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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09-01-08 08:2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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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암 월출산(해발 809.8미터)


구름이듯,
바람이듯,
구름은 수직의 하늘에 닿아,
하늘을 사무치고.
바람은 수평의 인간에 닿아,
사람을 사모하고,
하늘을 사무치는 월출산의 구름이다.
사람을 사모하는 월출산의 바람이다.


하늘을 올려다본다.
늘 그 자리인 하늘이다.
하늘이 이속에 물든 인간을 책망하지 않는다.
하늘은 인간이 스스로 감응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다.
천황사 뒷편의 대밭이 빽빽하다.
쪽빛 대밭에 햇살이 내린다.
부채살을 그리는 광선 같은 햇살이다.
햇살을 따라 쪽길이 보인다.
햇살을 따라 쪽길 접어들면 승천할 것이다.
햇살이 하늘로 진입하는 길을 안내하고 있다.


구름을 올려다본다.
이편에서 저편으로 흐르는 구름이다.
구름이 저홀로 편협한 인간을 책망하지 않는다.
구름은 인간이 스스로 깨우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다.
회색바위에 걸친 하얀 구름이다.
눈앞의 한 평이나 되는 평평바위이다.
산에서는 소용되지 않는 것은 없다.
옛적에 스님은 그 바위에 앉아 득도하였을 것이다.
바위의 소용됨이 그리도 큰 것이다.
구름이 그 바위를 애무하듯 감싸고 있다.


구름이듯 흐른다.
바람이듯 흐른다.
그리하여 그 시작도 종잡을 수 없지만,
그 마침이 어디인지도 종잡을 수 없는 것이다.
고여서 넓혀지는 것이 아니라
흘러서 사라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흘러서 세상을 하염없이 정화하는 것이다.
구름은 사람의 마음 속깊은 곳까지 정화하고
바람은 환풍지대를 만들어 대기의 속살까지 정화하는 것이다.
구름이듯,
바람이듯 월출산이 그렇게 맑다.


하늘이 높아졌다.
문득 인간으로부터 소원하고 싶은 것이다.
그런 하늘에 다가가지만 하늘은 늘 저 만치에 있다.
덩달아 구름도 높아졌다.
문득 인간의 물음으로부터 도망하고 싶은 것이다.
그런 구름에 길을 물으니 묵묵부답이다.
새로 단장한 구름다리에 당도한다.
저쪽 하늘에 지샌달이 걸쳐있다.
상현의 모습을 하고 있다.


달까지도 산의 순환에 편승하고 있다.
열매가 영글어 씨앗을 남기듯이,
달은 영글어 보름이 될 것이고,
낮인 듯 산하의 밤을 밝힐 것이다.
월출산에 걸린 낮달에 마음이 숙연하다.
아직 못다 이룬 사무침이 남은 시골아낙네 같다.


기암을 타고 오른다.
그 형세에 세월의 풍파가 녹아 있다.
암봉을 타고 넘는다.
그 수려한 자태가 색색의 단풍을 품고 있다.
통천문 앞의 삼거리에 선다.
바위의 난간에 휴식을 취한다.


휴우 거친 호흡으로 올라온 길을 되돌아본다.
사자봉이 그 위용을 들어내고 있다.
순간 정신을 잃고 혼절하고 만다.
사자봉이 영락없이 월악산의 영봉을 닮았다.
월악산의 영봉이 월출에 와서 사자봉이 되었다.
그 모양새가 마치 쌍둥이처럼 똑 같다.
이 기묘한 닮음 앞에서 인력의 왜소함이 대비된다.
통천문을 손살같이 달려 나온 바람을 맞고서 정신을 차린다.
통천문이 그렇게 소용되고 있다.


정상에 선다.
새들이 비상하여 바람을 잠재우듯이,
억새가 피어서 산의 풍경을 호령하듯이,
나는 눈을 똑바로 하여 사방을 조망한다.
지난 등정에서는 허사였다.
운무가 산 전체를 뒤덮었다.
그 때엔 아마도 눈을 똑바로 들지 않았었던가 보다.
수평으로 달리던 바람이 휘익 수직으로 분다.
월출의 정상에서는 바람도 하늘을 사무치는가 보다.


수직의 구름 한 점이 소리없이 정상에 내린다.
월출의 정상에는 구름도 사람을 사모하는가 보다.
월출의 정상에는 바람, 구름, 사람이 함께 만난다.
정상에서 바라다보는 구정봉이 아련하다.
그 봉우리에는 아홉 개의 우물이 있어 가뭄이 없는 것이다.


월출산에서의 바위이다.
바위가 없다면 산은 온전하지 못할 것이다.
바위가 있기에 산은 그 형체를 완성하는 것이다.
월출산의 바위는 유난한 것이다.
상상하는 것들은 다 만들어내는 미래과학자처럼,
상상하는 것들은 다 형체로 표현하고 있는 바위이다.


마음에 통한이 인다.
하산이 아쉬운 것이 아니라,
그 형상의 바위들을 애찬해내지 못하는 언어의 한계가 그렇다.
다만 그곳에 잠들고 싶은 것이다.
깨어나지 않을 수 있다면 행복이 될 것이다.
그 비경에 혼연일체가 되는 것을 그것뿐일 것이다.
숲속에 잠든 공주 때문에 숲이 숲다울 수 있듯이,


바위는 묵묵하다.
누가 어떤 이름을 갖다 붙여도 말이 없다.
가벼운 인간이라면,
마음에 안 드는 별명만으로도 토라질 텐데,
바위는 거슬리는 이름조차도 항상 묵묵인가 보다.
하늘을 향하여 우뚝 선 남근바위를 힐끔 본다.
인근의 억새풀들이 그 아래에서 숲을 이루고 있다.
하얀 하늘을 닮은 억새가 그저 순응하듯 다소곳하다.


직벽의 바위를 오르내리느라 거친 숨을 내뿜는다.
억새풀숲을 헤치고서야 나타나는 베틀굴에 들어선다.
전란을 피한 아낙네가 그곳에서 베를 짰다.
흡사 여근의 모습과 너무나 똑같은 베틀굴이다.
그래서 음굴이라 명명되고 있는 것이다.
이 절묘한 조화를 어떻게 형언할 수 있단 말인가.


그저 말문을 잃고 만다.
지나쳐온 남근바위와 같은 눈높이에 위치한 음굴이다.
음양의 조화가 산에서도 이리 절묘한 것이다.
그곳에 달빛이 내린다면 천치창조가 있는 것이다.
월출에 서린 천치창조는 장엄하고도 창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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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극원 취재기자 정극원 취재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 대구대학교 법과대학 학장
    대구대학교 법대 졸업
    독일 콘스탄츠대학교 법대 법학박사
    한국헌법학회 총무이사(전)
    한국비교공법학회 총무이사(전)
    한국공법학회 기획이사
    한국토지공법학회 기획이사
    유럽헌법학회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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