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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2-08-28 09: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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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은 무엇을 꿈꾸고 있는가 13부
(전라도의 빛)

<프런티어타임스 기고논객 정재학> 필자(筆者)가 동학혁명을 되새길 때마다 가슴 아팠던 것은, 보국안민(輔國安民)의 기치를 높이 들고 적을 향해 나아가던 사람들은 평소 타 지역이나 권력자들로부터 천대받고 멸시 받았던 설움 많이 받던 전라도 민초(民草)들이었다는 점이다.

전라도 사람들을 구박하고 손가락질 하던 자들은 국난을 만나 매국노로 변하였으나, 천대 받던 전라도 사람들은 조국을 구하기 위해 낫과 괭이를 들고 전쟁터로 나갔다. 매국노들이 나라와 백성을 팔아 호의호식(好衣好食) 하는 동안, 전라도 흰옷 입은 백성들은 뜨거운 피를 이 땅에 뿌리며 죽어갔다. (‘일어서면 백산(白山), 앉으면 죽산(竹山)’이란 말은 동학혁명이 일어나던 고부의 언덕에 모인 농민군들이 모두 죽창을 들고 흰옷을 입었음을 뜻하는 풍자이다.)

필자(筆者)는 이 모든 애국행위를 ‘전라도의 영광’이라고 평가한다. 그리고 지금부터 이 전라도 사람들이 어떻게 조국을 사랑하였는지, 그 이야기를 전하려고 한다. 면암 최익현은 경기도 포천 출신으로 경주 최씨 대(岱)의 아들이다. 수봉관·지방관·언관으로 재직 시 불의와 부정을 척결하여 자신의 강직성을 발휘하였고, 전남 신안 흑산도에서 1873년부터 3년간의 유배생활을 계기로 왕도정치적 명분이 상실된 관직생활을 청산하고 우국애민의 위정척사의 길을 택하게 되었다.

그의 항일구국이념은 1895년 을미사변의 발발과 단발령의 단행을 계기로 폭발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조약의 무효를 국내외에 선포할 것과 망국조약에 참여한 박제순(朴齊純) 등 오적을 처단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언론에 의한 위정척사운동은 집단적·무력적인 항일의병운동으로 전환되었다.

면암 최익현은 고종으로부터 '사무사(思無邪)'라는 글귀가 적힌 밀명(密命)을 받는다. 생각함에 사심이 없으라는 글귀의 진의(眞意)는 나라를 지키라는 고종의 뜻이었다. 이에 면암은 1906년 윤4월 전라북도 태인에서 800 의병을 이끌고 궐기하였고, 74세의 고령으로 최후로 진충보국(盡忠輔國)하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순창전투에서 패배하여 잡혀가 적지(敵地) 대마도 옥사(獄舍)에서 적 일본의 음식을 거부한 채, 굶어 순국(殉國)하셨다.

면암 최익현, 그는 국난을 맞이하여 천대와 멸시의 땅, 전라도로 왔던 것이다. 그리고 곡성에서 의병을 규합하여 순창 전투를 치른다. 의병의 함성이 누리를 덮던 곳, 지금도 곡성 성출산 입구에는 이 '사무사(思無邪)'라는 글귀가 계곡 바위에 새겨져 있다. 면암은 이곳 전라도에서 전라도 백성들을 이끌고 구국의 일선에 뛰어든 것이었다.

고창의 선비, 일광(一狂) 정시해도 고창 무장 일대의 선비들을 이끌고 면암의 군영에 합류하여, 중군장으로 면암을 보필하다 순창전투에서 홀로 순국하였다. 후일 사람들은 정시해를 포함 면암과 면암의 7대 제자들을 지금까지 곡성 사당에서 불천위 제사를 지내고 있다. 면암의 봉기는 1894년 동학혁명이 일어난 지 불과 10년 후의 일이었다.

동학교도(東學敎徒) 색출로 초토화되는 와중에도 면암의 부름을 받은 전라도 백성들은 동학의 의기(義氣)를 이어, 면암의 의병에 합류하여 나라를 보위하고자 하였다. 생각해 보면, 가엾은 일이었다. 어찌하여 평소에는 좋은 벼슬은 다 자기들이 차지하면서, 전라도를 반역자들의 고향, 사기꾼 뒷통수 치는 범죄자들이 사는 곳으로 매도하면서도, 국난(國難)에 이르면 제일 먼저 전라도 사람들의 피와 희생을 요청하였던가.

하긴 넓은 평야지대라 군량미를 얻기가 쉽고, 대부분 소작인들이거나 머슴들이 많기에 의병을 모으기가 용이하였을 것이다. 더구나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이니 무엇이 두려웠을 것인가. 대한민국 근대화 시기에도, 모든 경제발전의 열매는 타 지역 사람들이 가져가고, 천대 받고 혜택 받지 못한 전라도 사람들에게는 어느 지역과 마찬가지로 다 같은 국민의 의무를 강요하였었다. 의무만이 평등하였고, 혜택과 입신출세, 경제성장의 과실은 불평등하였다.

군대 안 가는 사람을 신(神)의 아들이라 부르던 시절에, 전라도 사람들은 빽 없고 돈 없는 사람들이라 군대는 빠질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지금 정관계에 즐비하게 늘어선 군대 안 간 정치인들, 군대 안 간 잘 사는 사람들을 생각해 보면 정말 가엽고도 가증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전라도 사람들은 대의(大義)를 잊지 않고, 나라와 민족을 지키는 일에 누구보다 더 앞장섰으며, 누구보다도 많은 피를 흘렸었다. 그리고 누구를 원망함이 없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 높은 벼슬에 잘 먹고 잘 사는 자들은 나라를 팔고, 가난하고 천대받는 백성들이 나서서 나라를 지켜냈던 것이다. 바로 전라도 사람들이었다.

어느 겨울, 필자(筆者)는 곡성에서 눈보라를 맞으며 고종의 글씨를 바라본 적이 있다. 글씨엔 오랜 세월이 지났음을 알려주는 청태(靑苔), 푸른 이끼가 끼어 있었다. '사무사(思無邪)', 곡성 성출산 계곡 입구에 새겨진 고종의 친필 글씨는 진정한 전라도의 영광을 가르쳐주는 증거라 할 것이다.

정재학
전국논객연합 부회장, 한국문인협회 회원, 시인, 전교조추방시민연합 공동대표. 자유지성300인회 회원, 전남자유교조 고문, 광주전라데일리안 편집위원, 프런티어타임스 ․ 인사이드월드 ․ 라이트뉴스 칼럼니스트
프런티어타임스(www.frontier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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