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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4-01-05 21:4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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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예전에 이런 내용의 글을 쓴 적이 있다. 교사들은 어린 학생들에게 ``boys be ambitious``라는 말로 용기를 북돋아주곤 한다. 그 나이에의 학생들은 무한한 잠재력이 있으며 장차 시간이 흘러 어떤 인물로 되어 있을 지 모른다. 교사들이 학급 전체의 학생들에게 그런 희망적이고 낙관적인 격려의 말을 자주 해주는 이유는, 그 반 학생 모두가 다 대단한 인물이 될 거라고 믿어서가 아니다. 교사들은 안다. 이 중 극소수의 학생만이 나중에 커서 이 나라 이 사회의 비중있는 인물로 될 것이라는 것을 말이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평균적인 인물이 되어 있거나, 간혹 몇몇은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는 인물도 나올 거라는 것도 잘 안다.

초등학생들은 입학하면서 선생님으로부터 그런 희망적인 격려를 받게 되고 자신의 낙관적인 미래에 대한 꿈을 품고 성장해 나간다. 그러다가 나이가 먹어가면서 수 많은 경쟁과 시험을 통과하게 되는 데, 그런 과정을 통해 자기 자신에 대하여 객관적인 평가를 할 수 있게 된다.

초등학생에게 꿈을 물어봤을 때 그 학생이 `` 내 꿈은 유엔 사무총장이 되는 거예요``하면 매우 기특해 보일 것이다. 그러면 사람들은 그 학생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훌륭하게 커서 꼭 그리 되거라``하고 격려해줄 것이다. 그런데 고등학생 졸업하고 사회에 나가는 학생이 내신 9등급에 수능 130점 받고 위와 같은 소리를 하면 참 한심하고 철없는 인간으로 보일 것이다. 그러면 사람들은 그 학생을 머리를 쥐어박으며 ``제발 니 주제를 알고 정신 좀 차려라. 니 나이가 몇이냐``하고 질책할 것이다. 나이가 다 차서 사회에 나가는 사람에게 ``boys be ambitious``하는 것처럼 코메디는 없는 것이다.

이처럼 초등학생때에는 꿈이 거창했다가, 나이가 먹어 고등학교 졸업할때쯤이 되면 자신에 대한객관적 평가를 하게되어 현실적이고 실현가능한 정도의 목표를 재설정하게 된다. 평범한 대부분의 학생들은 아마 이런 과정을 겪었을 것이다. 어릴 시절의 꿈이 육군 장군이었는데 , 고등학교 졸업할 때쯤이 되어서는 꿈이 9급공무원이 되는 경우 말이다. 그런데 그것에 관한 개인적 소회를 들어보면 쓸쓸하고 안타까운 기분이 들 것이다. 어릴 적 꿈은 크고 대단했는 데, 막상 커서 지금의 자신의 지금 사는 모습은 그것과 비교해서 많이 형편없기 때문이다. 그러함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낙담함이 없이 그럭저럭 적응하면서 사는 이유는 나이를 먹어감과 동시에 정서적인 힘도 커졌기 때문이다. 즉, 어릴 적 자기자신에게 건 기대와 달리 평범한 사람이 되었을 지라도 그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정서적인 힘 말이다.

이것이 그 개인에게는 안타깝고 충족되지 못한 포부에 대한 아쉬움이 남는 일이겠지만, 사회의 입장에서는 그런 일은 너무나 당연하고 타당한 일이다. 사회가 각각의 개인에게 주는 몫인, 선망하는 지위나 고액연봉의 직장은 적은 반면 평범한 직장은 많기 때문이다. 따라서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누구나 자신이 설정한 꿈이나 직장에 도전할 기회를 갖고 그것을 위한 노력을 해보다가 결국 되지 않으면 , 자신의 객관적 평가에 의해 현실에 맞게 자신의 목표를 재설정하는 것이다. 대한민국 5000만명은 이런 과정을 겪으면서, 사회의 구성원으로 각자 자신의 직분에 맞는 역할을 하며 살게 된다

대우가 좋고 월급이 많은 대기업이나 전문직 기타 선망하는 職으로 갈 수 있는 일자리의 수는 적음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서로 그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칼부림이 일어나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들은 사회적으로 확립된 게임의 규칙에 의하여 경쟁을 하게 되고 만약 자신이 그 합격점에 들지 못하면 그 결과에 대하여 승복하고 겸허히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개인적 관점에서 볼때 경쟁결과에 대하여 승복하는 이유이다.

그런데 사회적 관점에서 볼때 경쟁결과에 대하여 승복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경쟁은 앞서 기술한 바대로 전체 사회구성원들의 인적자원을 공정하고 합리적인 방법으로 적재적소에 배치하게 된다. 물론 극히 예외의 경우도 있겠지만 큰 틀에서 봤을때 그러하다. 경쟁제도는 어느 개인이 자기 맘에 들지 않는 사회적 지위나 직업을 갖게 되더라도 타인들간의 투쟁이 일어나지 않고 평화를 유지할 수 있도록 기능하게 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경쟁제도는 그것을 통해 나온 결과로 인해 사회 구성원 전체에 해당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한 것 이상의 것을 보상받을 수 있도록 해주는 기능도 한다.

그런데 세상은 수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고, 별의 별 종류의 인간들이 다 산다. 인구의 85%는 위와 같기 때문에 이 사회가 합리적이고 평화적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런데 인구의 15% 정도는 그것에 역행하며 산다. 즉, 그들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한심하고 철이 없는 인간이거나 , 욕심이 많은 반면 능력이 한참 모자라는 인간들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들의 특징은 공정하게 치러진 경쟁결과에 대하여 승복하지 않는 성향을 갖고 있다. 따라서 온갖 이유와 핑계를 다 대면서 궤변과 불평불만을 늘어놓는다.

인구의 15%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이렇게 말한다. `` 경쟁은 악이다``라고. ``무한 경쟁이 어떻고 저떻고 떠드는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그들 중 대부분은 경쟁제도가 문제가 아니라 경쟁제도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구조적 문제임에도 그것과 혼동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또한 그들은 참 희한한 주장도 많이 하는 데, 경쟁에서 탁월한 실력을 보이는 사람들을 적대시하면서 그들은 타인을 짓밟고 올라가려는 惡漢들이라고 비난한다. 이런 15%에 해당하는 좌파성향의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이라고 불평불만을 터뜨린다.

`뛰어난 인재를 귀하게 여기는 풍조`와 `뛰어난 인재들을 적대시하는 풍조`가 우리 사회에는 공존한다. 前者는 박정희대통령의 인재관이고, 後者는 김대중대통령의 인재관이다. 박정희대통령은 인재를 후원하면서 국가적 차원에서 키웠야 한다는 철학을 가진 사람이었고, 김대중대통령은 잘난 놈들은 지가 알아서 크는 것이지 남이 키워줄 필요가 없다는 철학을 가진 사람이었다. `경쟁제도를 좋게 보는 관점`과 `경쟁제도를 악으로 보는 관점`에 따라 인재관이 이렇게 크게 달라지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던지는 질문 하나.

`탁월한 인재가 대한민국에 많이 나타나는 것이 평범한 실력을 가진 사람들의 입장에서 좋은 일인가` 하는 물음을 던져 보자.

여기에서 한 가지 유의할 게 있다. 탁월한 인재가 많이 나타난다고 해봐야 현실적으로 5천만명 중에서 수 백만명이 되는 게 아니고 대략 10000여명 정도일 것이다.

수십년간 떠들어온 좌파들의 주장들을 종합하면 이러하다. ``탁월한 인재들로 인해 수많은 평범한 실력을 가진 사람들이 경쟁에서 낙오하게 된다. 따라서 그들은 평범한 사람들의 敵이고, 평범한 사람들을 짓밟고 자기들만 좀 더 비싼 인간으로 되려하는 나쁜 인간일 뿐이다. 그런 그들을 우리가 도와주거나 존경해줘야 할 이유가 전혀 없다``고 말한다.

일단 탁월한 인재라는 의미부터 알아보자. 탁월한 인재라는 것은 `그 개인이 품고 있는 자족적 목표를 성취할 만큼 재주가 뛰어난 사람`이 아니다. 그런 인재들은 그냥 똑똑한 인재일 뿐이다. 탁월한 인재란 그 이상을 뛰어넘는 `그 개인이 품고 있는 자족적 목표뿐만 아니라 그 이상의 능력과 인품을 갖고 있어서 공동체적 목표까지를 성취할 만큼 재주가 뛰어난 사람`을 말한다.

공부를 잘해서 서울의대를 나와 의사가 된 사람이 있다 치자. 그가 사교육을 받고 뼈를 깍는 노력을 해서 그렇게 된 사람이라고 하자. 그 사람은 그냥 그 자신이 품고 있던 자족적 목표를 성취한 사람일 뿐이다. 대부분의 부모들은 이런 사람들을 선호한다. 그런 사람을 선호하는 것이 나쁜 것도 아니다. 그 차원에서 머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 이상의 것을 추구하는 사람도 있다. 후자가 바로 탁월한 인재이다.

자신의 재주와 에너지가 보통의 사람들보다 훨씬 많으면 , 보통 자신의 눈높이를 자족적 목표에만 맞추지 않는다. 그 이상의 것을 추구하는 것이 탁월한 인재들의 목표이다. 중고등학교 교과서을 달달 외워서 의사되고 , 그렇게 해서 돈 많이 버는 사람이 되는 것이 前者라면, 인류사에 길이 남을 발견이나 이론을 짜내는 사람은 後者이다. 서울대 의대를 나와서 개인병원하면서 돈 잘 버는 사람과 아인시타인類의 인간과는 다른 것이다. 자기 자신을 어떻게 파악하고 있는가에 따라 인생의 갈리게 된다. 아인시타인이 서울의대 의사보다 돈을 더 적게 버는 것도 아닐 것이다. 자족적 목표외에 인류공동체적인 목표까지를 추구하는 인재가 탁월한 인재인 것이다.

에디슨, 뉴튼, 아인시타인, 레오나르도 다빈치, 모짜르트, 존스튜어트 밀,루소, 아리스토텔레스, 세익스피어등등 탁월한 인재들은 자기들이 세상에 내놓은 생산물과 세상으로부터 받은 보상을 비교해 봤을 때 엄청 손해본 사람들이다. 100원짜리를 공헌하고 10원 받아간 사람들이다. 에디슨이 백열전구를 만들어서 돈을 엄청 벌었다고 하나, 그가 인류에 준 가치보다는 턱없이 부족하다.

거창하게 인류공동체까지 가지 않더라도, 국가공동체까지만 생각해보기로 하자. 박정희 대통령은 훌륭한 인재를 많이 키우고 적재적소에 등용하였다. 조국 근대화 과정에서 경제를 일으키고 군사력, 국가위상을 키우기 위하여 수많은 탁월한 인재들이 피땀어린 노력과 애정을 쏟았다. 그 당시의 뛰어난 인재들은 자기 자신의 자족적인 목표에만 머물지 않았다. 조국을 위해 자신의 재능을 쓰겠다는 자족적 목표이상의 것을 추구했던 것이다.

백번 양보해서 좌파들이 떠들어대는 것처럼 탁월한 인재들이 서울대가고 미국 유학가서 과학과 기술을 배우는 과정에서 평범한 재주를 가진 인재들을 낙오시키고 짓밟고 올라갔다고 치자. 소수만이 서울대가고 미국유학가서 과학과 기술배워 올 것이라면, 경쟁을 통해 탁월한 인재가 그 길을 가는 것이 맞다. 경쟁에서 뒤처진 둔재들이 탁월한 인재 대신 서울대가고 미국 유학가서 과학 기술을 배우러 갔다고 하자. 그러면 둔재들은 공부 하느라 얼마나 고통스럽겠으며, 안 좋은 머리로 고통스럽게 배워 온 그런 지식이 뭔 가치가 있어서 국가공동체 발전에 도움이 되겠는가. 똑똑한 머리로 배워 온 지식이 쓸모있는 것이지, 둔한 머리로 배워 온 지식이 뭐가 쓸모 있느냐 이 말이다.

그 탁월한 인재들이 지금의 대한민국을 일구어냈다. 지금 우리나라 국민 대부분이 비만을 걱정하면서 다이어트 열풍에 휩싸인 것도 그 사람들 덕택이다. 아프리카나 북한 동남아는 못 먹어서 죽어나가는 판국인데, 우리나라는 맛좋은 것을 너무 잘 먹어서 탈인 나라가 되었다. 도서관에 가보면 취업준비를 하는 백수들이 많은 데, 그들조차도 소형이겠지만 다 자가용 타고 다닌다. 그리고 과거 농업국가였던 대한민국에서 부자라고 해봐야 논밭 일구어서 벼 몇섬했느냐가 고작이었다. 그런 후진국가를 발전시켜 지금과 같이 수 많은 고임금의 일자리가 있게 한 것도 모두 그들의 功인 것이다.

또한 나라가 잘 살게 되어서 지금 우리사회에서 `공짜로 복지를 좀 더 많이 줘야 되느냐 마느냐` 하는 복에 겨운 이야기가 나오는 것도 다 그들 덕택이다. 군사력이 세계 10위 안에 들어서 강대국과 전쟁이 나도 일방적으로 얻어맞고 끝나지 않을 정도가 된 것도 그들 역시 그들 덕택이다. 탁월한 인재가 많이 나타나서 국가가 잘되면 그에 속한 평범한 인재들도 그 복을 같이 누리는 것이다. 그런 차이가 생기기 때문에 아프리카에서 거지로 사는 것과 대한민국에서 거지로 사는 것에는 차이가 있다. 아프리카 거지는 그냥 굶어죽는 것 밖에는 없지만, 대한민국 거지는 국가가 챙겨줄 수 있다.

좌파들이 참 단순무식한 게 세상을 넓고 크게 보지 못하고 , 단지 그들이 자기보다 더 성공했다는 이유만으로 시기심으로 탁월한 인재를 어떡하든 헐뜯을 생각을 하니 참으로 통탄할 일이다. 그들이 시기하는 것처럼, 국가를 일으키고 사회에 공헌한 탁월한 인재들이 평범한 인재들보다 돈을 더 많이 벌었을 것이다. 그러나 엄밀히 따지고 보면 탁월한 인재들이 번 돈은 100원의 가치를 내놓고 10원 받아 간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 사람들을 기억해주고 고마워하는 것이 뭐가 나쁘다고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이라고 불평을 해대는 지 도무지 이해가 안 간다. 최초로 이론을 짜낸 아인시타인이나 최초로 백열전구를 만든 에디슨을 기억해주고,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 공헌한 사람들을 기억해주는 건 세계 어느나라나 다 똑같다. 그게 뭐가 배 아프다고 더럽다느니 하느냐 이 말이다. 경쟁제도가 갖는 사회적 기능이 이러하다.

필자는 앞에 이런 내용을 적었다. 초등학생때에는 포부가 컸다가 고등학교 졸업할때쯤되면 자신의 주제파악을 객관적으로 하는 눈이 생김으로써 현실에 맞게 자기 길을 찾아간다고 말이다. 살면서 경쟁을 겪어보면 자신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가를 가늠해볼 수 있게 된다. 그래서 그렇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15%는 고등학교 졸업할때쯤에 되서도 자기 주제파악을 잘 못한다. 그런 사람들은 자기 능력에 비해 과분한 사회적 보상을 받고 싶어한다.

그들은 대기업이나 좋은 직장은 이미 다 찼는데 거기 아니면 안 가겠다고 버틴다. 경쟁의 결과를 인정하지 못하겠다고 버티면 사회도 역시 버틴다. 그런 類의 사람들이 더 높은 대우를 해달라고 요구하면 , 사회는 그렇게는 못해주겠다고 버틴다. 적당히 눈높이를 조정하지 않으니 그냥 백수로 산다. 물론 사회구조가 문제가 없다고는 말할 수 없다. 사회도 문제점을 고쳐야 하겠지만, 자기 주제를 모르고 높고 대우 좋은 곳만 고집하는 일부 청년실업자도 문제인 것이다.

어제 기사에서 대기업 생산직이라면 취업할 의향이 있다는 설문조사가 나온 것을 보니 의식이 많이 개선된 것 같다. 물론 그 이하는 거들떠보지 않겠다는 뜻도 포함되어 있으므로 아직 문제이긴 하다. 필자는 청년실업해결을 위해 이 지점에 포인트를 맞추어서 정책을 구상해 놓았다. 과연 성공할 지 모르겠지만, 필자의 머리속에 있는 정책만 먹히면 청년실업 문제는 게임 끝이다.

이제부터는 실력도 안되면서 자기 주제 파악을 못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어제 스포츠신문 기사에 이런 것이 났다. 이종격투기 선수인 서두원은 최근 로드FC와 함께 학교폭력 방지와 관련된 활동도 활발히 펼치고 있다고 한다. 그는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 “나보다 강한 사람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순간 자신이 가진 힘이나 오만함을 버리게 된다. 그래서 격투기를 연마하고 경기를 해보면 그런 것을 깨닫을 계기를 얻을 수 있다. 따라서 격투기가 학교폭력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 확신한다.`` 고 했다.

격투기 뿐만 아니라 모든 종류의 경쟁에는 위와 같은 순기능이 있다. 경쟁제도하에서는 자기보다 더 뛰어난 실력을 가진 사람을 반드시 만나보게 된다. 자기보다 더 실력이 뛰어난 사람들과 겨루고 경쟁하다보면 깨닫는 것이 있다. 세상에는 나보다 더 뛰어난 사람이 많다는 것. 그래서 겸손과 자기성찰을 해볼 수 있는 계기를 얻는다.

경쟁이 없는 사회에서는 그런 계기가 없다. 그리고 경쟁에서도 자기보다 더 뛰어난 사람과 겨루어 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기가 대단한 사람이라고 믿는 바보들도 우리 사회에는 상당히 많다. 그들은 상대방이 자신보다 더 뛰어나다는 사실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은 정정당당한 경쟁에서 졌음에도 온갖 자기합리화로 일관한다. 시기심이 많고 경쟁에서 지는 것은 자기가 짓밟히는 것이라고 여기는 경쟁관을 가진 사람들이 그러하다.

대체로 철없는 나이에서는 앞서말한 바대로 포부가 크다. 자신에 대하여 큰 기대와 과장된 자신감을 갖고 있다. 그래서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는 말이 나온 것이다. 그런데 초등학생이나 중학생때에는 그런 정신상태가 긍정적이다. 그것은 자기 성장에 있어서 매우 유리하게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주눅 든 자기평가`보다 다소 과장된 자기평가`가 실력향상에 유리하고 삶에 긍정적으로 작용한다.

얼마 전에 뉴스를 보니 이런 내용이 나왔다. 요즘 초등학생중의 일부는 일찍 현실을 깨달아서 `장차 뭐가 되고 싶으냐`는 질문에 대하여, 현실적이고 낮은 포부의 꿈으로 대답한다고 한다. 초등학생이면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를 정도로 자기 자신에 대한 평가를 할때 분에 넘치는 자신감과 낙관이 보여야 하는 데, 전혀 그렇지 못하다는 뜻이다.

주위사람들이 자신에게 해주는 ``boys be ambitious``가 허풍이라는 것을 어린 나이에 일찍 간파했다는 뜻이다. 그런 어린 초등학생들은 커 나갈 수 있는 가능성에 자기 스스로 `난 이것밖에 안돼`하며 미리 선을 그어놓은 것이다. 고등학교, 대학을 졸업하면서 사회에 나가면서 깨닫아야 할 것을 너무 이른 나이에 깨달은 것이다.

甲이라는 초등학생이 100이라는 포부와 낙관을 가지고 시작하면, 70정도까지 이를 수 있다. 그런데 처음부터 70이라는 포부와 낙관을 가지고 시작하면 70을 이르지 못한다. 이것은 인류의 경험칙에서 나온 것이다. 그래서 교사나 어른들은 어린 나이의 학생에게 꿈을 크게 갖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반대로 대학졸업하는 사람이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는 마인드를 갖고 있다`면 그 역시 문제이다.

대기업이나 좋은 직장은 받아줄 수 없는 데, 끝까지 그런 직장만 고집하게 되니까 말이다. 경쟁제도는 한 개인으로 하여금 `과장된 자기평가에서 출발하여 객관적인 자기평가를 하는 마인드`로 형성시켜 준다. 그런 마인드가 형성되도록 돕는 경쟁제도는 개인적인 측면에서나 사회적인 측면에서 매우 중요하다.

보통 사람들이 태권도를 배우고 검은 띠를 따면 자신감이 넘치게 된다. 기고만장하게 되고 누구와 싸워도 다 이길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특히 평소에 실력에 대하여 칭찬을 좀 받아봤거나 겨루기를 해서 여러 번 이겨 본 사람이라면 그런 과장된 자신감이 많아진다. 그 때 될때 좀 건방진 태도가 많아진다. 그때에는 누군가가 겸손하라고 충고하거나 무도인의 예법을 가르쳐도 귀에 안 들어온다. 그럴 때 가장 좋은 방법이 시합를 붙여주는 것이다.

자기보다 실력이 뛰어난 사람과 겨루어서 실컷 얻어맞고 큰 大자로 뻗어보면, 그 다음부터는 누가 말 안해도 겸손하고 경우가 바른 사람으로 다시 태어난다. 인성교육에 있어서 경쟁제도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다. 이종격투기 서두원선수가 한 말이 바로 이런 뜻이다. 어느 분야에서 탁월한 정도에 이른 사람은 그런 계기를 만나봤기 때문에 인격수양이 잘된 사람이 많다.

이처럼 경쟁을 경험하다보면 뭔가 중요한 것들을 깨달을 수 있는 계기를 많이 만날 수 있다. 어느 분야에서든 실력이 뛰어나다는 것은 자신과 타인을 비교해서 자신의 결점을 고치고 타인의 장점을 본받아서 그리 된 경우가 대부분이다. 대체로 실력이 뛰어난 사람들이 실력이 별 볼일 없는 사람보다 생각하는 바가 깊고, 경우에 밝다

태어날 때부터 부자인 재벌 2세나 빼어난 외모 덕택에 성공한 사람들은 자신의 노력과는 무관하게 성공한 케이스므로 그런 계기가 없다. 그런 부류의 사람들은 그 외의 계기로 인하여 특별히 인격을 수양하여야 그리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렇듯 세상에 공짜란 없다.

임진왜란때 이순신과 원균이 있었다. 그 둘은 사이가 좋지 못하였는 데, 서로에게 적대적이었다. 이를 두고 어떤 좌파학자는 두 사람 다 나쁘다고 말한다. 또 다른 좌파학자는 원균을 옹호하면서 이순신에게 잘못이 있다고 말한다.

이순신과 원균은 함께 전투를 하고 장계를 공동명의로 올리기로 한다. 그런데 이순신이 독단적으로 장계를 작성하여 올리는 바람에 둘 사이에 금이 갔다는 주장이 좌파성향의 학자에 의해 제기 된 적이 있다. 즉, 그 학자는 둘 사이의 갈등의 책임은 전적으로 이순신에게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난중일기에는 이순신이 원균을 비난하는 내용이 많이 발견된다.

필자는 좌파일각에서 제기하는 것처럼 두 사람 모두에게 잘못이 있다거나, 이순신에게만 책임이 있다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물론 위의 사실들은 원균이 이순신을 미워하게 된 정당한 원인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본질적인 것이 아니다.

이순신의 인물됨은 자기 자신보다는 나라를 먼저 생각하고, 자신에 대한 올바른 성찰을 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반면, 원균은 大義보다는 공명심과 라이벌인 이순신과의 관계에 집착하고, 자신에 대한 올바른 성찰에는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다. `임진왜란에 처한 현실에서 과연 자신이 수군 총사령관이 되는 것이 합당한가`에 대한 물음에 이순신은 고민해 보았지만, 원균은 그렇지 않았다.

감투는 자기 능력보다 조금 낮은 것을 맡는 것이 좋다는 옛말이 있다.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직책보다 약간 낮은 직책을 맡는 것이 좋다는 뜻이다. 이순신은 왜적을 상대로 어떻게 전투를 수행하고,자신이 과연 그 전투를 승리로 이끌 수 있는 지에 대하여 고민해보고 자신이 수군 총사령관을 맡아야 함을 확신하게 된다. 반면 원균은 자신이 그런 중책을 담당할 만한 인물이 되는 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없이 수군 총사령관의 자리를 탐하였다.

이순신類의 사람들은 자신이 그 자리를 감당할 능력이 되지 않으면, 스스로 그 자리를 사양하거나 평소에 보아 둔 적임자에게 그 자리를 떠넘기고 자신은 뒤로 빠진다. 관포지교의 포숙아도 그런 인물이었다. 반면 원균類의 사람들은 자신이 그 자리를 감당할 수 있는 지에 대해선 생각지도 않고 오직 자신의 영광만을 위하여 진짜 적임자의 자질이 있는 사람을 모함하여 끌어내리면서까지 해서 자신이 그 자리를 차지하려고 한다.

`누가 그 자리의 적임자인가`에 대한 질문에 대해서 재주가 있고 인품이 훌륭한 사람들은 그에 관한 올바른 판단을 할줄 안다. 반면 재주가 없고 인품이 덜 된 사람들은 자아 성찰없이 자기가 적임자라는 환상과 착각속에 빠져 있다. 이순신은 깊은 고민의 결과로 자신이 그런 중대한 자리를 감당해 낼 수 있는 재목이 된다는 올바른 판단을 내렸다. 그리하여 자신이 수군 총사령관의 직책을 수행하려고 했다. 자신이 적임자임을 안 것이다. 반면 원균은 그런 중대한 자리를 감당해 낼 재주가 되지 못함에도 근거없이 과신하여 자신이 그 직책의 적임자라고 그릇된 판단을 내렸다. 결국 수군 총사령관 자리는 하나인 데, 둘이 그 자리를 원하니 자연히 둘 사이에는 경쟁이 붙게 된 것이다.

이 사례를 통해 개인들의 경쟁이 사회적으로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지에 대해 알 수 있다. 불행하게도 그 당시 조선은 누가 수군 총사령관의 적임자이냐의 질문에 대하여 원균의 팔을 들어주게 되었고 그 결과로 엄청난 비극을 맞게 된다. 그 많던 병력은 거의 전멸하다시피 하였고, 모든 군함은 다 파괴되었다. 전략요충지를 빼앗기고, 자기가 그 중책의 적임자라고 착각했던 원균 자신도 도망가다가 결국 목숨을 잃게 된 것이다.

`이순신과 원균 중에 누가 수군 총사령관직을 맡아야 하는가`에 대한 물음에 대하여 , 자격미달의 원균이 선발됨으로써 결국 조선은 비극적 결과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이순신은 원균이 수군 총사령관의 자질로는 턱없이 부족하고, 재주 없이 설쳐대는 인물임을 정확히 꿰뚫어 보았다. 인품도 저열하여 이순신 자신을 시기하고 모함하며, 성급하고 생각이 없이 전투하는 인물임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가 하는 행동이 사사건건 맘에 들지 않았고, 장차 이 나라의 큰 화근이 될 것임을 예지하고 있었다. 이순신이 원균을 미워함은 다 합당한 까닭이 있었던 것이다.

원균을 미워한 것은 비단 이순신 뿐만이 아니었다. 육군 총사령관 격인 권율도 그의 재주과 인품이 수준 미달임에도 자신의 재주를 과대평가하고 장차 화근거리가 될 원균을 몹시 미워하였다. 원균의 행태가 맘에 안 들자, 권율은 그가 장군의 신분임에도 부하들 앞에서 그의 곤장을 쳤다.

권율과 이순신은 자기 자신에 대하여 잘 알고 있었고, 자신들과 비교하여 원균이 얼마나 수준이하인지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순신과 원균은 서로를 미워한 것이고, 권율과 원균역시 그러했던 것이다. 좌파학자들은 그런 본질적인 면에 대한 고려없이 단순히 이순신이 원균과 공동 장계를 올리기로 한 약속을 파기한 사실이 있었다는 점과 원균에 대한 비난이 적혀있는 난중일기를 근거로 이순신을 형편없는 인간으로 규정하고 이순신으로부터 미움을 받은 원균에 대한 우호적인 평가는 결코 옳지 않다고 본다. 어떤 경쟁은 그것이 가지는 의미가 매우 중대하기 때문에 국가차원에서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 있다. 이순신과 원균중에 누구에게 수군 총사령관직을 맡기느냐의 문제가 그에 해당한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해로부터 500여년이 지난 지금에 우리는 `이순신과 원균 중에 누가 수군 총사령관직을 맡아야 하는가`는 물음에 대한 정확한 답을 알고 있다. 정답은 `임진왜란이라는 전쟁을 수행하기위해 이순신이 수군 총사령관을 맡았어야 했다` 이다.

500여년이 지난 지금의 우리는 위의 물음에 대하여 어떻게 확실한 정답을 알게 되었는가? 라는 질문에 대하여 이렇게 대답할 수 있다. `이순신과 원균의 경쟁의 결과를 보고 정답을 확실히 알게 되었다`고 말이다. 원균을 총사령관으로 하여 수군 1만명과 군함 150척으로 왜적과 맞서게 되었는 데, 그 결과로 참패하여 수군 1만명중에서 살아남은 병사 수는 500여명 밖에는 안 되었고, 군함은 몇 척을 제외하고 모조리 불탔으며, 원균 자신도 도망치다가 결국 왜적의 칼에 죽었다.

그 이후로 이순신이 복귀하였다.조선의 수군은 이순신을 총사령관으로 하고 병사 5천명과 12척의 군함을 가지고 왜적과 싸웠는데, 그 결과 왜적의 군함은 모조리 불태우고 왜군 병사도 전멸시키다시피 했다. `원균을 총사령관으로 한 전투`와 `이순신을 총사령관으로 한 전투를` 비교해보니, 둘의 경쟁결과를 확인함으로써 우리는 누가 적임자였는 지를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경쟁제도가 갖고 있는 사회적 순기능이다.

당시 조선사회가 이순신의 능력과 원균에 대한 능력에 대한 정확한 자료가 있었더라면, 수군 총사령관 임명에 있어서 그런 잘못된 선택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정확한 자료를 얻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국가차원에서 경쟁시스템을 확립하여 평소에도 수시로 경쟁시키고 그것을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것을 제도화하는 것이다.

k- 리그를 만들어 평소에 각각의 선수들을 경쟁시키면, 그 중에서 뛰어난 실력을 갖춘 선수가 누군지 알 수 있게 된다. 그렇게해서 찾아낸 뛰어난 선수를 월드컵대회라는 중요한 시합에 내보내는 것이다. 평소에 수시로 k-리그를 치루고 그것을 통해 자신의 실력을 인정받게 되어 월드컵대회에 출전할 자격을 얻고, 만약 자신의 실력이 그에 못 미친다면 자기보다 더 뛰어난 동료선수가 대표선수로 선발되어 나가는 경쟁시스템에 대하여 불만을 표시하는 선수는 거의 없다. 설령 자신이 국가대표선수로 선발되지 않더라도 말이다. 그런 경쟁시스템은 모든 선수에게 공정하고 합리적이고 우리 사회에 좋은 기능으로 작용한다.

이순신과 원균이 평소에 k-리그와 같은 경쟁시스템에서 수시로 평가받았다면, 임진왜란이라는 유사시상황에서 누가 과연 적임자인가 하는 판단에서 조선은 잘못된 선택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경쟁시스템을 제도화하는 것도 중요할 뿐만 아니라, 경쟁시스템을 통해 과연 누가 더 실력이 나은가에 대한 국가적 차원의 관심 또한 매우 중요한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우리 사회에서 정치언론분야에서 k-리그와 같은 경쟁시스템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중에 하나가 tv토론 프로그램이다. 거기에는 정치인, 언론인, 교수, 각 분야의 지식인들이 나온다. 그들이 tv에 나와서 식견을 겨루는 것에 대하여 국민적 관심을 가지는 것은 중요한 사회적 의미를 갖고 있다. 거기에 나오는 인물들은 어느 정도 검증된 사람들이 많은 데, 나중에 대한민국의 중요한 직책을 담당하게 될 가능성이 많다. 즉, 수군 총사령관과 같은 국가적으로 중요한 직책을 담당할 만한 사람을 선택해야 할 필요가 생겼을 때, 평소에 k-리그와 같은 경쟁시스템을 갖고 있는 사회는 오판하지 않고 좋은 인재를 선택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진다.

전통적으로 정치언론분야에서 k-리그와 같은 경쟁시스템의 역할을 담당해왔던 것은 사설,칼럼,시론등의 신문지면이었다. 그러다가 십 수년전부터 새롭게 부상한 것이 바로 tv토론 프로그램이다. 신문지면과 tv토론프로그램은 대표적인 정치언론분야에서의 k-리그라고 볼 수 있다. 요즘은 거기에 더하여 인터넷도 한 축을 담당하게 되었다.

이런 경쟁시스템이 사회에 기여하는 순기능은 이처럼 누가 이순신이고 누가 원균인지를 가려낼 수 있는 기회를 준다는 점이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시대를 달리하며 이순신과 같은 사람은 태어났고 원균과 같은 사람도 또한 태어났다. 역사는 반복되므로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현재에 와서 원균과 같은 인물을 꼽으라면 손석춘 前한겨레신문 논설위원을 들 수 있겠다. 그는 운동권 출신인데, 운동권에서도 NL계열로 알려져 있다. PD계열은 진보신당派이고, 계열은 지금의 통진당으로 알려져 있다.

손석춘은 자기 스스로를 (생활의) 지혜가 있는 사람이라고 소개하면서, 자신의 지혜로 대한민국의 국가적 난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을 하였다. 필자는 그때 그가 바로 `이 시대의 원균`이라는 것은 알아챘다. 실력도 없으면서 자기가 대단한 인물인 양 착각하면서 나대는 모습에서 600여년 전의 원균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가 여태까지 정치,언론분야의 K-리그라고 할 수 있는 공론장에서 한 활동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1) 사유재산제의 비중을 대폭 축소하고 그대신 국유화를 극대화하고 사회주의국가의 이상 실현을 위하여 정부 통제하에 경제를 운영하자는 차베스주의운동 (2) 골고루 가난한 사회를 만들자는 구호와 함께 사회주의국가 또는 공산주의 국가로의 추구 (3)광우병 촛불시위주도 (4)홍경래의 난, 동학혁명의 난, 5.18민주화운동, 여순반란사건등을 청소년들에게 학습시켜 사회주의국가를 실현을 위한 데모형 인간 양성하기 (5)2009년 미국발 금융위기시에 한국경제가 비극으로 치닫게 된다는 비관적 예언과 그 원인인 신자유주의에 대한 배격운동 (6)한미FTA로 인한 한국경제 멸망론 (7) 학생인권조례추진을 통한 가해학생의 인권을 위한 학생인권옹호관제도 도입 (8) 학생인권조례 추진하여 중고생들에게 데모할 권리와 정치적 결사를 조직할 권리 부여 (8)국가보안법 철폐운동 (9) 햇볕정책지지 및 反햇볕정책노선을 취하는 언론사에 대한 비판 (10)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 타파 (11)주한미국 철수 및 한미 군사동맹 파기 (12) 추첨제 민주주의제도 실험 (13)대학평준화운동 (14)매판자본론 및 미국식민지화 극복 등이었다.

그가 일생을 다 몸바쳐 설파해왔던 식견과 활동들은 시간이 흘러 오늘에 와서는 모두 다 오답으로 밝혀졌다. 즉, 그가 편 식견 중에서 어느 하나도 대한민국 사회에서 인정받은 것이 없다. 그가 하는 짓이 한결같이 대한민국에 해악만 끼치는 것들이라서, 필자가 나서서 그의 주장들을 모조리 다 논리적으로 격파하고 그가 추구하는 목적들을 완전히 좌절시켰다.

그는 필자와의 사상과 식견의 경쟁에서 완전히 패하였고, 지금 그는 공론장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구마적이 김두한과 한판 붙고 지자 창피해서 만주로 떠났듯이, 손석춘도 면목이 없는 지 어느 시기에 되니까 보이지 않게 되었다.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토론에서 졌다고 해서 굳이 떠날 필요까지는 없으므로, 그가 공론장으로 돌아와 활동을 재개해주길 기대해 본다.

이와같이 경쟁시스템은 유익한 사회적 기능을 담고 있다. 즉, 손석춘이라는 한 개인에게는 `그 자신보다 훨씬 더 똑똑한 사람이 이 세상에는 아주 많다는 것을 알게 함으로써 자아성찰의 계기`를 얻을 수 있고, 사회적으로는 `정정당당한 토론을 통해 무엇이 정답인가에 대한 생산적인 知的 결과물`을 얻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언론정치분야에서 손석춘 前논설위원은 식견을 겨루어서 필자에게 패했다. 또한 한겨레,경향,오마이의 좌파언론은 식견을 겨루어 조선,중앙,동아의 우파언론과 경쟁하여 패했다. 이것은 이순신과 원균은 경쟁을 통해 `과연 누가 조선의 수군 총사령관으로서 적임자인가`하는 질문에 대해서 정답을 알수 있게 된 것과 같다.

위와같은 경쟁의 결과로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을 수 있었다. 즉, `임진왜란 당시 수군총사령관이라는 중책을 이순신이 맡는 게 옳았다` 그리고 `지금 대한민국의 여론형성과 시대정신을 이끌고가는 중책은 필자와 조중동 우파언론이 맡는 것이 옳다`는 것이 증명된 셈이다.

경쟁시스템을 惡으로 보고 반대해 온 좌파들은 한때 이런 일을 추진한 적이 있다. 가요순위차트를 매기는 것을 폐지한 적이 있는 데, 지금에 와서는 원래대로 복구되었다. 또한 시험없이 누구나 대학갈 수 있도록 하고 대학평준화를 만들려고 했다. 이 역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경쟁시스템은 이미 우리가 사는 생활 그 자체이다. ``우리 중간고사 끝나면 잠실경기장에 가서 LG와 삼성 야구 경기 보러갈래?`` ``요즘 뜨고 있는 곡이 뭐지?`` ``김연아가 아사다 마오를 물리치고 프랑프리 우승할까? `` ``북한이 50년대에는 남한보다 더 잘살았는데 지금은 완전히 역전되어 수십 배 차이가 난다더라`` 등등. 이런 행위 안에는 모두 경쟁시스템을 수용하고 그것을 즐기거나 참여하는 인간의 모습이 녹아 있는 것이다. 좌파들 주장하는 것처럼 경쟁이 악이고 철폐해야 할 시스템이라면, 스포츠 경기, 예술활동, 학문활동등은 설 땅이 없게 된다.

2010년 쯤엔가 이런 일이 있었다. 그것은 고려대 학생 김예슬씨가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 둔다. 아니 거부한다``라는 대자보를 붙이고 자퇴를 한 사건이었다. 그가 쓴 대자보 내용의 요지는 이러했다. `경쟁은 악이고 거기에서 남보다 더 잘할려고 하는 것은 남을 짓밟는 행위이다. 그런 행위를 강요하는 경쟁시스템에 반대한다. 또한 나 자신은 그런 경쟁시스템 안에 속해있지 않기 위해 학교를 자퇴한다`는 내용이었다.

義憤에 찬 대자보를 붙인 한예슬 학생은 대학본부에 자퇴원서를 내고 책가방을 싸서 교문을 나섰다. 그는 그 이후로집으로 가서 뒹굴뒹굴하였다. 그런 惡의 경쟁대열에서 벗어난 자신이 대견스럽게 느껴졌다. 집에 있다보니 심심해서 TV를 켰는 데, `자신의 대자보사건`을 다루는 MBC 백분토론이 열리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그것을 열심히 시청하였다. 양측 패널들의 주장과 논거를 시청하면서 비교하고 어느 쪽이 더 맞는 소리를 하는 지 모니터링하였다.

필자가 앞서 설명했듯이 MBC 백분토론 프로그램도 역시 마찬가지로 경쟁시스템이다. 그것을 주의깊게 시청하는 방청객과 시청자들 또한 그 경쟁활동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웃기게도 김예슬학생은 경쟁시스템이 惡이라서 거부한다고 자퇴서 제출해 놓고, 불과 일 주일도 안되어서 자신이 그토록 싫어하는 경쟁시스템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경쟁시스템에 참여한다는 것은 본인이 패널로 참석해서 직접 토론하는 사람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MBC 백분토론을 보면서 누구 말이 더 타당한 것인 지 주의깊게 시청한다는 행위 자체가 경쟁시스템에 참여하는 활동`이라는 사실을 김예슬 학생은 알까? 이렇게 김예슬 학생의 의분에 찬 대자보 사건은 일주일도 안되어서 에러가 난 것이다.

사실 이런 촌극은 좌파진영에서는 흔한 광경이다. 경쟁에서 이기는 것은 남을 짓밟는 나쁜 행위다라고 주장하던 민노당 권영길 후보가 선거에 당선되니까 꽃다발을 목에 걸고 떨어지는 꽃가루를 맞으면서 손가락 V자 포즈를 취하며 사진찍는 것과 같은 촌극은 古典이 된 지 이미 오래다.

이제 두번째 질문으로 넘어가 보겠다. ``그러함에도 왜 상당수의 사람들은 경쟁시스템을 두려워하고 싫어할까? `` 여기에 대하여 필자가 대답해 보기로 한다. 본래의 경쟁제도는 경쟁시스템에 참가한 사람들에게 주는 보상으로 영(0) 과 플러스(+)만이 돌아가도록 만들어진 제도이다.

그런데 세상에는 별의 별 인간들이 다 있다. 세상에는 좋은 사람이 있는가하면, 질이 안 좋은 사람도 있다. 여기에서 질이 안 좋은 사람은 탐욕이 많은 사람을 일컫는다. 그런 `질이 안 좋은 사람들`이 머리를 굴려서 경쟁제도를 좀 나쁘게 변질시켰다. 즉, 그들은 본래의 경쟁시스템에 사용하는 영(0), 플러스(+)에다가 마이너스(-)를 하나 더 추가하였다. 그들이 마이너스(-) 카드를 한 장 더 넣은 것은 순전히 그들의 탐욕 때문이었다.

경쟁해서 나온 결과가 정해놓은 점수나 수준에 합격하면 플러스(+)를 얻고, 불합격하면 영(0)이다. 예를 들어보자. 甲 학생이 공무원시험을 친다. 그가 만약 합격하면 자신이 원하던 보상을 받는다. 그래서, 플러스(+)가 된다. 그런데 만약 불합격하면 현재상태에서 변한 것이 없게 된다. 그래서 원하던 보상은 영(0)이 된다.

이 말을 詳述하면 , 우리가 경쟁에 참가해서 가장 최악의 경우의 수라고 해봐야 `현 상태 그대로`라는 것 밖에는 없다. 즉, 경쟁한 결과로 인해 발생하는 최악의 결과는 `아쉽다 좀 더 노력할 걸` 뿐이다.

그런데 탐욕이 많은 어떤 기업주가 있다고 치자. 그는 본래의 경쟁시스템에 사용되는 카드를 하다 더 넣는다. 그 카드는 앞에서 말한 마이너스(-)카드이다. 사례를 들어 설명하면 이러하다. 얼마 전에 뉴스에서 이런 것이 나왔다. 유명 백화점에서 있었던 일인 데, 그 백화점 기업주는 각각의 코너를 맡은 직원들을 서로 경쟁시켰다고 한다. 많이 판매한 직원은 포상금을 주고, 적게 판매한 직원에게는 엄청난 질책과 감봉, 더 나아가 해고를 했다고 한다. 그러자 판매실적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고 상사로부터 시달림을 당하고 해고당할 위기에 처하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그 기업주는 탐욕으로 인해 경쟁제도를 악용한 것이다. 왜냐하면 본래 경쟁제도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0)과 (+)만을 사용하는 제도인 데, 특별한 경우가 아님에도 (0)카드와 플러스 (+)카드 외의 것인 판매실적 저조에 책임을 묻는 마이너스(-)카드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경쟁 결과에 대하여 경쟁참가자가 감당해야 할 최악의 부담은 ``현 상태 그대로`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 기업주는 경쟁참가자로 하여금 감당해야 할 최악의 부담을 `현 상태 그대로를 넘어선 문책이나 감봉 또는 해고`까지 가중시킨 것이다. 경쟁이라는 제도를 악용하여 `직원들 쥐어짜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본래의 경쟁제도에서 용인하는 범위를 크게 벗어나는 나쁜 행위이다.

인간의 행위를 규율하는 형법은 기업주의 그런 탐욕에 찬 행위까지 처벌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윤리적 규범에 기초하여 그런 행위를 규탄할 수 있다.

세상에는 `관심을 가져줘야 할 데모`가 있고, `전혀 동조해 줄 수 없는 나쁜 데모`가 있다. 악덕 기업주가 직원들을 쥐어짜기 위해 경쟁제도를 악용하는 것을 입법을 통해서든 여론의 힘으로든 못하게 막아야 한다. 반면 이번 철도파업처럼 나쁜 데모에는 국민들이 동조해 줄 필요가 없다. 본래의 경쟁제도에서 벗어나 기업주의 탐욕을 채우기 위해, 그것을 악용하는 행위는 용인되지 않는다.

경쟁제도에 있어서 마이너스 카드의 사용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허용되지 않는다. 이윤을 더 얻으려는 욕심으로 직원들을 쥐어짜기 위한 도구로 마이너스 카드를 사용하는 것은 본래의 경쟁제도의 취지에는 속하지 않는다. 회사가 경영악화로 인하는 등 긴박한 경영상의 필요등의 특별한 경우 외에는, 마이너스 카드를 경쟁이라는 미명하에 사용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경쟁이라는 명분으로 그런 나쁜 짓을 하는 기업이 많다. 그것으로 말미암아, 본래 경쟁제도는 나쁜 것이 아님에도 경쟁시스템이 사람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으로 잘못 인식되는 것이다. `나쁜 짓을 하는 데 경쟁이라는 개념을 써먹는 사람들`때문에 국민들 중에 상당수는 경쟁시스템을 두려워하고 싫어하게 된 것이다.

개인이 살면서 거쳐야 할 경쟁에 참가하지 않으면 보상은 영(0)이다. 영(0)이란 앞서 말한 바대로 `현 상태 그대로`라는 뜻이다. 경쟁에 참가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을 얻지 못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한 개인이 자신이 목표로 한 경쟁에 참가하게 되면 `현 상태 그대로를 탈피할 수 있는 그 이상의 것`을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을 갖게 된다. 따라서 경쟁에 참가한다는 것은 `목표로 한 보상을 얻고자 하는 가능성`을 능동적으로 求하는 것이다. 다시말해서 경쟁에 참가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얻지 못하는 것`인데, 경쟁에 참가함으로써 `비로서 원하는 바를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긴다`는 뜻이다. 따라서 경쟁에 참가하는 것이 스스로 경쟁을 포기하는 것보다 훨씬 유익하다.

김예슬 학생은 경쟁의 결과로 얻을 플러스(+)보상을 받을 가능성을 스스로 포기한 것이다. 즉, 보통학생에게는 경쟁의 결과로 영(0) 또는 플러스(+)를 기대하는 반면, 김예슬 학생은 어떠한 경쟁에도 참가하지 않겠다고 함으로써 오로지 영(0)으로 확정된 것이다.

어떠한 경쟁에도 참가하지 않겠다는 김예슬 학생에게는 돌아갈 보상이 없으니, 그가 바랄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은 경쟁의 결과없이 얻을 수 있는 국민기초연금 뿐일 것이다. 이제부터 그가 할 일이라고는 60살 될 때가지 기다리는 것 뿐이다. 수많은 경쟁 중에서 어떤 것은 합격하기가 어려운 경쟁이 있고, 어떤 것은 상대적으로 합격하기가 수월한 경쟁이 있다.

김예슬 학생의 경우 합격하기 어려운 경쟁에 대한 비관적 예상 때문에 심적으로 괴로왔다면 상대적으로 합격하기 수월한 경쟁을 택했어야 했다. 5천만의 국민들 개개인은 다 그렇게 해서 사회의 적재적소에 배치되었기에, 지금의 대한민국이 굴러가고 있는 것이다. 자기가 실력이 되면 대우가 좋은 직업을 갖게 되는 것이고, 실력이 좀 모자라면 그에 맞는 낮은 단계의 대우를 해주는 직업을 갖게 되는 것이다.

좌파지식인들과 언론매체는 김예슬 학생에게 그릇된 경쟁관을 심어줌으로써, 그것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 김예슬 학생은 아까운 시간을 허비하고 인생의 미로에서 헤매고 있는 것이다. 그의 인생이 혼돈속으로 괴롭게 된 것에는 좌파진영의 사람들의 책임이 크다. 김예슬 학생은 아직도 자신이 한 선택이 옳았던 것인지 되돌아 볼 필요가 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정상 궤도로 돌아왔음 한다.

마지막으로 세번 째 질문을 던져보겠다. `` 좌파와 우파의 경쟁관은 위와같이 극명하게 차이가 나는 데 그 근본적인 이유는 어디에 있는 가? `` 이에 대하여 답해보기로 한다. 경쟁에 대한 관점이 이토록 다른 것에는 그 밑에 깔려있는 철학이 달라서이다.

좌파지식인들은 `경쟁의 결과로 보상이 달라지는 데, 애초부터 경쟁이라는 것이 없었더라면 보상의 불평등이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결과의 평등을 만들기 위해서는 경쟁제도를 배격하고 없애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공산주의 사상이다.

좌파지식인들의 일부는 그와는 약간 달리 주장하기도 한다. `경쟁이라는 것은 존재할 수 밖에 없는 데, 경쟁결과인 성취 크기에 상관없이 동일한 보상을 해줘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 주장은 1등을 하든 꼴등을 하든 다 합격시켜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의사의 봉급과 짜장면 배달부의 봉급은 같아야 한다는 말한다. 이렇게 되면 `처음에 있던 경쟁이 나중에는 결국 사라지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 사회를 만들자고 좌파들은 부르짖어왔다. 한겨레, 경향, 오마이뉴스는 북유럽의 경우를 예로 들면서, 거기에는 의사와 청소부의 봉급이 거의 비슷하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해 확인된 바는 없다.

반면 우파지식인들은 `경쟁의 결과로 보상이 달라지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인적 자원을 적재적소에 배치시킬 뿐만 아니라 보상의 우열이 각 개인들의 노력을 더욱 기울이게 하는 유인(insentive)이 되어 이 사회를 발전시킨다`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누구에게나 공정한 경쟁에 참가할 기회는 주되, 성취한 것과 비례하여 보상을 줘야 한다는 것으로 우리 대한민국이 현재 채택한 사유재산주의(자본주의) 사상이 그것이다.

좌파의 첫번째 說과 두번째 說 모두 경쟁이 있든 없든 결과로서의 보상이 똑같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들 말처럼 보상이 똑같아지면 경쟁은 없어지게 될까? 결론적으로 말하면 그렇지 않다. 경쟁은 인간사회에서 결코 없어지지 않는다. 경쟁이 없어지려면 인간들은 대관령 목장의 젖소처럼 살아야 한다. 어떤 목적이나 가치, 삶의 의미없이 누군가가 주는 밥만 먹다가 또는 자연에 널린 풀만 뜯다가 살다 죽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인간의 삶은 동물의 삶과는 다르다.

좌파들이 착각하는 것이 있다. 공산주의 국가라고 해서 경쟁이 없는 줄 안다. 좌파들이 추구하는 궁극적 목표인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보상을 주는 사회`를 만들었다 치자. 즉, 협동농장을 만들고 거기에서 모든 사람이 다 함께 일하고 똑같이 300만원 타 가는 국가를 만들었다고 하자. 그런 국가는 경쟁이 없을까? 천만의 말씀이다.

인간은 누구에게나 보상이 동일하다면, 노력을 절감하는 쪽으로 경쟁을 하게 된다. 즉, 최대한 힘을 덜 들이고 남과 같은 봉급을 받아가는 선택을 하게 된다는 의미이다. 공산주의가 망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甲과 乙이 있다. 그들은 오마이협동농장에서 함께 일한다. 그들은 자신에게 동일한 임금이 들어올 것이라는 것을 안다. 그러면 甲은 乙보다 더 적게, 덜 위험스러운 쪽으로 작업을 한다. 乙 역시 甲과 생각이 같다. 甲과 乙은 동일한 보상下에서는 최소한의 노력을 들일수록 자신에게 이익이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의사와 짜장면 배달부의 봉급이 같다면, 힘들고 노력을 장기간 들여야 하는 의사를 택할 사람은 거의 없다.

사유재산주의(자본주의)가 공산주의를 이긴 원인이 바로 거기에 있다. 경쟁의 내용이 다른 것이다. 사유재산주의는 보상이 달라지게 함으로써 각 개인의 노력과 헌신을 최대화시킬 수 있다. 반면 공산주의는 보상을 같게 함으로써 각 개인의 노력과 헌신을 최소화시키는 것이다. 즉, 前者는 `누가누가 더 열심히 일하냐`인 포저티브 경쟁이라면, 後者는 `누가 누가 더 농땡이치냐`인 네가티브 경쟁이 되는 것이다.

필자가 중고등학교 다닐때 국민윤리 교과서에 이런 내용이 실려 있었다. 북한에서 있었던 일인 데, 협동농장에서 일하면 수확량이 적게 나왔다고 한다. 그런데, 북한 정부가 개인 텃밭에서 나오는 것은 그 사람의 소유로 해주겠다고 하자, 그곳에서의 수확량은 눈에 띄게 많아졌다고 한다. 이사례에서 보듯이, 자본주의(사유재산주의)가 공산주의보다 더 우월한 제도이며 인간 본래의 삶과 맞다는 것이 입증되는 것이다.

경쟁은 공산주의든 자본주의든 없앨래야 없앨 수 없다. 경쟁이 있을 수 밖에 없는 것이 인간의 삶과 동물의 삶이 다른 근본이유이다. 경쟁제도가 필연임을 안다면 그 경쟁은 네거티브(더 농땡이치는) 경쟁이어서는 곤란하고, 포저티즈(더 열심히 일하는) 경쟁이어야 하는 것이다.
<월드뉴스 최성진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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