하며, 그것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데 있어서 지식인들과 신문방송의 역할이 크다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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