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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5-09-15 08:0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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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성진 월드뉴스 정치부장(국회팀장)
"저는 매일같이 더 많은 사실들을 존중하게 되는 반면에 존중하게 되는 이론은 더 적어지고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 사실이란 신이 아니라 악마가 쓴 문장일지라도 매우 중대한 것이라고 봅니다" 이것은 1836년 토마스 칼라일이 랄프 왈도 에머슨에게 쓴 편지글이다.

지식인들은 실제(사물,사실,현상,현실등)를 설명하는 것이 이론(또는 說)임에도, 오히려 거꾸로 자신의 이론에 실제를 억지로 끼워맞추려 하는 오류를 자주 범한다. 그렇기 때문에 토마스 칼라일의 이 문장은 `사실`과 `이론`이 서로 배치될 때에는 사실을 더 중시해야 한다는 말이다. 또한 누군가가 짜낸 이론이나 說들중에서 (지혜의 눈이 높아짐에 따라) 존중해줄만한 것이 점점 적어진다는 뜻이다.

어느 분야이든 초보에서 고수로 되어감에 따라 보는 눈이 예리해진다. 보는 눈이 예리해진다는 것은 어지간해서는 쉽게 만족하지 않게 된다는 뜻도 된다. 작품이나 지적 생산물에 대하여 조그만 미숙함도 용납하지 않게 되는 데, 이것을 완벽주의라 부른다. 완벽은 모든 분야에서 추구하는 가장 최고의 정점이다. 흠잡을 데 없는 경지를 우리는 완벽이라 부른다.

내가 원주중고등학교를 다닐 때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옆 학교인 대성중학교에는 어떤 체육선생님이 있었다. 그 시절에는 학생에대한 체벌이 잦았는 데, 그 체육선생님도 말썽피우는 학생을 많이 혼내셨다. 그러던 어느 날 한 학생이 회초리로 그 선생님한테 얻어맞다가 더 못 참고 날라오는 회초리를 손으로 막았단다. 그러자 그 선생님이 말하길, `` 어쭈 막어? 그래 어디 막아봐라``하며 회초리를 이리저리 놀리면서 때리는 데, 그 학생이 하나도 막아내지 못했다고 한다. 이 광경을 많은 학생들이 지켜봤고 소문이 나서 내 귀에까지 들려 온 것이다. 알고 봤더니 그 체육선생님은 국가대표 펜싱선수였고 올림픽에 나가서 은메달을 딴 경력이 있단다.

영화 아마데우스에서도 이런 장면이 나온다. 오스트리아 황제의 부름에 모짜르트가 입궐한다. 그는 황제가 있는 방을 찾다가 피아노 연주소리를 듣는다. 그리로 가니 역시나 황제와 살리에리, 그리고 궁정대신들이 있었다. 그 피아노 곡은 살리에리가 작곡한 것이었는데, 그것을 황제가 연주하던 중이었다. 모짜르트가 피아노 앞에 앉아 그 곡을 악보를 보지 않고도 그대로 연주해 보이는 데, 그러면서 이렇게 말한다. " 이 부분은 이렇게 하는 게 더 좋겠는 데요.``하면서, 즉석에서 더 나은 소절로 바꾼다. 그러자 살리에리도 그가 고친 부분에 대해서 수긍하며 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고수의 경지에까지 간 사람들은 허점이나 미숙함을 찾아낼 수 있는 안목을 가지고 있다. 고수나 대가들의 공통된 특징중에 하나가 완벽의 추구이다. 그들은 작품이나 업무에 대해 쉽게 만족할 줄 모르고 매우 까다롭다. 영화 라따뚜이의 요리평론가도 마찬가지이다. 영화에서 그는 말한다 ``나는 맛이 형편없으면 음식을 목구멍으로 넘기지 않는다``고

초보나 중수들의 눈에는 보통의 작품이나 업무 또는 지적 생산물들이 다 `훌륭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뉴욕타임스 발간 책 서문을 쓴 사람이나 펜싱국가대표 선수, 모짜르트의 눈에는 그것들이 `미숙한 부분이 많은 것`으로 보인다. 완벽의 경지까지 도달하도록 만들어내는 것은 매우 어려워서 세상에 쏟아져 나오는 작품, 프로젝트, 지적 생산물등은 다 미숙한 부분을 갖고 있게 마련이다. `천한 것은 흔하고 귀한것은 적다`는 말이 여기에서도 통한다.

반면 좌파사람들중에는 이상한 사람들이 많은 데, 한겨레신문 김선우 칼럼리스트는 예술작품들은 다양성만 있고 우열이 없다고 주장한다. 즉 수준이 높은 작품과 수준이 낮은 작품이란 없으며 모두 다 평등하다는 뜻이다. 이런 견해는 김선우씨 뿐만 아니라 좌파진영 사람들사이에서 널리 퍼져있다. 그들은 훌륭한 것과 훌륭하지 않은 것, 좋은 것과 좋지 않은 것, 뛰어난 것과 뛰어나지 않은 것에 대한 차이를 말하고 등수를 매기는 것에 대해 알레르기를 일으킨다. 등수를 매기는 일을 죄악이라고 생각하며, 어떤 것을 보든 `다 같다`라고 말하고 싶어한다. 즉, 공산주의자들은 세상만사를 모두 평등이라는 말로 묶고 싶어한다.

어찌보면 공산주의는 종교와 유사한 면이 있다. 불교와 기독교는 `인간의 욕망`을 죄악으로 여긴다. 그런데 평등교(공산주의) 원리주의자들은 `등수를 매기거나 우열을 말하는 것`을 죄악으로 여긴다.

예술작품을 만드는 예술인은 자신과의 싸움을 한다. 그들의 정신세계에는 `엄격한 내적 잣대`가 있다. 그래서 작품을 만들다가 조금이라도 맘에 안드는 부분이 있거나 미숙함이 눈에 띄이면 가차없이 그 작품을 폐기해 버린다. 도예가들은 맘에 들지 않으면 가차없이 자신의 작품(도자기)을 망치로 깨버린다. 그들 내면에는 작품에 대한 엄격한 잣대가 있어서이다. 그런 점에서 예술가들은 예민하다. 아주 미세한 허점에도 반응하기 때문이다.

예술은 `혼자하는 일`이다. 그런데 `상대방(敵)이 있는 일`도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스포츠경기이다. 축구는 두 팀이 서로 다투는 게임이다. 전력이 뛰어난 팀은 상대방의 순간적인 빈틈이나 미숙한 부분을 잘 찾아내어 재빨리 공략한다. 그리고 빈틈이나 허술한 부분을 보이지 않는다. 약체의 팀은 정반대이다.

한국축구는 과거 십 수년전에 네덜란드, 프랑스등 강팀들에게 5대 0으로 참패한 적이 있었다. 그때 경기를 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번번히 뚫리는 수비와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공격을 말이다. 강팀들은 대개 빈틈이 없고 빈틈을 잘 찾아낸다. 빈틈이 없다는 것은 상대팀의 입장에서 볼때 완벽 버금가는 수준까지 이르렀다는 의미이다.

`완벽`은 보는 이들로 하여금 숨막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한국 축구가 유럽강팀을 만나면 꽉 막히고 갑갑해지는 느낌을 받게 된다. 그런 심리적 압박 때문에 백패스만 자꾸 하게 되는 것이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머리를 꽉 채운다. 영화나 만화책에서도 이런 장면이 나온다. 최고수와 직면한 칼잡이가 속으로 `아무런 자세도 취하지 않았는 데도 빈틈이 없다`고 생각하면서 매우 긴장하는 장면 말이다.

토마스 칼라일, 펜싱국가대표출신 체육선생님, 모짜르트, 요리평론가, 유럽강팀등 고수나 대가들은 작품이나 戰力에서 빈틈을 금방 찾아낼 줄 안다. 반면 자신은 빈틈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완벽의 경지까지 간 사람들을 상대하는 입장에서 보면, 매우 고통스럽고 숨 막히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지금 새천년민주연합과 좌파신문들(한경오)은 맥을 못 추고 있다. 그들 스스로도 그 점을 인정한다. 정치와 언론은 본래 말글로 경쟁하는 분야이다. 그런데 그들은 `말글의 場(공론장)`에서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 좌파진영 사람들은 지금의 상황을 숨막혀 한다. 꽉 막히고 답답한 느낌을 그들은 가지고 있는 것이다. 과거 5대 0으로 참패를 당하던 한국축구를 보는 듯하다.

요즘들어 좌파진영에 속한 사람들의 입에서 이런 말이 흘러나온다. 좌파가 차별적 우위를 차지할 수 있는 콘텐츠가 없다고 말이다. 그런데 그것은 그들의 한계때문에 그렇게 생각되는 것이다. 토마스 칼라일의 말처럼 세상에 나온 이론이나 견해들 중에서 존중해줄 수 있는 것들은 그리 많지 않다. 한국 신문의 칼럼, 사설은 대부분 다 완벽하지 못하다. 완벽하지 못한 만큼 빈틈은 널렸다는 것이다. 좌파지식인들도 지금부터라도 공부를 열심히 하면 얼마든지 차별적 우위를 보여줄 수 있는 칼럼등을 써 낼수 있다는 뜻이다.

좌파진영의 지식인들은 대국을 볼줄 모른다. 지금 자신들이 어떤 상황으로 몰리고 있는 지를 모르더라. 이 지경이 될도록 모르고 있다가, 막다른 골목에 몰린 지금에 와서야 한탄을 늘어놓고 있는 것이다. `상대방 있는 게임`은 항상 나와 상대방을 같이 봐야 한다.

좌파진영은 필력이 뛰어난 論客이 거의 없다. 또한 언변이 뛰어난 說客도 별로 없다. 그러니 `말글의 場(공론장)`에서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는 것이다. 말글에서 밀리면 정치세력의 미래는 암울한 것이다. 지금의 좌파진영은 과거 5대 0으로 깨지던 한국축구와 매우 흡사하다. 혁신의 소리만 요란하다가 끝나는 지금의 야당의 모습을 보는 국민들도 마음이 답답할 것이다.

좌파진영의 근복적인 문제점은 `완벽의 추구`라는 정신적 가치가 없다는 점이다. `완벽의 추구`를 다른 말로 표현하면 `향상심(더 높은 경지로 올라가려는 노력)`이다.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이라고 외쳐대던 그들에게서 향상심(완벽의 추구)을 기대한다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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