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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후 직업 노동 정책과제 스무 가지와 대안9
달인(達人)은 통달한 인간을 말한다. 일자리를 만드는데 통달한 리더를 각국의 국민들은 기다리는 중이다. 특히 2012년 미국 대선에서 이런 일자리 창출 달인형 리더를 기다리는 여론이 상당히 높은 편이다.
그러나 미국 정치판에서 일자리 창출의 달인과 같은 그런 인물을 찾아내기란 쉽지 않았다. 공화당 소속 릭 페리 미국 텍사스 주지사는 이런 상황에서 적기(適期)에 미국 대중에게 등장, 일자리 창출의 성취가 알려지면서 그는 미국 공화당 2012년 대선후보로 두각을 드러낼 가능성이 높아지는 중이다.
아마도 2011년 미국 고용 지표가 워낙 나빠서 일 것이다. 물론 바크먼, 롬니 같은 공화당 후보들과 릭 페리는 치열한 당내 경쟁을 거쳐야 할 것이다.
텍사스 주지사로서의 그의 일자리 창출 성취(成就)를 보면 이렇다. 26만 2천개의 일자리를 2009년 6월부터 2년간 창출한다. 미국 전역에서 50 만개 정도의 일자리가 같은 시기에 새로 창출된 것에 비하면 많은 숫자이다.
고용 없는 성장가도를 달리는 미국의 현대경제에서 고용의 순 확장성을 정책적으로 성취해 보인 리더를 만나기는 힘들었다. 그는 고용을 늘리기 위해서 외국 기업이 미국 텍사스에 투자하려고 오는 방문객들을 위하여 주지사로서의 모든 배려를 한다.
그렇게 함으로서 외국기업이 텍사스에서 보다 많은 비즈니스 기회를 갖게 한 것이다. 편하게 텍사스에서 비즈니스 구상을 현재화 하는데 돕는다.
이를 테면 투자를 위해 오려는 외국인 숙소 정하는 일, 자녀의 학교 전학문제, 특별한 기능 인력 구하는 기술 조력 등 조용한 도움을 주는 것을 지속해 온 것이다
텍사스 주지사와 공무원들은 신고용 창출정책으로 그것만 한 것은 아니다. 일관되게 법인세를 새로 텍사스에서 비즈니스를 하려는 외국 기업에게 감면을 해 준다. 그것이 기업들의 텍사스 투자유치에 성공하게 한다.
그 결과 텍사스에서 괜찮은 일자리( Decent Job) 가 보다 많이 창출되게 한 것이다. 물론 그 정책을 임기내내 지속, 정책의 일관성을 유지한 것이다. 이런 노력의 결과 다국적 및 미국 기업가들이 텍사스에서 자기회사 공장을 짓게 유도한 것이다.
공화당내에 경쟁할 당내의 후보들은 많다. 이들은 안다 미국인들은 미국 서민들을위한 고용지표를 향상 시킬 리더감을 간절히 원하는 중이라는 것을 말이다. 이런 국민적인 바람은 아마도 일자리 창출의 달인에게 상당한 시선을 받게 만들지도 모를 일이다. 다른 미국 공화당 후보들이 서로 경쟁하여 다른 후보를 낼지도 모를 일이다.
미국 대선이 워낙 다른 요소가 다양하게 작용하는 이벤트라서 그러하다. 지난 3년간 현장에서 뛰는 중인 버락 오마바 대통령, 현직인 그가 다시 민주당 대선후보가 될 가능성은 상당히 높다.
여기서 누가 더 사랑을 받을 것인가.
미국 고용상황이 2차 대전직후는 물론 1929년 대공황 이래 가장 힘든 2012년의 시점에서 미국민들을 위한 신규일자리를 파생시켜서 제공하는 능력을 보이는 리더에게 미국 국민들의 희망을 집중할 지도 모르는 일이다.
경제회복도 문제지만 경제가 회복되는 과정에서 순 고용의 파생을 위한 정책적인 방향과 컨텐츠를 만들어 낼수 있는 그런 인재를 리더로 선택하고자 하는 미국 유권자들이 많아지는 중이다. 이는 재미 한인 사회에서부터, 50개가 넘은 다민족 국가 미국에서 광범위하게 나타나는 현상이 될 것이다.
아직은 일년 이상 남은 선거라서 그렇다. 후보들이 정해지면 일자리 창출력을 지닌 리더로 유권자들의 마음이 집중되어 나타날 개연성(蓋然性)이 존재한다는 것은 잊지는 말아야 한다.
2012년 미국 대선에서는 일자리 창출의 달인(達人)이라는 능력에 하나의 미덕이 추가될 지도 모를 일이다. 지금까지의 성취와 자기됨은 주변의 분들이 협력해 주신 덕분이요, 미흡한 부분은 자기 책임이라는 ‘주덕아책(周德我責)’ 의 미덕을 지닌 리더를 미국민들이 강하게 요구하는 흐름이 그것이다.
2012년 대선에서 한국도 향후 직업 창출정책이 주요 국가 의제가 될 것이다.
(김준성 연세대 직업 평론가)
월드뉴스
2011-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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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과 고아 하우스 보이가 미 백…
* 6.25전쟁과 고아 하우스 보이가 미 백악관 비서관이 되기까지 (1편)
하우스보이란 6.25 전쟁때 미군 부대에서 막사 청소를 하고 미군의 군화를 닦아주고 그리고 각종 심부름을 해주는 소년을 말한다. 주로 전쟁 고아들 중에서 선정했는데, 당시 미군부대의 하우스 보이가 된다는 것은 대단한 행운이었다.
6.25 전쟁때 하우스 보이로 성공한 잘 알려진 인물로는 미국 워싱턴주 상원의원이된 신호범 장로와 수원중앙교회 김장환 원로목사 그리고 미국 하바드대학교 정치학박사 임종덕 장로를 들 수 있다.
이들 세사람 중에서 임종덕 장로는(2011년 현재 나이 75세) 그가 오늘이 있기까지 살아온 그 파란만장의 위대한 생애를 아는 사람이 많치 않다. 그 이유는 임종덕 장로는 미국 육군대령으로 예편하기까지 백악관에서 닉슨대통령, 포드대통령, 카터대통령 등 세분 대통령의 안보비서관으로 근무했기 때문에 2014년 까지는 자신의 과거 직책과 관련된 일체의 말을 절대 못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미국의 여러 교회에서 그의 신앙 간증을 요청해도 일체 거절하고 있다.
사실 안드레명상도 이미 3년전 임종덕 장로의 인생 역정을 게재할려고 시도했으나 거절당했는데, 마침 지난 5월 한국을 찾은 임장로를 송승엽 안수집사의 소개로 다시 만나 인터뷰가 성사되었다. 단, 백악관 안보비서관 시절의 그의 직책과 관련된 내용은 일체 언급하지 않기로 약속했다.
1949년 당시 12세의 임종덕은 중국 용정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부모님과 함께 귀국하여 서울중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1년뒤 북한의 6.25 남침으로 미쳐 피난을 가지 못하고 고아가 된다. 임종덕 소년이 고아가 되어버린 그날의 불행을 6.25전쟁 61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당시 잘 알고 지내던 형님뻘 되는 청년이 임종덕에게 서울중학교 한쪽 교실에 불을 지르라고 했다. 당시 서울중학교는 인민군들이 주둔해 있었는데 이곳에 수감된 수십명의 청년들이 훈련을 받고 곧 북한 의용군으로 전쟁에 나가게 된 것이다.
바로 이 청년들을 탈출시키기 위해서 임종덕에게 불을 지르라는 지시를 한 것이다. 평소부터 의협심이 강했던 임종덕은 그 청년이 전해준 기름통을 들고가서 교실옆 목조 건물에다 불을 지르고 북아현동에 있는 자신의 집으로 도망을 갔다.
집에 도착한 임종덕은 집안에 있던 큰나무에 올라가 나무속에 숨었다. 잠시후 인민군 찌프차가 집앞에 도착 인민군 요원들이 대문을 박차고 들어와 마침 마당에 있던 어린 여동생의 머리에 총검을 데고 부모님을 찾았다. 어린 여동생은 겁에 질려 와들와들 떨더니 지하 창고에 부모님이 있다고 말을 해 버렸다.
잠시후 부모님이 양손을 뒤로 묶인채 마당에 섰다. 인민군은 당신네들은 반동문자이기 때문에 인민 재판에 의해 처형하겠다고 했다. 임종덕을 학교 방화범으로 체포하러 온 것은 아니었다. 형식적인 재판이 끝나자 총 소리와 함께 부모님은 쓰러졌다. 아버지 임성규는 독립운동가였고 어머니는 당시 숙명여고 교사였다.
인민군들은 미리 준비해온 장작 위에 시체를 얹어 놓고 기름을 부어 불을 질렀다. 이 무서운 만행을 나무 위에서 직접 목격했던 임종덕은 그 길로 서울을 탈출 피난민 대열에 끼어 정처없이 걷다가 다시 9.28 수복때 미군을 만났다.
한 미군 대위는 임종덕을 친동생처럼 보살펴 주면서 데리고 다녔다. 그러나 원산과 흥남까지 임종덕을 데기고 간 그 미군 대위가 전사하면서부터 임종덕은 외로운 고아로 거지생활을 시작했다.
주로 서울역 앞에서 거지생활을 하던 임종덕 소년은 고아들을 데리고 당시 불광동에 있는 희망원으로 들어갔다. 그때 그의 나이는 열다섯살이었다.
자신보다 어린 고아들을 동생처럼 보살폈다. 그러나 어느날 고아원 원장의 놀랄만한 부정행위를 목격한 임종덕은 몽둥이를 들고 원장실로 쳐들어가 사무실을 박살냈다. 원장은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산으로 도망쳤다. 임종덕도 주위 형들이 너도 빨리 도망가라고 권유해서 고아원을 나와 서울역을 향해 달렸다.
그런데 뒤를 돌아보니 동생뻘 되는 아이들이 “형, 오빠”하면서 29명이 따라오고 있었다. 임종덕은 깜짝 놀라 돌맹이를 던지면서 따라오지 말고 고아원으로 다시 들어가라고 소리를 질렀다. “내 혼자도 얻어 먹기 힘든데 너희들을 어떻게 먹이고 또 잠은 어디서 잔단 말이냐”하면서 계속 돌맹이를 던지면서 저지했으나, 어린 소년, 소녀들은 함께 손을 잡고 울며불며 임종덕을 따랐다.
저녁때가 되어 서울역에 도착한 임종덕은 염천교 다리 밑에 임시 거처를 정하고 모두가 밥을 얻으러 나갔다. 두시간 후에 이들이 얻어온 각종 음식을 다 모아서 비빕밥을 만들어 골고루 배식을 했다.
그러나 정작 임종덕은 자신이 먹을 음식이 없었다.
그러나 다행히 잠잘 곳을 찾아서 임종덕은 행복했다. 즉 큰 방공호로 만들어 놓은 장소를 깨끗이 청소를 하고 나니 그곳에 많은 아이들이 들어갈 수 있었다. 나이별로 남·녀 구분과 엄격한 규칙을 정했다. 임종덕은 어느날 염천교 밑에서 당시 거지왕자로 소문난 김춘삼을 만나서 거지로써 살아가는데 지켜야할 중요한 규칙 몇가지를 교육받았다.
1) 밥을 얻으러 갈 때 대문을 두드리지 말고 깡통 소리를 내라.
2) 밥을 얻을 때는 꼭 깡통이나 그릇을 준비해 가라.
3) 하루에 같은 집에 두번 가지마라.
4) 땅에 떨어진 음식은 절대 먹지 말아라.
한편 날이갈수록 고아들이 계속 모여들어 129명이 되었다.
* 129명 고아들을 살리기 위해 임종덕은 소매치기와 절도범으로 변했다.
129명의 아이들이 제대로 못먹고 질병으로 그동안 24명이 죽었다. 어떤 날은 8명이 한꺼번에 죽는 날도 있었다. 약 사먹을 돈이 없기 때문에 심한 감기만 걸려도 고열로 쓰러져 죽어갔다. 그래서 임종덕은 중대한 결심을 했다. 그것은 바로 소매치기와 도둑질을 해서라도 약값을 모으기로 했다.
그 해가 1952년이었다. 매일매일 소매치기로 번 돈으로 당장 아이들에게 옷도 사 입히고 그리고 약값에 충당했다. 임종덕은 서서히 간이 커지면서 소매치기에서 부잣집들의 담을 넘기 시작했다. 주로 서울 장충동이 활동 무대가 되었고, 특히 제니스 라듸오를 훔치는 날은 아이들에게 특식으로 꽈배기 빵을 한 보따리씩 사가지고 왔다. 어느날 임종덕 소년에게 그의 인생의 운명을 바꾸는 날이 왔다.
서울역 대합실에서 좀 고급스러운 손님을 찾기 위해 대기하고 임종덕은 미국 공군 장성이 탄 승용차 한 대가 미군 전용 주차장에 도착하는 것을 목격했다.
미군 헌병들의 호위를 받으며 차에서 내린 장군은 환송차 대기 중이던 사람들과 악수를 나누며 잠시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바로 이때 임종덕은 승용차 뒤의 트렁크가 약간 열린 것을 발견하고 그안에 있는 가방 하나를 훔쳐 비호처럼 도망갔다. 그러나 그는 멀리 못가고 미군 헌병들에게 붙잡혔다.
임종덕은 과거 미군부대에 조금 있을 때 배운 서투른 영어로 자신이 절도를 하지 않으면 자신이 데리고 있는 고아들이 굶어 죽는다고 말했다.
근처에서 임종덕을 유심히 보고 있던 장군은 곧 절도죄로 파출소로 연행할려는 헌병들에게 임종덕을 조선호텔 즉 장군의 숙소로 보내 하우스보이로 일하게 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임종덕은 이 절호의 기회, 이 좋은 직업을 사양했다.
이유는 내가 없으면 100여명의 고아들이 당장 굶어죽는다고 했다. 장군은 헌병들에게 100여명 고아들의 생활 현장을 확인하고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 고아들 전원을 미국 공군이 운영하던 제주도 고아원으로 입소시키고 그리고 임종덕은 자신의 하우스 보이로 일하겠금 명령했다.
그가 바로 미국 5공군 사령관 스티브 도마스 화이트 중장이었다. 당시 사령부는 일본에 있지만 작전 지시 관계로 서울 조선호텔에 상주하고 있었는데, 안타깝게도 전투비행기 조종사인 그의 외아들이 전투비행중 전사했다.
한편 화이트 장군은 임종덕을 데리고 약 1년동안 유심히 관찰한 후 어느날 임종덕에게 “너는 오늘부터 내아들이 되었다”며 양자로 입적을 시키겠다고 했다. 모처럼 장군의 가슴에 푹 안긴 임종덕은 탱큐를 연발하며 엉엉 울었다. 임종덕은 다시 서울중학교 3학년에 복학하여 중단되었던 학업을 계속했다.
어느날 임종덕은 사령관을 따라 수원의 미공군 기지를 찾았다. 그는 이곳에서 좋은 친구를 만났다. 즉 같은 하우스 보이로 이곳 공군기지 막사에서 일을 하는 김장환이란 소년을 만났다. (후일 수원중앙교회 원로목사) 김장환 소년은 임종덕을 아주 경계하는 눈초리로 보면서 “너는 도대체 누구냐 너는 무엇 때문에 여기왔느냐”며 매우 못 마땅한 표정으로 임종덕의 어깨를 툭툭쳤다.
그 이유는 자신이 일하는 이곳의 하우스보이 자리를 임종덕이 차지할려고 온 것으로 오해를 한 것이다. 그러나 잠시후 오해가 풀린 김장환은 임종덕에게 “너는 어떻게 장군의 하우스 보이가 되었느냐, 누구 빽이냐”며 너무나 궁금하다면서 계속 캐 물었다.
임종덕은 하는 수 없이 자신의 살아온 과거와 특히 장군과의 인연이 된 사건까지 다 말해 주었다.
임종덕의 말을 다 듣고난 김장환은 임종덕의 손목을 꼭 잡고 앞으로 좋은 친구가 되자며 격려를 해주었다.
그리고 자신도 하우스 보이가 된 사연을 간단하게 말했다. 즉 김장환이 동네 아이들과 지게를 지고 산에 나무를 하러 가는 길에 당시 수원형무소 근처에서 미군들의 야외 회식자리가 있었던 현장을 발견했다.
현장에는 민군들이 먹다 남은 각종 음식이 많이 있어서 김장환은 친구들과 함께 신나게 먹었다. 음식을 다 먹고 나자 한 친구가 흙 투성이가 된 미군 군화가 몇 켤레 있는 것을 보고 “저것도 가지고 가서 시장에 팔면 돈이 될 것이다”라고 하면서 가지고 가자고 했다. 그러나 김장환은 절대 반대했다.
“음식은 남은 것이니까 다 먹고 가도 되지만 군화는 가지고 가다 들키면 도둑놈으로 형무소에 간다”면서 적극 만류했다. 김장환은 친구들이 떠난후에도 혼자서 흙투성이가 된 군화들을 전부 깨끗이 닦아 가지런히 놓아 주고 일어섰다. 그때 뒤에서 누군가가 김장환 어깨를 쓰다듬어 주었다. 바로 미군이었다. 김장환은 이날의 인연으로 나무 지게꾼 소년에서 하루아침에 당장 수원의 미공군부대 하우스 보이가 된 것이다.
김장환의 얘기를 다 듣고난 임종덕은 마음 속으로 우리는 다 절도와 관련된 운명으로 하우스 보이가 되었구나 하면서 앞으로 자주 만나자고 했다.
김장환도 일요일이면 여중생들과 항상 모임이 있는데 너도 꼭 놀러 오라고 했다. 그후 임종덕은 일요일만 되면 초코렛과 온갖 과자를 가방에 가득히 넣고 김장환을 꼭 찾아갔다.
김장환을 꼭 찾아가는 첫째 목적은 여중생을 사귀기 위해서였다. 한편 김장환은 임종덕과의 우정이 깊어질 즈음 미국으로 건너간다. 하우스보이 제1호 출국이었다.
* 임종덕에게 본격적인 신앙과 교육을 위한 양아버지의 원대한 계획
1953년 어느 주일날 임종덕은 양아버지 화이트 장군과 함께 당시 여의도 비행장에 있는 미군 교회를 찾았다. 미군들의 예배가 끝나자 바로 한국 공군 장병들의 예배가 시작되었다. 이날 예배석 제일 앞줄에는 이승만 대통령과 김정열 국방장관, 김신 공군참모총장 그리고 화이트 장군과 그외 외국 고관들이 앉았다.
임종덕 소년은 이날 이승만 대통령을 처음으로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볼 수 있었다. 이 날의 설교를 맡은 한국 공군 군종감의 설교중 후반부의 설교가 임종덕의 마음을 울렁거리게 했다. “지금 이 나라는 온갖 부정부패의 척결을 단행하지 않으면 이 자유당의 정부는 오래가지 못할 것입니다.”……
자유당의 총재인 대통령에서부터 국방장관 그리고 군종감의 직속상관인 공군참모총장까지 앉아 있는 자리에서 새파란 20대의 청년 군종목사가 거침없이 설교를 해나갔다.
감수성이 예민했던 임종덕은 마음 속으로 “저 목사님은 오늘 당장 형무소 가겠구나”하고 걱정이 되었다. 그러나 예배가 끝나자 이승만 대통령은 강대상에서 내려온 군종목사를 덥석 안으면서 “아주 훌륭한 설교였소, 이 자리에 참석한 여러분들이 목사님의 설교를 모두가 다 깊히 생각하고 각자의 소임을 성실히 해 나가십시오”하면서 다시 군종목사의 손을 잡고 목사로서 애로 사항이 있다면 말해보라고 했다.
그래서 그는 특히 공군초대 군종감의 입장에서 제일 큰 애로사항으로 교회가 없어 미군 교회를 빌려쓰는데 하루빨리 우리공군도 자체 교회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이승만 박사는 앞으로 서울 대방동에 건설될 공군본부 건설 때 공군 교회부터 먼저 건축하라고 공군참모총장에게 지시했다.
이날의 설교를 했던 공군 군종감이 지금(2011년) 미국 LA의 동양선교교회 원로 목사인 임동선 목사다. 한편 임종덕 소년은 서울중학교를 졸업후 양아버지의 권유로 미국으로 가게 되었다. 그러나 처음에는 미국행을 극구 반대했다.
이유는 공산당에 의해 부모님의 그 처참한 현장을 목격했기 때문에 자신은 앞으로 군인이 되어 공산당을 타도 한다는 것이 그의 목표였다. 그러나 양아버지는 앞으로 미국에 가서 고등학교와 대학을 졸업하면 다시 군대에 가서 군인이 될 수 있다고 임종덕을 타일렀다.
한편 임종덕은 지금 양아버지께서 미국 본토로 근무지가 바뀌어서 곧 출국하는데 만일 아버지를 따라가지 않으면 자신은 또다시 고아 신세가 된다는 것은 뻔한 일이었다. 그래서 임종덕은 1953년 12월 김장환에 이어 하우스보이 제2호 입양아가 되어 미국으로 건너갔다. (계속)
※ 임종덕의 후반부 이야기 즉, 하바드대학 정치학 박사를 거쳐 월남전에 특수부대 그린베레로 참전 두번의 포로와 두 번의 탈출 그리고 생사의 마지막 갈림길에서 만난 하나님의 간증 이야기가 게재됨.
(글 김수호 : 안드레명상 발행인 주님의교회 협동장로)
이병식 장 로 (주님의 교회)
정재윤 장 로 (주님의 교회)
황의완 안수집사 (주님의 교회)
배홍자 권 사 (주님의 교회)
한득현 장 로 (길가에 교회)
최진성 장 로 (인천 장로 성가 단장)안드레명상 선교헌금안내
국민은행 268802-04-031127
(예금주 김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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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뉴스
2011-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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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드레명상 눈물로 얼룩진 나의 人生 노트 - 제103호 (2011.4.1발행)
안드레명상 눈물로 얼룩진 나의 人生 노트 - 제103호 (2011.4.1발행)
1981년 가을 우연히 기독교 방송을 듣고 있던 서울의 이금안이란 처녀는 한 남자가 겪고 있는 너무나도 딱한 처지의 방송을 듣고 충동을 받게 된다. 즉, 사지마비가 되어 밥도 먹여 주어야 하고 하루종일 누워서만 지내는 불쌍한 이 남자를 단 하루만이라도 도와주고 싶은 간절한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직장에 다니는 몸으로 특히 상대가 남자인지라 생각과 현실은 달랐다. 그래서 이금안은 그 불쌍한 남자를 위해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기 시작했다. 17세 때부터 교회에 나간 이금안은 직장의 휴가 때면 국내 큰 기도원을 순례하면서 부흥집회에 참가하여 신앙을 키워온 성숙한 믿음의 처녀였다.
이금안은 어느날 기도 중에 이 남자에게 위로의 편지라도 보냈으면 하는 생각이 나서 성경에 나오는 각종 소망의 글과 희망을 가지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편지를 보내자 금방 답장이 왔다.
내용은 77세된 노모의 보살핌으로 근근히 살아가고 있는데 지금은 그 노모마저 병이나서 자신을 도와줄 사람이 없어 이제는 그야말로 하루 하루가 절망 속에 지낸다고 했다. 그런데 이금안이 보낸 위로의 편지를 받아보고 다시 삶의 의욕이 생긴다고 강조했다. 이금안은 이때부터 그 환자를 위해서 더 열심히 기도를 했다.
특히 자신의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은 절망에 처한 그 환자를 불쌍히 여기시고 소망을 가지게 해 주셨다는 확신이 왔다. 그래서 이금안은 여러차례 편지를 주고 받은 후 82년 12월 11일 일주일간의 휴가를 내어 그 환자를 찾아 갔다. 전라북도 옥구군 옥산면, 버스를 네 번이나 바꿔타고 사지마비로 누워서 지낸다는 김정언氏를 물어 물어 찾아간 곳은 초라한 시골의 오두막 집이었다.
-26세 나이로 쓰러진 김정언의 기구한 인생
김정언은 공군본부 의장대 출신으로 신장 176cm의 건강한 남자였다. 그러나 제대후 제약회사에 다니던 1969년 갑자기 길에서 쓰러졌다.
병명은 강직성 척추염과 류마티즘성 관절염으로 몸 전체가 서서히 굳어가는 병이었다. 김정언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엄청난 병원 치료비로 인해 유복했던 가정은 파산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결국 김정언은 대전에서 직장생활을 정리하고 어머니와 함께 시골 고향집으로 내려갔다. 목에서부터 어깨, 허리, 엉덩이 관절을 비롯하여 손가락과 발가락의 마디관절 등 온 몸의 관절이 마치 나무 막대기처럼 굳어갔다.
밥도 떠 넣어 주어야 되며 대, 소변도 자리에 누운채로 보고 항문까지 딱아주어야 하는 그야말로 남의 도움이 없이는 도저히 살아갈 수 없는 신세가 되었다.
이 모든 힘든 일을 어머니가 해내고 있으며, 또한 어머니는 남의 집 농사일을 도와주고 그 품삯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어머니가 일거리를 찾아 아침에 나가면 저녁에 돌아올 때까지 그동안에 아들 김정언은 격렬한 통증에 고함을 지르며 울어댄다. 그러나 어느 누구 한사람 김정언의 몸을 주물러 줄 사람이 없었다. 그의 슬픈 울음 소리는 밤,낮 주야로 그칠날이 없었다.
드디어 나쁜 소문까지 퍼졌다. 즉, 김정언의 집에 귀신이 찾아와서 귀신이 우는 소리라고 했다. 특히 비가 내리는 밤에 김정언의 통증은 더 심해져서 울음 소리는 멀리까지 슬프게 들였다.
그래서 동네 사람들은 저녁이 되면 김정언의 집앞을 피해 지나갔다. 어쩌다 휘영천 둥근 보름달이 김정언의 오두막집 창문으로 보일때면 그는 지난날의 왕성했던 자신을 되돌아보며 잠시나마 아름다운 추억에 눈물이 젖는다.
군산 상고를 졸업하고 공군에 입대했는데, 우선 키가 크고(176cm) 체격이 좋다는 이유로 그는 공군본부 의장대로 차출되었다. 공군본부 의장대는 내외 귀빈이 참석하는 각종 행사에 자주 참가했는데, 그때마다 김정언은 의장대원이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했다.
둥근 보름달 빛이 창문에서 사라지면 김정언의 추억의 회상도 사라진다. “내가 어쩌다 이런 신세가 되어 버렸나” 김정언은 자신의 처지가 너무나 비관이 되어 세 번이나 자살을 기도했다.
잠을 못 잔다는 핑계로 수면제를 모아서 먹기 직전 어머니에게 들켰다. 그리고 전기줄을 합선 감전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또 한번은 벽에 머리를 박치기를하여 뇌진탕으로 죽겠다고 시도했으나 역(力)부족으로 피만 흘리고 실패했다. 이렇게 해서 김정언의 모진 생명의 고통은 13년이 흘러갔다.
특히 80을 바라보는 노모가 가끔 몸이 아파 앓고 있을 때는 김정언의 깊은 한숨소리는 노모의 마음을 더 아프게 한다. “이놈아 어쩌든지 같은 날 같은 시간에 내하고 같이 죽어야지 너 때문에 내혼자 죽고 싶어도 죽을 수가 없다”……
-김정언 앞에 나타난 천사 이금안 처녀
김정언의 오두막집을 찾아온 이금안은 침대에 반듯이 누워 있는 김정언을 처음보는 순간 공포와 무서움에 떨기 시작했다. 긴머리는 김정언의 얼굴을 덮고 있었다. 또한 머리는 먼지와 비듬으로 찌들어 있었고 얼굴은 심한 피부병으로(열상) 퍼져 있었다. 방의 천장은 온통 거미줄로 뒤덮혀 마치 모기장을 쳐놓은 것 같았다. 거기에다 대,소변을 제때 처리를 못해 방안은 흉칙한 냄새로 가득찼다.
이금안은 기막힌 이 현장 앞에서 잠시 넋을 잃고 있었다. 당장 도망치듯 뛰쳐나가야 할지? 그러나 이금안은 우선 방바닥에 꿇어앉았다. 그리고 하나님께 속삭이듯 기도를 했다. “하나님 저분의 저 추함과 흉함도 사랑할 수 있게 해 주세요”……
기도가 끝나고 몇분쯤 지났을 때 조금전 그 무서움과 두려움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김정언에 대한 불쌍한 마음과 함께 앞으로 며칠간이나마 이 남자에게 열심히 봉사를 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금안은 바로 이 생각이 지금 하나님께서 내 마음을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금안은 우선 방안의 대청소를 시작했다. 그리고 뒤이어 김정언의 긴머리를 짜르고 면도를 한 다음 김정언의 몸을 닦기 시작했다.
김정언은 자신의 몸을 닦는 이금안을 보고 이것은 꿈에서나 있을 것 같은 일이 지금 자신의 눈앞에서 전개되고 있으니 이 처녀가 혹시 하늘에서 내려온 즉 말로서만 들었던 바로 그 천사가 아닌가 하고 순간 두려움도 느겼다.……
방안의 대청소와 목욕이 끝나자 이금안은 가정 예배를 드렸다. 찬송가 책을 김정언과 함께 보면서 찬송을 같이 불렀다. 저녁 때가 되어 일을 마치고 돌아온 어머님은 완전 새롭게 변화된 집안 분위기를 보고 나서 이금안을 빤히 쳐다보았다.
혹시 이 처녀가 정신 이상자는 아닌가? 또는 청소 해주고 돈이나 뜯어갈 사람은 아닌가? 이금안은 손수 저녁밥을 지어 김정언에게 먹여주고 밤에는 이미 굳어져 버린 김정언의 전신을 2시간 가량 마사지를 해주었다.
-“나는 살고 싶습니다” 김정언의 눈물의 청혼
이금안의 휴가가 다 끝나갈 무렵 즉 5일째 되던날 밤 예배를 드리고 나서 김정언은 이금안에게 뜻밖의 말을 했다. “이미 오래전에 인생을 다 포기하고 하루빨리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었는데 당신을 만나보니 나도 살고 싶은 의욕이 생겼습니다.
저와 함께 이 곳에서 같이 살아 주십시오”…… 바로 이금안에게 청혼을 한 것이다. 마치 어린아이처럼 울면서 청혼을 하는 김정언의 모습을 바라본 이금안은 충격과 함께 당황했다.
사실 이금안은 김정언과의 결혼이란 꿈에서도 생각할 수 없는 일이요, 오직 이번 직장 휴가는 평생을 두고 가장 보람있고 잊을 수 없는 봉사 활동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이날밤 김정언이 잠든 시간에 이금안은 하나님께 김정언을 위한 간절한 기도를 하게 되었다.
긴 기도 시간이 끝나고 깊이 잠든 김정언의 얼굴을 바라보는 순간 이금안은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주룩주룩 흘렀다. 며칠을 봉사해 봤지만 이 남자는 남의 도움 없이는 이제 도저히 생명을 유지하기에는 한계점에 와 있다는 것을 느꼈다.
26세의 청년이 병마에 시달려 온지 13년 그의 나이 39세, 이금안은 39세의 김정언이 아직 인생을 포기하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나이라고 생각했다. 이금안은 눈물 속에 다시 기도를 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한알의 밀알이 썩어져야만 그 결실이 더 많아지고 풍성해진다고 했습니다.
나를 이 세상에 보내주어 연약한 자를 도울 수 있겠끔 건강을 주신 것을 우선 감사드립니다. 주님도 보셨습니다. 송장처럼 누워서 지내는 저 사람을 위해서 내가 봉사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네 이웃을 네몸 같이 사랑하라고 하신 주님, 병들고 추하고 송장처럼 누워 있는 저 불쌍한 김정언씨를 내가 꼭 도와 주어야 하며, 그리고 저 분을 사랑해야만 나도 진실한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일주일간의 휴가가 끝나고 서울로 오던날 이금안은 김정언에게 직장과 여러 가지를 정리하고 다시 오겠다고 작별 인사를 했다.
그런데 다시 오겠다는 말을 듣는 순간 김정언은 놀란 표정으로 “하나님 앞에 지금 약속하십시오” 하고 다그쳤다. 이금안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눈물로 범벅이된 김정언의 얼굴을 닦아주며 꼭 잡고 있던 손을 억지로 떼고 방문을 나섰다.
-길고도 먼 시련과 고난의 길로 들어선 이금안
서울에온 이금안은 어머니에게 직장을 군산의 좋은 곳으로 옮기게 되었다고 거짓말을 했다. 몸은 서울에 있어도 온갖 고통을 겪으며 지낼 김정언을 생각하면 이금안의 마음은 이미 시골 김정언에게 가 있었다.
이금안이 2개월만에 다시 시골로 내려 오던날 마치 시집간 새색시가 친정집을 가는 것처럼 기쁨이 넘쳤다. 이금안은 이 기쁜 마음이 바로 하나님이 주신다는 것을 즉각 알았다.
2개월만에 이금안을 맞이하는 김정언은 감격의 눈물을 흘리면서 계속 울었다.
불치의 병마에 지친 몸, 거기에다 음식을 제때에 못먹어 뼈와 가죽만 남은 김정언의 몸은 마치 아프리카의 어느 민족을 연상케 했다.
이금안은 먼저 김정언의 굳어져 버린 각종 관절을 주무르는 일에 전력을 다했다. 그동안 정부에서 두 모자에게 주는 양곡과 그리고 노모가 남의 일을 해주고 몇푼씩 받는 돈으로 근근히 살아왔다. 그래서 이금안은 우선적으로 생계문제 해결에 발벗고 나섰다.
당장 먼저 시작한 것이 십자수와 쉐타에 꽃무늬 놓는 일이었다. 환자 곁을 잠시라도 비울 수가 없는 처지라 항상 환자 가까이에서 일을 했다.
그러다가 동네 이웃집을 찾아 다니며 일거리를 맡아 한푼 두푼모아 환자의 약값에 보탰다. 어쩌다 수입이 좋은 날은 동태를 사다가 찌개를 끓여 남편에게 먹여주면 남편은 너무나 오랜만에 먹는 동태찌개라면서 정말 고맙다고 하면서 항상 찡그린 얼굴만 보이다가 그때만은 얼굴에 함박꽃이 된다.
이금안이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면서 내 한몸의 노력으로 꺼져가는 저 불쌍한 생명이 동태찌개 하나로도 저토록 행복해 하는 모습에 기쁨을 느꼈다. 식물인간처럼 지내는 남편을 지극 정성으로 모시는 이금안에 대한 소문이 동네에 금방 퍼져 나갔다.
한쪽에서는 하늘에서 보내준 천사라고 하면서 영화나 소설에서나 볼 수 있는 처녀라고 말했으며, 또 한쪽에서는 과연 저 서울 아가씨가 며칠이나 살 수 있을까? 왜 저렇게 예쁜 아가씨가 이제 얼마 안 있으면 죽게될 남자에게 저렇게 열성을 다해 보살펴 줄까?
이금안은 그들의 말에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일편단심으로 남편을 보살피며 오직 하나님께만 의지하면서 특히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동네 사람들에게 자신의 행동으로 보여주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이금안에 대한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은 마을사람들에게 크게 퍼졌다. 드디어 생각지도 않는 전도의 기류가 흐르기 시작하여 이웃 동네까지 복음이 전파되어 작은 시골교회가 갑자기 부흥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기도원 원장이 마련해 준 눈물의 결혼식
이금안은 남편에게 좀더 확실하고 깊은 신앙을 심어주고 싶어 남편을 트럭에 싣고 부흥회가 열리고 있는 호렙산 기도원을 찾았다. 남편은 목을 움직일 수 없고 허리도 꾸부릴 수 없기 때문에 택시를 탈수가 없다.
그래서 마치 시체를 담은 관처럼 침대에 누운 그대로 트럭에다 싣고 갔다.
퍽 오랜만에 기도원을 찾은 이금안의 마음은 금방 뜨거워졌고 남편을 위한 40일 철야기도에 들어갔는데, 첫날부터 이금안은 은빛 찬란한 십자가의 환상을 보고 섬짖놀라기도 했다. 이금안은 하나님께 우선 남편의 건강을 위해 간절히 기도했다.
지금 꺼져가는 저 생명을 연장시켜 주시고 그리고 남편이 벌떡 일어나게 해달라고 했다. 수백명의 성도들이 일사분란하게 찬송을 부르고 또 통성기도를 하고 있는 모습을 멀리 한쪽 구석에서 보고 있는 남편 김정언은 너무나 생소한 광경에 얼떨떨하고 있었다.
어느날 기도원 백성애 원장이 이금안에게 찾아와 침대 에 누운 사람과 어떤 관계이냐고 물었다. 기도원 원장은 이 두사람이 너무나 가련하고 불쌍해 보였기 때문이다. 이금안으로부터 자초지종(自初至終) 이야기를 다 듣고난 기도원장은 이금안을 친딸처럼 껴안고 위로를 해 주었다.
며칠이 지난 후 백성애 기도원장은 이금안을 불렀다. 기도원장은 당신들을 위해 기도를 했는데, 신랑은 침대에 누워 있고 그 곁에 신부가 서서 결혼식을 올리는 장면을 하나님께서 선명하게 환상을 보여 주셨다면서 이금안에게 저 불쌍한 불구의 남자와 혹시 결혼식을 하겠느냐고 다시한번 확인하는 것이다.
이금안은 두말 없이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백성애 기도원장은 결혼식때 신랑 신부가 입을 한복 두벌에 금반지와 음식까지 장만했다.
기도원에 온지 16일만에 거행된 이날 결혼식엔 남편은 병원용 침대에 누운채 고향 친구들에 의해 식장에 입장했고, 신부 이금안은 그를 데리고 입장할 일가친척 한사람도 없어 외로이 서 있었는데 그때 어떤 장로가 나와 신부 입장을 시켜주었다.
침대에 누워 있는 신랑 옆에 선 신부는 예식이 진행되는 동안 소리없이 울고 있었다.
부흥회에 참석한 오백여명의 성도들은 이 희안한 결혼식을 보고 특히 신부가 너무나 불쌍해서 어느 누구의 제의도 없었는데, 모두가 각자 천원씩을 축의금으로 내면서 눈시울을 적시고 있었다.
특히 예물 교환때 신랑이 손을 쓸수가 없기 때문에 기도원 원장이 신랑 대신 신부에게 금반지를 손가락에 끼워주었다. 이날의 결혼식에서 이금안은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에 의해서 자신의 결혼식을 하게된 것에
대해 하나님께 뜨거운 감사 기도를 드렸다.
이금안은 만일 이때 결혼식을 올리지 못했다면 자신들의 처지나 형편으로는 지금까지도 결혼식을 못 올리고 살았을 것이라고 회고했다. 한편 당시 여러 기관에서 이금안에 대한 소문을 듣고 그에게 표창을 주었으며, 특히 결혼을 앞둔 예비 부부들이 이금안을 찾아와 깊은 감동을 받았다고 했다.
또 한가지 특이한 일은 이 동네 젊은 부부들의 싸움이 일체 없어졌다고 한다. 즉 이금안 부부의 사는 모습을 보노라면 싸울 이유가 없어진다고 했다.
한편 이금안의 소문은 서울의 친정집에도 알려져서 어느날 어머님과 남동생이 찾아왔다.
식물인간처럼 누워 있는 김정언의 모습을 본 이들은 한탄을 하면서 이금안을 밖으로 불러내어 무조건 서울로 가자고 했다.
이금안은 먼저 어머니께 용서를 빈다음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고 지금도 그날의 했던 말은 기억하고 있었다. “만약 어머니의 자식 중에 이러한 사람이 있는데 저처럼 누군가가 보살펴 주겠다고 하면 그 얼마나 고마운 일입니까? 우리 인간의 생명은 누구나 다 소중한데 이러한 사람을 너도 나도 외면해 버리면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눈물로 애원하는 딸의 말을 다 듣고난 어머니는 긴 한숨을 쉬고난 뒤 그럼 기왕 어려운 결심을 했으니 너의 인생을 너가 책임지고 그리고 고생이 되겠지만 세상에 귀감이 되는 딸이 되어 살아가라고 짧은 말한마디를 남기고 서울로 갔다.
-보석처럼 빛나는 하나님의 선물
세상 사람들의 예상을 뒤엎고 이들 가정에는 아들과 딸이 태어났다. 아이들이 성장하면서 날이 갈수록 살림살이는 더 어려워졌다.
그래서 이금안은 어느날 중대한 결정을 내렸다. 즉 하나님이 선물로 준 이 귀한 아들과 딸을 제대로 키우고 교육시킬려면 시골에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느끼고 군산으로 이사를 왔다.
새벽 4시에 일어나서 학교 청소에서부터 건물 청소 등 닥치는대로 일을 하면서, 아이들의 교육비와 남편의 약값을 만들어 나갔다. 한편 서울 친정에서는 남편 때문에 친정 발걸음이 끊어진 것이 안타까워 남동생이 서울 영등포 양평동에 30평 규모의 아파트를 얻어 주어 2010년에 이사를 왔다. 그리고 아파트 근처 부동산 사무실에 취직까지 했다.
지난 2월말 (2011년) 부동산 사무실에서 필자와 만난 이금안은 가족들의 근황을 자세히 알려주었다. 결혼할 때 39세였던 남편 김정언은 지금은 69세(2011년)의 노인이 디어 43년을 누워서 지내고 있으며, 29세된 딸과 27세의 아들은 직장에 다닌다고 했다.
그리고 24세에 시집온지 30년 그동안 새색시 이금안도 그의 나이 55세가 되었는데 주위에서는 그의 모습이 탈랜트 고두심을 닮았다고 한다.
시집올 때 77세의 시어머니는 90세로 세상을 떠나면서 이금안의 손을 꼭잡고 말 한마디를 남기고 눈을 감았다. “고마웠다”…
아파트가 사무실 근처에 있어서 두시간마다 집에가서 남편의 몸을 마사지하고 그리고 식사도 챙겨 준다고 했다. 이금안의 필사의 노력으로 건강도 좋아져서 특히 손가락이 호전되어 지금은 TV 리모콘 작동과 전화도 받을 수 있다고 한다.
현재 출석하는 교회는 양평동의 영은교회(고일호목사)인테 주일날 아들과 딸을 양쪽에 세우고 함께 교회로 갈때마다 이금안은 잠시 회상에 잠긴다. 이 아이들을 임신 했을 때마다 영양실조로 몇차례씩 쓰러지기도 했으며, 한밤중에 남편이 위독할 때는 아기를 업언체 약을 구하러 추운 겨울 밤길을 걸었다.
특히 겨울철 땔감 나무를 구하기 위해 임신 7개월의 무거운 몸을 이끌고 산에 올라가 가시덤불과 억새풀을 짤라다 날랐다. 또한 일감을 구하기 위해 당시 버스비 340원을 아끼려고 아기를 업은채 하염없이 걸어 다녔다.
그러나 그 힘들었던 일들도 하나님께서 자신을 항상 보살펴 주셨기 때문에 그 아이들이 지금 이만큼 훌륭하게 성장했다고 한다. 한편 이금안의 인생에 시련과 두려움 그리고 고통과 절망감이 엄습해 올 때마다 그는 성경 이사야 41장 10절을 가슴에 품고 오직 하나님을 믿었다고 한다. 『
두려워 하지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글 김수호:안드레명상 발행인 주님의 교회 협동장로)
※ 그동안 안드레명상 독자들에게 발송된 편지 봉투의 주소 표기가 이번부터 깨끗하게 변모되었습니다
즉 과거의 주소는 필자가 자필로 쓴 주소 원본을 그때마다 복사해서 그 것을 다시 일일이 가위로 짤라 풀로 부쳤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정을 안타깝게 생각한 전 KBS TV 기술국장 김영호 독자께서 주소록을 라벨로 제작해 주셨습니다.
이로 인해 안드레명상 발송 작업이 한결 쉬어졌습니다.
김영호 독자님의 그 정성어린 협조에 경의를 표합니다.
이병식 장로 (주님의 교회)
이병식 장로 (주님의 교회)
류석우 장로 (주님의 교회)
인태오 장로 (상도성결교회)
김승기 장로 (길가에 교회)
강석인 집사 (주님의 교회)
박혜원 권사 (주님의 교회)
이동명 권사 (주님의 교회)
권석자 집사 (주님의 교회)
정선화 집사 (샬롬찬양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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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뉴스
2011-04-27
-
전 문화부장관 이어령을 기독교인으로 만든 딸 이민아
월드뉴스
2011-01-14
-
2011 신묘년 새해인사
신묘년 새해가
창공너머로 밝았다.
고개를 든다.
하늘을 올려다보기 위함이다.
고개를 숙인다.
땅을 내려다보기 위함이다.
숙이면 저 자세히 볼 수 있는 것이다.
여명이 차갑다.
여명이 매개가 되어 어둠이 물러간다.
어둠이 저 만치 다 물러간 줄 알았는데,
아직 못 다한 미련이 남았는가 보다.
해 바뀜의 미련이 그러한가 보다.
마음인 것이다.
세상의 일들이 다 그렇다.
마음을 먹기에 따라서 희노애락이 정하여 진다.
물질이 아니라,
사물이 아니라,
마음이 정하는 것이다.
경인년 지난해에 속상한 것이 있었더라도,
올 해는 마음을 다독여 다 풀 수가 있는 것이다.
마음이 사람을 견디게 하는 것이다.
깊은 웅덩이에 빠져서,
하늘을 올려다보면 깜깜한 어둠이다.
올라가는 것이 힘들어도,
내려오는 빛 한 점만 있다면 희망이 된다.
절망에 지쳐 쓰르륵 졸리다가도,
위에서 내려오는 빛이 있어 견디어 낸다.
물질은 그 호가로 반응하는 것이지만,
마음은 그렇게 사소한 것에도 감동을 한다.
그러니 마음을 전하는 것이 제일인 것이다.
행여 머뭇거리다가 마음전하는 것을 놓치면,
더는 망설이지 말고 다음에라도 전하면 되는 것이다.
지난 시간은 아름답다.
하얀 점이 되어 지상으로 내리는 눈이다.
삶이란 그렇게 무수히 내리면서 명멸한다.
그러하니,
사라지기전에 더 많이 베풀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하니,
그 짧음의 시간에 타인을 더 많이 배려하여야 하는 것이다.
새해에 기원을 한다.
선행이 더 많이 통하기를,
악행이 사그러 들기를,
선행이 만드는 보람은 적고,
악행이 이끄는 상처는 크게 된다.
이편과 저편이 있듯,
대차대조표에 그렇게 그려지는 것이다.
생각을 한다.
조용할 때에 무엇을 할까?
편안한 사람이라면 돌이켜 본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선한 심성을 키운다.
건강한 사회란 그렇게 작동되는 것이다.
조용할 때에 사회가 더 밝아지는 것이다.
그러나
얕은 사람은 꼼수를 부린다.
약은 사람은 자신의 이익만을 획책한다.
그리하여 다른 사람에게 없는 말로 상처를 준다.
그리하여 자기보다 더 행복한 사람에게 흠집을 낸다.
그리하여 긍정의 사회를 위해 일하는 사람의 뒷다리를 잡는다.
얕음으로
술수로
잔꾀로 다른 누군가에 상처를 주고서도 못 뉘우친다.
그 상처받은 상대는 오래 잊지 않는 것이다.
꼼수를 써서 작은 이익을 챙기는 마음이,
남에게 타격을 입히더라도 자신은 빠져나가는 말이,
좁은 속내이기에 포용하지 못하는 작은 그릇이,
앞으로 나아가야 할 사회를 많이 퇴행시킨다.
악의 결집은 집요하다.
드러나면 안 되기에 감추어야 할 것이 많고,
부끄러운 것이기에 속으로 지켜내야 할 것이 많고,
추한 행태가 되는 것이기에 더 많은 동조자를 만들어야 하고,
그 악순환이 사회를 멍들게 하는 것이다.
그 악순환이 선순환에 큰 상처를 주는 것이다.
선함이 외로운 것이다.
악순환의 반격에 힘겨운 것이지만,
악순환의 흔들어 제침에 버거운 것이지만,
선함은 그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된다.
누군가를 대신하여 행하여 준다는 건,
사회가 그 만큼 밝아진다는 의미이다.
누군가를 대신하여 욕을 얻어먹는다는 건,
다른 누군가가 그로 인하여 아량이 커진다.
사람이 사람을 괴롭히고,
사람이 사람을 시기하고,
사람이 사람을 가만두지 않고
잘하려는 것을 건드리고,
잘되고 있는 것의 뒷다리를 잡고,
생트집으로 발목을 잡는 사회는 선진으로 나아갈 수 없다.
참으로 많이 염려가 되는 우리 사회풍토이다.
나이가 들고
지식이 늘고
사회경험이 쌓여 주관적 생각을 할 수 있음에도,
우선 편하려고 그렇게 악순환에 부화뇌동하는가 보다.
국가든
사회든 선진이 되기 위하여서는,
잘하려고 하는 사람에게 박수를 보내야 한다.
그도 싫으면 적어도 할 수 있게 그냥 두어야 한다.
약은 수는.
그것이 폭발력을 가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사회의 주류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사회를 부정적인 방향으로 이끈다.
부정의라 하여도 그들에겐 이익이 되는 것이니,
약은 것에는 쉽게 타협이 되어 무리를 만들게 된다.
그리하여 올곧은 다른 사람들이 상처를 받는 꼼수가 판을 치게 되는 것이다.
산을 오른다.
그 거대한 산의 영역 어디에 악행이 있는가.
그 존재의 어느 틈새에 악행이 스며들 수 있는가.
그 무엇이라 하더라도 인간의 하소연을 다 들어주는 산이다.
산은 그 넓은 품을 벌려서 인간의 것들을 다 받아주는 것이다.
큰산을 오르던,
야산을 오르던,
그것은 결국 내려오기 위한 것이니 멋지다.
사는 것이란 결국 내려놓기 위한 것이다.
산에 오르면,
가까이 보지 않고 멀리 보게 된다.
안만 살피지 않고 바깥도 살피게 된다.
꽁꽁 얼었다하여서,
생명이 다 숨죽이는 것이 아니듯,
혹한이라 하여서,
걸음을 멈추지 않듯,
또 선한 행함의 발걸음으로 뛰어가야 하는 것이다.
사람의 사는 것이란,
역경이라 하여도
곤경이라 하여도
힘듬이라 하여도
어려움이 하여도
서로가 마음으로 응원하고 마음으로 뭉치면 극복하기가 쉬운 것이다.
넘어지면 어떠랴.
의연하게 일어서면 되는 것을,
흙투성이면 어떠랴.
툭툭 털고서 가든 길을 가면 되는 것을,
우리를 생각한다.
‘함께’의 의미이다.
'가둠'이 또 다른 의미이다.
함께하되 가두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생각을 가두면 자기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마음을 가두면 타인에게 문을 열수가 없게 된다.
어울려 가는 것은 멋지다.
더불어 가는 것은 멋지다.
혼자가 아니라 우리가 되어 함께 가면 더 멋진 세상이 된다.
2011년 신묘년 새해,
태양이 붉게 떠오른다.
그 처음에는 한 점이었다.
한 점 붉음을 내밀어 온 세상을 다 비춘다.
선한 행함이 설사 온 세상을 그렇게 다 비추지 못한다 하더라도,
사라지지 않고 한 점의 빛으로만 남아있다 하더라도,
선함과 베품의 행함은 거대한 수레바퀴가 되어 세상의 지축을 울리는 것이다.
그런 신묘년 새해를 염원한다.
정극원 취재기자
2010-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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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축 살 처분이 최악의 불행 일수도
인간사회가 저질은 총체적 공해로 인한 지구촌 온난화 현상은 결국 가축에게까지 구제역이라는 엄청난 전염병으로 농민들에게 큰 시름을 안겨주고 있다.
나라별로는 구제역이 발생할 때 마다 육류반출이 차단되고 해당육류는 금식조치 되고있다.
만약에 구제역에 걸린 가축들의 육류를 사람이 먹은후에 2차 전염이 우려되기 때문에 위기관리차원에서 해당 가축들을 살처분 하고 있지만 지금의 살처분 방법은 가축을 직접 길러온 농민들과 온 국민들 입장에서는 아깝다는 생각과 더불어 안타까운 마음이 앞선다.
또 모든 생명력에는 스스로 해결하려는 자생력이 있는데 살 처분 만이 상책이라고 보면 뭔가 석연치 않는 점이 있고이문제야 말로 인간이 풀어야 할 당면과제가 아닌가 생각된다.
여기서 한가지 제안을 한다면 모든 가축을 살처분해서 땅에 묻기보다는 이때에 일정한 장소로 모아놓고 외부와 철저히 차단한채 치료과정을 거치면서 백신개발의 결정적인 기회로 삼았으면 바라는 희망을 품게된다.
정기보 취재기자
2010-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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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쿨, 과연 애물단지인가
2012년부터 로스쿨 졸업생이 변호사 자격을 취득하여 법조시장에 진출한다.
혹자는 실력이 모자라 걱정이라 하고 로스쿨 교육이 미흡하여 그들을 어떻게 믿고 채용하겠냐며 많은 우려를 표해왔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는, 로스쿨 교육 목표와 제도도입 배경 등을 간과한 평가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비판론자들의 주장에 따른다면 IT, 의료, 전문건설현장 등에서 발생하는 각종 사안에 대해 법학 중심의 교육을 받고 사법시험에 합격한 이들이 모두 잘 해결할 수 있어야 했다. 그러나 과연 그러했던가를 생각한다면 이러한 비판은 타당성이 크게 떨어진다. 한 마디로 설득력이 많이 약하다는 것이다.
오히려 학부에서, 그리고 졸업후 직장에서 다양한 전문적 실무경험을 한 비법학도 출신자(미수자)들이 훨씬 장래에 희망이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다만, 그들이 당면한 현안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과제이긴 하지만 말이다.
당면과제라 함은 주지하듯이 변호사시험 합격을 의미한다.
그들에게 가장 어려운 것이 법학기수자나 사법시험을 준비했던 학생들이 4년 이상 선행학습해 온 법학에 대한 전반적 체계와 내용에 대한 부족함을 우선적으로 메우는 일이다. 실제로 로스쿨에서도 그런 선행학습 부족이 교육에 가장 큰 어려움을 가져오게 하고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이들이 졸업 첫 해에 합격하지 못한다는 등식은 성립될 수 없다.
혹여 한 두 해를 꿇어 변호사시험에 합격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창피한 일이라고도 할 수 없다. 그 다음에 맞이할 그들의 든든한 전문성을 변호사 활동에서 충분히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전문성은 로스쿨 재학중에 배양할 수도 있고 이미 개별 전공 학부에서 키워왔을 수도 있다. 그것은 어마어마한 재산일 수밖에 없다. 이들의 '전문성'이라는 자산은 기성 변호사들이나 법학기수자 변호사들에게는 엄청난 위협적 무기로 기능하게 된다.
그렇기에 소송기술, 법리적 사고와 해석에 다소 모자란다고 하여 이들을 불안하다고 하거나 수준이 떨어진다는 비판은 하지 않는 것이 옳다고 본다. 그러한 비판은 곧 그들의 전문성에 바탕한 법조시장 진출을 두려워한다는 것의 다른 표현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걱정해야 할 이는 기성 변호사들이다.
즉, 법학기수자 중심의 변호사시장에서조차 견뎌내지 못하거나 견뎌낼 수 없는 기성 변호사들이다. 경쟁력이 약한 기성 변호사들이다. 그들이 더욱 로스쿨 출신자들의 실력과 능력을 믿지 못하겠다고 떠들고 있다.
이제 그들은 시급하게 국제화를 시도해야 하고 나름의 고유한 전문성을 차곡차곡 키워나가야 한다. 그래야만 그들도 살 수 있고 남아날 수 있다. 자기 스스로 경쟁력을 갖추지 못하고 있으면서 오히려 로스쿨 출신자들이 실력이 없다는 말로 매도해서는 안된다. 기성 법조인들이 느끼는 로스쿨 출신자들로부터 받는 위협, 그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말이다.
벌써 그러한 조짐이 일고 있지 않은가.
조금 전에 접한 "입사 6개월 변호사도 퇴출" 제하의 한 기사(매경닷컴)는 이러한 전조를 보여준다. 그 요지는 한 마디로 말하자면, 로펌에서도 실적 낮은 소속 변호사들에게 전례 없는 퇴사조치를 취하거나 성과급 미지급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곧 배운대로 해왔고 새로운 영역에 대한 개척을 하지 않고 현실에 안주해 온 기성변호사들의 현실이다. 이것으로 그치지 않고 이러한 현상은 더욱 확대될 것이고 가속화될 가능성이 높다.
기성 변호사들도 공부해야 한다.
변호사는 법에 관련된 모든 문제를 척척 해결해낼 수 있는 '만능(萬能)'법조인이 아니라는 것은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 사회에서도 변호사는 모든 분야의 문제를 다 해결해내는 해결사라는 '환상(幻想)'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런 잘못된 자각과 환상이 그들을 더욱 망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제 앞으로 배출될 로스쿨 출신 변호사들을 무조건 실력없다 매도하지 말고, 공생하여 국가와 사회에 보다 크게 기여할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하기를 기대해 본다.
신봉기 취재기자
2010-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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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천 팔봉산
정극원 취재기자
2010-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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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백정(白丁) 제도를 폐지시킨 하나님의 역사
백정은 구 한말까지 5백년간을 일평생 천대만 받으며 살았다. 우선 머리에 상투를 못하게 했고 또한 머리카락을 다듬지(이발) 못하게 할 뿐만 아니라, 봉두 난발을(머리카락을 쑥대 밭처럼 엉크러짐)해야 한다. 또한 갓이나 망건을 못쓰게 했으며 도포도 못입게 했다.
특히 백정은 호적에도 못 올리며 나라의 인구조사에도 제외시켜서 사실상 거지보다 못한 최하층의 사람들이었다. 특히 슬픈 일은 백정은 죽어도 상여를 사용못하며 시신은 지게에 지고 산으로 가서 묻었다.
또한 자녀들이 결혼할 때는 가마를 탈수가 없기 때문에 아버지가 신부를 업고 시집을 가야했다. 특히 백정은 아무리 돈이 있어도 집을 건축할 때 기와를 얹지 못하게 했다.
길거리에서 양반이 지나가면 백정은 즉시 땅바닥에 엎드려 고개를 숙여야 한다. 당시 양반들은 나라에서 각종 좋은 혜택을 받으며, 과거 시험도 보며 병역은 물론, 세금과 부역을 면제 받았다.
그러나 간혹 양반이라도 죄를 지으면 가벼운 회초리 몇대만 맞고 큰 몽둥이로 때리는 매는 자기집 머슴이 대신 육모 몽둥이로 맞아준다. 또한 백정이 정부 관리로부터 몽둥이로 맞아 죽는다 해도 그것을 하소연 할 수가 없는 그야말로 인권이란 말 자체가 없었다.
이러한 인간 이하의 멸시 천대를 받으며 500년간을 살아온 백정들이 구 한말 교회 출석 1년만에 장로 선거에서 양반을 누르고 장로가 되었다.그가 바로 백정 장로 박성춘이다. 백정 박성춘이 장로가 되기까지 그 파란만장의 생애를 보면 바로 하나님의 위대한 섭리와 역사가 있었다는 것은 직감할 수 있다.
박성춘은 1862년 서울 관자골 지금의 종로구 관훈동에서 백정의 아들로 태어나 한번 백정은 죽을 때까지 백정이기 때문에 백정의 딸과 결혼 백정 아들을 낳았다. 박성춘은 소를 도살해 주고 수고비를 받아서 살아가는 어려운 가정이었다.
박성춘의 가정이 풍지박살이 난 것은 허가 받지 않는 소를 몰래 잡아 주었다는 이유로 군관과 포졸들이 박성춘을 체포할 때, 그의 부인이 결사적으로 막으려다 그들이 휘두르는 육모 방망이에 맞아 죽었다.
그리고 며칠후 둘째 아들까지 병으로 사망하자, 박성춘은 큰아들 봉출이 만은 천추의 한이 되었던 백정으로서 멸시천대를 면하게 하기 위해서 공부를 시키기로 했다.
그래서 아들을 데리고 당시 교회 안에서 아이들을 무료로 가르친다는 소문을 듣고 지금의 서울 을지로에 있던 곤당골교회 예수교 학당을 찾았다. 박성춘은 학교에 대해 조건을 달았다. 즉, 내아들 봉출이를 무료로 공부시켜 주는 것은 대단히 고맙지만, 아들을 주일 예배에는 보내지 않겠다고 했다.
이렇게 해서 아들 봉출이는 대대로 내려온 이 백정 집안에서 처음으로 학생이 되었고, 학교에서는 봉출이의 이름을 서양(瑞陽) 즉 상스러운 태양이란 뜻에서 박서양이라고 새로 지어 주었다.
박서양은 열심히 공부하여 모범학생이 되었고 선생님들은 서양이가 비록 백정의 아들이지만 성품이 바르고 오직 공부에만 열중하는 것을 보고 서양이를 친자식처럼 보살폈다. 이때가 1894년 동학운동이 일어나고 청일전쟁이 터져 구 한말 조선반도는 열강들의 전쟁의 먹구름이 덮고 있었다.
한편 1892년 미국 북장로교의 파송으로 사무엘 포먼 무어 선교사가 인천 제물포항에 도착 본격적인 선교 활동에 들어갔다. 그가 처음 노방전도를 한 곳은 지금 서울시청앞 롯데호텔 부근인 곤당골이었다.
이 지역에서 매일같이 열심히 전도지를 나누어주면서 16명의 결신자를 모우고 곤당골 교회라는 간판을 걸고 첫 예배를 드린 날자가 1893년 3월 19일이었다. 이곳 곤당골 지역에도 백정들이 많이 살고 있어서 무어 선교사는 특별히 백정들에게 더 많은 전도 활동을 했다.
한편 1894년 당시 전국에서 콜레라가 번지기 시작 하루 3백명씩 죽어갔다. 안타깝게도 박서양의 아버지 박성춘도 이 무서운 전염병에 걸려 곧 죽게 된다는 소문이 학교에 퍼지자, 외국인 선교사 두 사람이 박서양을 앞세우고 박성춘을 찾아갔다.
두 사람의 선교사는 곤당골 교회의 무어 목사와 고종황제의 주치의였던 에비슨 박사였다. 이 분들의 치료로 박성춘은 기적적으로 생명을 건졌다.
특히 박성춘이 기절초풍할 정도로 놀란 것은 어떻게 감히 고종황제의 주치의가 짐승보다 못한 취급을 받는 백정의 초라한 집까지 친히 찾아와서 진료를 해준다는 것은 꿈도 꿀 수없는 것이었다.
박성춘은 며칠후 아들 서양이가 다니는 예수교 학당을 찾아가서 이제부터 아들을 주일 예배에 참석시켜 달라고 했으며, 아울러 자신도 예수교 학당에서 공부를 하겠다고 했다.
이렇게 해서 박성춘은 글을 배워 성경을 탐독하면서 신실한 기독교인으로 그의 인생관은 하루가 다르게 변모되어 갔다. 그가 출석하던 곤당골 교회는 양반들과 정부관리 그리고 백정들도 많이 참석하여 교회는 날로 부흥했다.
양반 성도들이 “백정들과 함께 예배를 드릴 수 없다” 양반들과 정부 관리들은 백정들과 한자리에서 같이 예배를 드릴 수 없다면서, 무어 목사에게 중대한 제의를 했다. 즉 양반들은 예배당의 제일 앞에 특별석을 마련해서 백정들과 분리해서 앉게 해 달라고 했다.
그러나 무어 목사는 한마디로 거절했다. “하나님 안에서는 양반과 천민의 구별이 없고 모두가 평등합니다”라고 선언했다. 특히 백정은 포졸, 광대, 고리장, 무당, 기생, 갓바치 등 천민 중에서도 가장 천한 최 하류의 신분이다.
한편 박성춘은 1895년초에 무어 목사에게 세례를 받는다. 그때 그의 나이 33세로서 교회봉사와 전도에 열성을 다하자 무어 목사는 박성춘이 앞으로 교회의 큰 일꾼이 될 것으로 확신했다.
그러나 앞서 특별석을 만들어 달라던 양반들은 개나 소, 돼지 등 동물을 전문으로 때려 잡는 백정 박성춘을 절대 교회에 못 나오겠끔 무어 목사에게 또한번 압력을 넣기도 했다. 그러나 무어 목사는 일언지하로 거절했다.
결국 양반들은 백정들과는 함께 예배를 볼 수 없다면서 새로운 교회를 개척해서 나갔다. 그 교회가 지금의 광교동 근처 문숫골 교회다. 교회가 분리되자 제일 크게 상심한 것은 백정 박성춘이었다.
박성춘은 자기와 같은 백정교인들 때문에 무어 목사의 처지가 난감해지자 그는 전도에 용기를 내어 매일같이 노방전도에 나갔다. 박성춘의 친절한 전도에 백정들이 하나둘씩 곤 당골 교회로 몰려오면서 교회는 활기를 찾고 크게 부흥했다.
곤당골 교회는 결국 성도들 수용에 한계점에 달했고 반면 분리해 나간 순수 양반교회인 홍문수골 교회는 점점 쇠퇴하면서 양반들이 다시 곤당골 교회로 되돌아오는 처지가 되었다.
-한국 최초의 외과의사가 된 박서양
한편 박성춘의 아들 박서양은 예수교 학당을 졸업한 후 왕립병원인 제중원에서 에비슨 박사의 도움으로 의학공부에 전념하면서, 장차 외과 의사가 되겠다는 목표를 정했다. 이 목표 달성은 바로 백정의 아들이 아닌 완전 자유와 평등의 인간으로 즉 백정과 천민의 굴레를 벗어나는 것과 직결된다고 생각했다.
한편 에비슨은 미국의 대 사업가 세브란스의 거액 기부금으로 남대문 봉숭아골에 한국 최초의 병원을 준공하여 병원 이름을 세브란스 병원이라고 지었다. 한편 에비슨이 의학교육을 시작한지 10년만인 1908년 6월 3일 7명의 첫 졸업생이 배출됐다.
이 졸업생 중에 박서양은 후배 교육을 위해 교수로 재직했는데 그의 전공은 화학과 인체 해부학이었다. 당시 사람들이 병이나면 한의사를 찾는 길 이외는 다른 방도가 없었다. 특히 수술로서 중병을 고친다는 것은 상상도 못하는 시절이었다.
결국 수술하지 않으면 죽는다는 것을 훤히 알고 있는 양반층 환자들이 세브란스 병원의 박서양 의사에게 가서 수술만 받으면 살 수 있다는 사실이 서울 장안에 소문으로 크게 퍼졌다.
그래서 양반 환자들은 박서양 의사에게 진찰이라도 한번 받기 위해 줄을 섰고 그 앞에서 정중하게 인사를 해야 하는 바야흐로 양반이 백정출신 의사에게 고개를 숙이는 시대가 도래했다.
박서양이 한국 최초 외과 의사가 된지 2년만인 1910년 8월 29일 “한국 황제 폐하는 한국 전부(全部)에 관한 일체의 통치권을 완전하고도 영구히 일본국 황제 폐하에게 양여함”이란 대한 제국의 국권이 일본에게 빼앗기는 소위 국치일(國恥日)을 당하게 된다.
박서양은 국권을 강탈 당한 땅에서 의사 노릇을 계속할 수 없었다. 비분강개한 박서양의 가슴에 드디어 애국의 혼이 불타면서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고국을 떠난다.
1917년 15만여명의 우리 동포가 살고 있는 간도 연길현으로 가서 구세병원을 개업했는데, 한국인이 경영하는 병원으로는 처음이었다. 구세병원은 년간 1만명 이상의 우리 동포 환자를 진료하는데, 그중 약 3천명 이상을 무료 진료를 해주었다.
박서양은 병원 건축과 동시에 교회도 설립하여 동포들에게 기독교 신앙과 민족의 혼을 심어주기 위해 초등 교육기관으로 숭신학교를 설립 자신이 교장으로 봉사했다.
병원과 교회와 학교 바로 이곳은 앞으로 조국의 독립운동에 무한한 자산이 된다고 확신했다. 또한 조국에서 일어난 3.1운동에 맞추어 만주 지역에서는 대한국민회라는 독립운동 단체가 결성되었는데, 이때 박서양은 대한국민회 군사령부의 군의관으로 임명되었다.
한편 1931년 만주사변 이후 일본은 만주지역의 우리 독립운동을 막기 위해 1차적으로 민족의 혼을 양성한다는 이유를 내세워 숭신학교를 폐교시켰다. 학교가 폐교되자 박서양은 1936년 고국으로 돌아와 황해도 연안읍에서 의료활동을 하다가 1940년 지금의 고양군 수색으로 이사를 왔다.
이사온 그해 12월 15일 박서양은 그토록 갈망했던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하고 55세의 나이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아마 하늘 나라에서도 박서양이 꼭 필요한 인재(人材)였기 때문이었을까? 지난 2008년 우리 정부는 뒤늦게나마 박서양을 독립운동 유공자로 선정해 건국포장과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백정 박성춘과 승동교회의 부흥
백정들과는 절대 같이 예배를 드릴 수 없다고 나갔던 양반들이 곤당골 교회로 되돌아오자 곤당골 교회는 수용의 한계점에 도달했다. 그래서 무어 목사는 인사동에 새 교회를 건축하는데, 이 지역은 불교의 본산지라 할 수 있는 조계종을 비롯한 크고 작은 암자들이 많아서 동네 이름도 불교 마을로 불렀다.
그러나 무어 목사는 이와 같은 불교 마을에서 교회가 굳건하게 서기 위해서 즉 승리하기 위해서 이길 승(勝)과 마을 동(洞)자를 넣어 교회 이름을 승동교회로 정했다.
승동교회가 이곳으로 옮겨 갑자기 부흥할 때 크게 협력한 사람이 성서한국 번역가요 대 전도자인 서상륜이었다. 참고로 새문안교회 개척당시 설립자 14명중에 13명을 서상륜이 전도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한편 승동교회 부흥의 또 한사람의 일꾼이 백정 박성춘이다. 무어 목사로부터 신앙 훈련을 철저하게 받았던 박성춘이 노방 전도를 나가면 금방 수십명에서 수백명 사람들이 모여든다.
특히 양반층의 사람들이 “도대체 백정 놈이 무슨 말을 어떻게 잘 하길래”하면서 많은 양반들이 구경을 나온다. 박성춘의 전도 내용의 핵심은 “내가 교회를 나가지 않았다면 백정놈이 감히 이 자리에서 여러분들에게 전도 연설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여러분도 예수 믿고 천당 가십시오. 지금 내 등 뒤에는 여러분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성령님께서 나를 인도해 주고 있습니다”.....청산유수 같은 연설이 끝나면 전도지를 나누어 준다.
백정들은 글을 모르니까 전도지를 소중하게 가지고 있지만 양반들은 전도지를 받는 즉시 땅바닥에 던지고 신발로 비벼 버린다. 박성춘은 이 때가 제일 마음이 아프다. 이때 그는 큰 소리로 외친다.
“지금 양반 여러분은 성령님을 모독하고 있습니다. 두고 보십시오. 앞으로 하나님은 틀림없이 전도지를 땅바닥에 버린 사람들에게 벌을 내리실 것입니다.”
박성춘의 전도 연설은 서울 장안에 널리 알려져 독립협회가 주관하는 시민대회 연사로 등장한다. 즉 1898년 10월 29일 서울 종로에서 제2차 관민공동회 개막 연설을 했는데, 그 날의 연설 초반부만 소개한다.
“나는 대한의 가장 천한 사람이고, 무지 몽매한 자입니다. 그러나 충군애국(忠君愛國)의 뜻은 대강 알고 있습니다. 나라를 이롭게 하고 국민을 편하게 하는 길은 관민(官民)이 합심한 이후에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저 천막에 비유하자면 한 개의 장대로 받치면 역부족이나 많은 장대를 합하면 그 힘이 심히 견고합니다.
원컨데 관과 민이 합심하여 우리 대 황제의 성덕에 보답하고 국운을 만세에 누리게 합시다”.....
-장로 선출에 양반과 백정이 대결했다.
1911년 승동교회는 상회의 허락으로 장로 1인을 선출하는데, 세례 받은지 1년이 지나고 만 30세 이상이면 누구나 장로될 자격이 있습니다 라는 공고문을 교회 벽에 부쳤다. 백정 박성춘은 주위의 권고로 후보에 나가 양반 후보와 대결했다.
선거 결과는 “박성춘이 공동 의회에서 회원의 3분 2 이상을 득표하여 승동교회 초대 장로가 되었습니다”라고 무어 목사가 크게 외치자, 백정 교인들은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큰 함성을 지르며 춤을 추었다.
이날의 기적은 한국 기독교 역사에 또 하나의 새로운 이정표를 세웠다. 한편 양반들은 박성춘 백정이 장로가 되자, 백정 밑에서 신앙 생활을 절대 할 수 없다면서 안국동에 안동교회를 개척해 나갔다.
한편 박성춘이 장로가 되면서 경총노회 재정위원회 임원직을 맡으면서 그의 활동 범위가 계속 확장돼 갔다. 특히 전국에 백정 교회를 계속 세워 나가면서 당시 내각 총서 유길준에게 장문의 탄원서를 보냈다. 그 내용은『백정 차별 금지법』을 만들어 백정들도 갓과 망건을 쓰게 해달라고 했다.
유길준은 당시 해외 국비 유학생 1호로서 미국 보스톤대학을 졸업했는데, 후일 그가 세상을 떠나던 날 아들과 조카에게 꼭 신약성서를 읽어라는 유언을 했다. 특히 유길준은 개화 사상가로서 박성춘의 탄원서의 주장은 당연한 것으로 즉시 허락해 주었다.
박성춘은 백정들이 500년간 써보지 못했던 망건과 갓을 제일 먼저 썼던 백정으로 그가 처음 갓을 썼던 날이 얼마나 행복하고 기뻤던지 그 날밤 잠을 잘때도 갓을 쓰고 잤다는 일화가 있다.
다음 주일날 아침 박성춘 장로가 도복차림에 갓을 쓰고 당당하게 교회로 들어오는 모습을 보고 많은 성도들이 웃고 우는 희비가 연출되었다. 박성춘 장로 장립 2년후 이 교회에는 흥선대원군의 조카이며 왕손이었던 이재형이 장로가 된다.
백정 장로와 왕손 장로가 서로가 손을 잡고 교회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는 모습을 상상만 해도 가슴이 설레인다. 일자 무식이었던 천민 백정이 아들의 손목을 잡고 교회로 향했던 그 날의 그 발걸음이 이들 부자(父子)의 운명을 바꾸어 놓았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역사였다.
-찬송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가 작곡된 얘기
우리나라에서 작곡된 찬송가 중에 외국에서 가장 많이 알려진 찬송가를 든다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를 들 수 있다. 이 찬송은 현재 독일어, 영어, 라틴어, 중국어, 이탈리아어, 일본어로 번역되어 이들 나라에서 애창되고 있다고 한다. 특히 외국 사람들의 경우 명곡은 원어로 불러야만 가치가 있다고 해서 한국말 그대로를 부르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한편 국내에서도 세종문화회관이나 큰 공연장의 음악회를 보면 이 찬송이 꼭 프로그램 순서에 들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이 찬송은 잔잔한 시냇물이 흐르듯이 진행되다가 서서히 장엄하고 웅장함으로 변하다가 다시 우렁찬 곡으로 변화되는 것이 이 찬송의 특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찬송은 교인뿐만 아니라 음악을 하는 사람치고 누구나 다 배워두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한다. 그런데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란 이 불멸의 찬송가를 누가 작곡했으며, 특히 이 찬송가가 작곡된 그 배경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으로 본다.
이 찬송은 목원대학교 대학원 교수이며 작곡가였던 고(故) 나운영 장로가 6.25전쟁 때 부산 피난생활에서 작곡한 것이다. 필자도 이 찬송이 작곡된 내용을 ‘인간만세’ 방송을 제작할 때 비로소 알게 되었다.
1950년 피난지 부산에서 어느날 성경을 읽고 있던 나운영 장로는 시편 23편을 읽어가는 중 생각지도 않았던 악상이 갑자기 눈앞에 전개되었다고 한다.
그 순간의 모습은 마치 비가온 뒤 무지개가 선 것 같이 선명했다고 한다. 나운영 장로는 즉시 연필을 잡고 악보를 그려 나갔는데, 그 순간 순간의 연필 놀림은 마치 다급한 시외전화를 메모하는 것보다 더 빨랐다고 한다. 성경 시편 23편은 그 문장이 너무나 훌륭해서 우리나라 서예전 전시회에서 이 글의 출품이 빠지는 일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그 긴 문장을 가사로 해서 악보로 만들어간 시간이 정확하게 꼭 3분이었다고 한다. 보통 악보에 멜로디만 기록해도 3분 이상이 걸린다고 했는데,그 당시 그 순간에 어떻게 해서 불과 3분만에 특히 반주까지 완성을 했는지?
나운영 장로는 그 3분동안에 일어났던 그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뛴다고 한다. 나운영 장로는 평소 작곡을 하나 할 때 보통 30번 이상을 고쳐야만 마음에 들 듯 말 듯한다고 했다. 그런데 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는 그야말로 1점 1획도 고치지 않고 하나님이 불러주는 영감 그대로를 단숨에 작곡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나운영 장로는 평소 자주 듣던 ‘하나님의 영감’이란 말을 직접 체험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나 영감 앞에서 우리 인간은 먼지보다도 못한 나약한 존재일 뿐이라고 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두 번째 지시
나운영 장로가 두번째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것은 그후 29년이 지난 1979년 8월 24일 제주도 어느 호텔에서 기도를 하던 중에 일어났다. “너는 지금부터 매월 일곱곡의 찬송가를 작곡해서 봉헌하라”는 내용이었다고 한다.
그날의 그 명령을 실천하기 위해 나운영 장로는 매월 일곱곡의 찬송을 작곡해서 91년 11월 세째주일에 드디어 1천곡을 작곡 봉헌했다고 한다.
나운영 장로는 이미 중앙고보 3학년때 지금도 중학교 3학년 교과서에도 있는 ‘아 가을인가요’를 작곡했고 18살 때 동아일보 신춘문예 작곡 부문상을 받았는데 이때 ‘가려나’를 작곡했다. 나운영 장로의 음악생애에 가장 비애를 느낀 것은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손기정 선수가 마라톤에서 우승을 했을 때라고 한다.
그때 우리 민족은 이 기쁨의 감격을 표현해서 다같이 부를 노래가 없었다고 한다. 당시 그가 일본 동경제국 음악학교로 급히 유학을 떠난 것도 이러한 연유에서 기인된 것인지도 모른다.
평생을 찬송가 작곡으로 살아온 나운영 장로에 대해서 외국의 학자들이 ‘나운영 성가’라는 연구 논문을 집필해서 석사학위를 받은 분도 있고, 또한 국내 학자들도 ‘나운영 가곡 연구논문, 나운영 교향악 작품’등 각종 연구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한사람의 작곡가가 음악을 통해서 인류 역사에 엄청난 업적을 남긴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글 : 김수호 (앙드레명상 발행인, 주님의교회 협동장로)
주님의 교회 최명문 선생님
" 이병식 장로
창 천 교 회 김영석 권사
조 규 공 (소속을 밝히지 않았음.)
안드레명상 선교헌금안내
국민은행 268802-04-031127
(예금주 김수호)
* 안드레 명상은 KBS로고스와 월드 뉴스에도 동시 게제됩니다.
* KBS로고스 : (www.kbslogos.com)
* 월드뉴스 : :(이글은 www.worldnews.or.kr, 또는 www.월드뉴스.kr의 칼럼연재 내 김수호 코너에서 볼수 있습니다)
* 인터넷 : www.andre.pe.kr 한글로『안드레 명상』을 쳐도 됩니다.
발행처 : 안 드 레 명 상
서울시 강남구 청담동 17-4
H. P : 011-9871-0685
월드뉴스
2010-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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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가 산업 일자리 창출의 성공 조건
관광, 여행, 휴식 등의 여가(餘暇) 산업에서의 일자리 창출이 우리나라의 고용 전략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오르는 중이다. 제조업에서의 일자리 창출은 기술의 진보등으로 이제 한계상황을 맞이하는 중이고, 서비스업의 핵심인 여가 산업에서의 일자리 창출은 다소 가능성이 높다는 경험에서다.
1990년대 초 미국의 고용 문제가 어려워 지자 미국 고용 당국이 돌파구를 연 분야도 여가 산업이었다.
미국은 당시 여가 산업을 육성해서 일자리 창출에 상당히 많은 성취를 이룬다. 미국이 볼것이 많으면서도 즐기는 여행을 할 곳으로 좋다는 이미지를 만들어 내기위해서 노력을 경주한다.
지난7.15일 남이섬에서 정부는 국가고용 전략회의를 열고, 여가(餘暇) 산업에서 일자리 창출을 2012년에 이르는 기간에 4만개를 달성한다는 정부 목표를 세우고 항해를 시작한다. 과연 성공할 것인가. 여가 산업 일자리 창출에 성공하는데 필요 충분 조건은 무엇인가?.
하나, 관광 산업 자체를 키워야 한다. 산업을 키워야 일자리가 생겨난다. 즐기는 관광 산업을 키워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국가 브랜드를 키워 가야 한다. 국가 이미지가 결함된 브랜드화의 성취 없이는 국가 브랜드 키우기는 요원하다. 국가 브랜드 이미지가 좋아야 그 나라로 여행지를 정해서 오는 경우가 늘것이다. 국가 브랜드는 그래서 중요하고, 그것이 황금알을 낳을수 있는 기초가 된다.
한국 관광 공사의 비즈니스를 더욱 강화 하는 방향으로 정책 지원을 집중할 가치가 있다. 한국에 우선 외국인들이 볼거리가 많고 즐기는 관광을 하려고 많이 오게 만들어야 한다. 유럽의 재정위기, 2008년 미국 월가의 금융 위기이후 가처분 소득이 각국에서 감소한 영향이 있기는 하지만 여전이 여가 산업에서의 소비 심리는 지속되는 바, 이런 흐름을 포착해야 한다.
둘째로 여가 산업에서의 자격증의 첨단화 국제화를 도모 해야 한다. 여가 산업에서 전문 인력으로 우리나라 청년들을 육성하기 위해서는 아직도 초보 수준인 우리나라 여가 산업의 자격증을 더욱 전문화해서 시스템화 할 가치가 있다.
이를 테면 이렇다. 지금의 여행 가이드 자격증은 그대로 심화 시켜서 발전 시키자. 아울러 지금 우리나라에 없는 중국 여행 주재원 자격 시험, 미국 테마 여행 자격증 , 여행 상품 전문가 자격증 , 여가 상담을 하는 국제 여가 상담사 같은 국제적으로 통용이 가능하고 국제 여가 산업에 취업하는데 효용성이 높은 자격증을 만들어 시행할 가치가 있다.
셋째 일본처럼 우리나라 유적지를 세계 문화 유적으로 등재하는 외교를 강화하자. 그래서 불국사, 강화도 유적지등을 세계 어느 나라 민족이라도 한번 보러 오게 만들자. 이를 위해서는 문화재 외교를 강화할 가치가 있다. 국내의 국보, 문화재의 차원을 넘어서 세계 문화 유적으로 등급이 글로벌화 되게 유적지를 만들어 가고 보완할 것은 보완해가야 한다고 본다.
여행을 하면서 한국에서 돈과 시간을 소비해도 낭비라는 생각이 들지 않게 여행, 관광 , 휴식 분야의 산업을 국제화하는 정책적인 노력을 강화 하자. 이런 노력의 뒷받침이 없이 우리나라의 관광 등의 여가 산업에서의 일자리 창출 성공은 어렵다.
특히 2012년의 여수 세계 박람회를 잘 준비하여 각국의 관광객들이 한국 여수를 방문하는 붐이 조성되게 정책적인 노력을 집중할 가치가 있을 것이다. 한국형 남해안 한려 수도 벨트를 만들고 이를 아시아의 나폴리로 만들고 이런 관광 단지를 전세계 210개 국가에 항상 홍보하는 노력을 통해서 가보고 싶은 여행지로 인지하게 해가는 노력이 병행 되야 여가 산업에서 일자리 창출이 성취를 거둘 것이다.
월드뉴스
2010-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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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드레명상, 전쟁과 신앙 3편
월드뉴스
2010-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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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추리
정극원 취재기자
2010-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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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군민들, 4대강살리기 사업 신속히 추진 촉구
월드뉴스
2010-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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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문산-겨울의 풍경
정극원 취재기자
2010-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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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당 전당대회 투표 결과 발표 직전 긴장된 분위기
7월14일 오후 2시 잠실 실내 체육관에서 있었던 2010 제 11차 한나라당 전당대회에서 4선의 안상수 의원이 한나라당 새 대표로 당선됐다.
총 4천 316표로 2위인 홍준표 후보를 462표차로 승리했다. 나머지 최고위원으로는 3위에 나경원의원, 4위 정두언의원, 5위에 서병수 의원이 각각 최고위원에 선출되었다.서병수의원을 제외하면 모두 친이계로 불리는 후보가 당선되었다.
안상수 한나라당 대표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앞으로 변화하면서 국민이 걱정하지 않토록 당정청이 힘을 합쳐서 함께 변하는 모습을 보여 주겠다고 밝혔다. 안상수 한나라당 대표는 또 이제부터는 친이든 친박이든 모두 재보선 현장으로 달려갈 것이라고 말하고 이명박 대통령과 한나라당이 제대로 일을 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국민들에게 호소했다.
위 동영상은 14일 오후 잠실 체육관에서 있었던 한나라당 전당 대회에서 투표를 마친후 개표를 마치고 마지막 당선자 발표가 있기 직전 각 후보자와 지지자들의 긴장된 표정과 당선자 발표 이후 당선자 소감등을 영상 스케치로 담았다.
박교서 기자
2010-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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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광 스님의 외출-
- 중광 스님의 외출-
인생
긴 여인의 머릿결에서나
잡힐 듯한 바람으로
세상에 와서
용오름 같은 광풍으로
사물놀이 패거리 북 뚜드리듯
인간의 마음을 때리다
다시 볼 수 없는, 외출을 했다.
사람도 나무도,
들도 산도 없어
바람을 느낄 수 없는
너무나 외로운 곳으로 외출을 했다.
광풍에 걸레로 메 달려
세상을 닦어마던
그 열정 마 져 내 팽겨 치고
다시는 걸레가 될 수 없는
오히려 서러운 길을 가고 말았다.
바람이 없는 곳,
구속만이 있는 질곡의 구렁텅이에
한 점 되어 걸려,
오히려 고통의 세월을 맞아 버린
똥 치우는 걸레여서 아름다웠던 사람.
어찌 할꼬 어찌 할꼬.
바람 그리워 어찌 할꼬.
사람 그리워 어찌 할꼬.
꽃과 새 그리워 어찌할꼬.
그리움 다 못 삭혀 굳은 몸으로
세상의 똥 걸레 되어
오히려 아름다웠던 사람.
아우성치며 내 닫는 발걸음에 놓인 부처.
오히려 질곡의 부처님이 위안이었던가?
바람마저 끊고 외출을 했다.
온화한 미소와
다감한 가슴에 반한 동자되어
외로움 달래려 바람 없고 구름 없는
오히려 구속인 부처님 품으로 외출을 했다.
서러운 안타까움이
오히려 큰 기쁨으로
다가앉지 못하는 바람의 외출.
한 순간도 바람이 머물지 못할
질곡의 늪에
빠져버린 안타까운 사람.
바람으로 머물던 이승에는
꽃도 피고 새도 울고 새싹도 피건만,
아름다운 세상 때 끼었다 똥 걸레 되었던
어리석음을 이제는 알 거나.
그 어리석음을 이제는 알거나.
작품1
대 걸레 살에 먹물 묻혀 자빠진다.
벌거벗은 몸뚱아리 화선지 되어
세상 때 묻힌단다.
늘어진 뱃살,
감추어진 아랫도리.
무당 춤추듯 미끄러졌다 자빠졌다
광풍을 일으킨다.
빙 둘러선 사람들, 부러운 듯 진지하다.
키 큰이 작은이,
좃 달린 이 보지 달린 이
할 것 없이 그 져 산이다.
그 져 부쳐다.
횡 하니 바람으로 사라진다.
하늘이 내려앉은 듯 둥그런 구멍이 났다.
눈 그리고 코 그려 가슴 없는 사람을 만든다.
삼십 만원이다.
작품2
산허리 토담 방
메 달려 붉은 점 찍어매
서 쪽 처마 밑 참새가 놀란 모양이다.
붉은 주둥이 내 밀며
동 쪽 하늘로 학 인양 난다.
안타까운 듯 고개를 쭉 내밀다
이내 고개를 떨 군다.
옛 다 네 가져라.
공짜다.
작품3
알아보지 못할 형상이다.
도자기 구워 메 단 바람구멍 새로
바람이 샌다. 인생이 샌다.
콸콸콸 잘도 쏟는다.
꿀꺽꿀꺽 잘도 삼킨다.
쿡쿡 잘도 찌른다.
계집이 아우성이다.
속이 죽 는다 야단이다.
거죽조차 말라 비틀어졌다.
갈 곳이 없다.
옛 다 이십 만원이다.
바람
숨이 막힌다.
빛도 사라졌다.
바람 마저 끊겨 외롭다.
우는 이 웃는 이 할 것 없다.
한 때는 광풍이었건만
이제는 소리 없는 바람이다.
염치없이 세상에 또 하나 재 되어 사라진다.
봄 무덤 위에 자라는 새싹이
오히려 부끄러우리.
바람조차 머물지 못하는
고독 속으로 영원히 빠져 버렸어라.
이 안타까움을 어이 할꼬.
사랑과 그리움을 잃었으니
이를 어이할꼬.
이를 어이 할꼬.
2002년 3월
중광스님의 세탈을 위로하며
정 상
정득환 취재기자
2010-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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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산(만물상 능선)
정극원 취재기자
2010-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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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람선에서 바라본 한강의 아름다움
월드뉴스
2010-0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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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주월 한국군 사령관 채명신의 전쟁과 신앙 3편
- 월남전에서 역사적인 오작교 작전
오작교 작전은 당시 맹호사단이 주둔하는 퀴논에서 백마사단 북단 투이호아 까지를 개통시키는 작전인데 미군제 101공수사단이 이 지역 투이호아 지역에 10개월간 있으면서도 개통작전에 실패했던 도로다.
이곳 1번 도로는 제일의 항만, 비행장 등의 군사시설과 또한 월남 산업의 중추 지역으로 월남 전체 경제의 80%이상의 수입원이 집중되어 있는 곳이다. 또한 한국의 기술인력의 진출여건을 보장하여 한국군과 한국의 국가 이익의 교두보 역할을 할 수 있는 중요성을 갖는 곳이다.
작전을 앞두고 주월 미군사령관 웨스트 모얼랜드는 채명신에게 "그 작전은 절대하지 마시오. 그 지역 주변의 주민들은 전부가 베트콩들이요"하고 극구 말렸다.
그러나 드디어 작전은 시작되었다. 1967년 3월 15일 맹호사단은 북에서 남으로 백마사단은 남에서 북으로 적을 소탕하는 오작교 작전의 서막이 올랐다.
먼저 맹호와 백마사단이 적진 깊숙히 들어갈 지역에 미 제7전술 공군의 항공 폭격이 시작되어 이 지역을 숙대밭으로 만들었다. 뒤이어 우리 장병들을 태운 수백대의 미군헬기는 하늘을 까맣게 덮고 적진을 향해 날고 있었다.
채명신은 이 광경을 보면서 헬기에 의한 공중 기동작전은 한국군이 현대화로 가는 시험이라고 만족하게 생각했다. 작전이 시작된지 한달이 넘으면서 맹호와 백마는 마지막 목표 지점을 향해 진격을 계속했다.
베트콩과 월맹 정규군은 곳곳에서 포착 사살되고 전의를 완전히 상실한 적들을 생포하여 이들을 통한 적들의 비밀동굴 진지를 폭파하는데 이용했다.
연 35일간 폭염이 내려쬐는 더위, 험준한 산악, 그리고 앞이 잘 보이지 않는 정글의 숲속에서 불굴의 투지로 전투는 계속되었다.
그 결과 지금까지 미군과 월남군이 난공불락으로 내세운 베트공의 푸엔성 본부를 파괴 소탕함으로써 드디어 맹호와 백마는 1번 도로에서 맹호사단장 유병현과 백마사단장 이소동이 감격의 포옹을 했다.
이 역사적인 연결식에서 채명신은 하늘을 향해 하나님께 뜨거운 감사기도를 했다. 이 작전을 그가 바로 구상하고 작전명 까지도 견우와 직녀가 상봉한다는 오작교 작전으로 정했다. 이날 연결식에는 미군 장성과 월남 푸엔성장 내외신 기자들이 총 집결 되었다.
이곳 1번 도로는 월남의 사이공과 월맹의 하노이를 연결하는 월남 제일의 동맥으로 우선 17도선 이남 지역의 1번도로가 개통됨으로서 군수물자와 산업설비, 통신, 기타 민간 버스까지도 신나게 달렸다.
이 오작교 작전의 성공으로 전세게 유력신문과 통신은 일제히 ‘한국군을 배워라, ’랑데뷰 작전의 성공, ‘맹호와 백마의 만남, 등으로 크게 보도했다.
이 오작교 작전의 전과와 손실을 요약하면 맹호사단은 적사살 608명 포로와 귀순 437명에 아군전사자 16명, 전상자 108명 그리고 백마사단은 적사살 266명 포로와 귀순 214명 아군 전사 19명 전상 59명이었다.
한편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오작교 작전의 위대한 성공에 대하여 본인은 주월한국군 사령관 채명신 장군과 휘하 전 장병에게 만강의 치하를 보내며 아울러 무운 장구를 기원합니다."라는 치하 전문을 보냈다.
또한 미군사령관 웨스트 모얼랜드는 "나의 군대 생활중 가장 인상깊었던 것은 한국군의 오작교 작전이며 전략적인 방침과 장병들의 완전 무결한 전술적인 행동으로 상상할 수 없는 베트남전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다"라고 공식 석상에서 여러차례 연설을 했다.
참고로 현 중앙일보 상임고문 전응덕 원로 언론인은 웨스트 모얼랜드는 채명신을 매우 사려깊은 위대한 장군으로 보아왔고, 또한 채명신도 웨스트 모얼랜드를 감성적이고 탁월한 장군으로 존경했을 것이다.
이렇게 두사람의 관계가 매우 친숙했기 때문에 한국군의 모든 작전에 미군의 항공작전 지원과 군수물자 지원이 크게 있었을 것이라고 증언했다.
- 브라운 각서의 내용
우리국군의 월남전 참전에서 경제적 기여도는 매우 큰 것이었다. 그것이 바로 브라운 각서에도 명시되었다. 브라운 각서는 1966년 3월 4일부 주한미국대사 브라운이 대한민국 외무부장관 이동원에게 보내는 서한 형식의 약정서이다.
그 주요 골자는 한국군의 1개 전투사단 증파에 따른 대체사단의 추가 비용을 미국이 부담하며 거기에 대해 군사 및 경제적 이익을 제공한다고 기록했다. 브라운 각서의 항목 중에서 특히 제6항의 미국의 해외 판매에 있어서 한국에 보다 많은 특별한 참여 기회를 부여한다고 했다.
이 6항목에 의해 한국기업, 한국기술자, 근로자들의 월남 진출이 열렸으며, 휴대식량, 군복, 군화 등의 수출이 시작되었다. 한편 1965년 우리 기술자의 베트남 진출은 93명에서 다음 해에는 2만명을 넘었다.
이들이 본국으로 송금하는 액수는 한해 평균 1억2천만 달러에 달했다. 또한 파월 장병들의 전투 수당은 기술자들에 비하면 훨씬 적은 액수였는데, 대령이 195달러, 대위 150달러, 상사 75달러, 상병 30달러였다.
당시 필자는 군 현역으로 국군의 방송에서 파월장병 가족들의 육성을 월남으로 보내는 이란 프로그램을 제작했는데, 40여년이 지난 지금도 이때의 감동장면이 잊혀지지 않는다.
"판걸아 내 애미여, 아까는 울면서 말을 했더니 우리 군수님이 소주를 사가지고 와서 큰컵에 한잔씩 쭉 부어 주길래 나도 뿔떡 뿔떡 단숨에 다 마셔버려서 내평생에 군수님이 주는 술을 마시고 나니 죽어도 한이 없겠다.
우리 군수님 사무실에도 처음 와봤고 차비도 주고 또 운동화도 선물 받았다. 선상님 나 이제 할말 없는데유" "더 하십시오. 아드님 보낸 월급은 어떻게 하고 있는지 그리고 아드님 애인 있으면 애인 소식도 전하세요" "아참! 니 월급이 올때마다 아버지가 돼지를 계속 사 넣어서 큰놈만 60마리가 넘었다.
새끼들은 나도 숫자를 몰라 얼마나 많은지 그리고 그동안 저금한 돈과 큰돼지 몇십 마리를 팔아서 노샛꼴의 소작으로 붇치든 논 열마지기를 사서 니 명의로 등기를 한다고 하니 그렇게 알고 있어, 그리고 니 애인은 그렇게도 자주 오더니 요새는 발걸음 싹 끊었다.
그 인간이 지 얘비가 이번에 면장이 되니까 또 엉덩이 뿔이나서 바람이 난 모양이다야" 이때 옆에 앉은 파월 가족 할머니가 "아이구 이 여자여 전쟁터에 있는 자식에게 애인 바람난 얘기를 왜 하는거여" 그러자 이 어머님은 깜짝 놀라면서 "아이구 어쩌잠, 판걸아, 니가 귀국하면 논 열마지기에 돼지 사장이 되는 거여 그때는 색씨들이 줄을 설테니까 장가갈 걱정은 손톱만치도 하지마라......
월급으로 돼지를 사고 논을 구입하고 또 직업 군인의 경우 사글세 집에서 전셋집으로 전셋집에서 드디어 내집 마련을 했다는 등의 방송이 나가고나면 장병들의 송금 실적은 100%에 달할 때도 있다.
- 박정희의 정권연장을 반대했던 채명신
채명신은 백마 9호 작전을 끝으로 1969년 5월 제2군 사령부 사령관으로 부임한다.
당시 군관계 여론은 채명신은 참모총장 아니면 1군 사령관으로 부임할 것으로 예측했던 것이다. 한편 당시 대통령의 지방 순시에는 꼭 2군 사령관 채명신을 동행하게 했는데, 이때 채명신은 가끔 국정에 대한 직언을 하기도 했다.
1972년 대통령이 2군 사령부를 전용 열차편으로 방문한다는 청와대 연락을 받고 대구역으로 마중을 나갔다. 이날 대구역에는 구자춘 경북지사를 비롯한 지방 유지들과 대통령을 보기 위해 역광장이 매우 혼잡했다.
군중을 정리하기 위해 경북경찰국장 서재근 경무관이 군중 정리를 위해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이때 경호실에서 나온 경호원 한사람이 경찰국장을 보고 반말로 호령을 내리는 것이었다.
그 광경을 본 채명신은 "어이 자네 이리와 경상북도 경찰국장 직위가 위냐 네 직위가 위냐? 네가 뭔데 경찰국장에게 반말로 이래라 저래라해!" 경호원은 고개를 숙이며 그 자리를 피해 갔다.
박정희가 대구에 오면 자주 들리는 식당에서 일행들과 식사를 하게 되었는데, 국회의장 이효상 등 고위 인사가 참석했다. 식사가 끝나자 참석 인사들이 다 나가고 대통령은 방옆 별실로 채명신을 불러 독대를 했다.
술상이 다시 들어와 박정희는 "오늘 한잔 합시다"하며 채명신에게 술잔을 권했다. 원래 술을 못하는 채명신은 술잔을 받아 놓고 마시는 시늉만 했다. 박정희는 술기가 오르자 채명신의 눈을 똑바로 보며 무거운 입을 열었다.
"채장군, 김대중에게 정권 맡겨서 앞으로 잘될까?" 뜻밖의 질문을 받은 채명신은 박정희의 의중을 대략 짐작하고 한참후 "각하 바뀌면 혼란이 오겠죠 경제가 지금처럼 잘 되겠습니까? 각하의 뜻은 100% 동감합니다.
그러나 각하께서 스스로 정권 연장하겠다는 말은 하지 마십시오. 3선 개헌때 대통령에 마지막 출마 한다며 눈물까지 흘리신 각하가 아닙니까? 모든 국민이 다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채장군 그래서 나도 고민이야" 채명신은 계속해서 박정희의 정권 연장의 부당성을 솔직하게 직언했다.
"그래 그래 그래서 고민이야" 고뇌에 찬 목소리로 고민을 되풀이 했다. 그로부터 두어달 후 또 대구의 그 식당에서 채명신을 불렀다.
"여보 채장군 아무리 생각해도 집권을 연장해야 겠어 욕을 먹더라도 내가 십자가를 메야겠어" "각하, 십자가란 말을 함부로 쓰지 마십시오" "응 그래 채장군은 기독교 신자지 그건 맞아" 그 말이 끝나자 박정희는 일어섰다. 작별 인사도 없이 헤어졌다. 1970년 여름의 어느날 경주 관광호텔에서 박정희가 직접 전화를 걸어왔다.
"각하 웬 일이십니까?" "나 경주에 왔어 지금 이곳으로 올 수 있나"....
채명신이 호텔방에 도착하자마자 박정희는 "채장군 오해하지마"하면서 시작한 말은 당시 중앙정보부장 김계원이 채명신의 비행이라면서 올린 보고서에서 서울 강남에 땅이 많고 스위스 은행에 비밀구좌 등 갖가지 비행을 조사했다는 것이다.
이 보고서를 본 박정희는 크게 충격을 받고 재 조사를 철저하게 해서 다시 보고를 하라고 지시했다. 재 조사결과 모두가 허위모략으로 밝혀졌다면서 박정희는 이 사실을 알리기 위해 채명신을 불렀다고 했다.
한편 채명신 자신도 여러 정보기관에서 자신을 감시하는 것을 알았고 2군 관할하에 있는 ROTC를 통해 학생을 선동한다는 것 또 채명신이 어떤 야먕을 가지고 뭔가를 노린다는 엉터리 소문 등등이 계속 나돌고 있었다.
이런 저런 정황으로 봐서 자신의 군대생활도 끝나가고 있음을 감지했다. 드디어 1972년 5월 30일 중장계급 정년이 되는 날인데 상부에서는 아무 소식이 없었다.
그날 오후 5시가 될 무렵 국방장관 유재흥의 전화 연락을 받고 헬기편으로 상경 국방장관실로 들어갔다. 유재흥은 매우 안타까운 표정으로 서랍에서 서류를 끄내어 채명신에게 주었는데 박정희의 친필이었다.
『채명신 중장 예비역 편입, 노재현 중장 대장 승진 임육군 참모총장 본인에게 통보는 5시 이후에 할 것. 1972년 5월 30일 대통령 박정희』
옛 고사(古史)에서도 왕은 개선장군을 오래두지 않는다고 했다. 바로 다음날 2군 사령부에서 거행된 전역식(轉役式)에는 연락 조차하지 않았는데, 미8군 사령관과 미1군단에서 까지 참석했다.
전역사를 마치고 사열차를 탈때에는 그도 인간인지라 슬픔이 복받쳤지만 꾹 참고 사열을 했다. 사열차가 기수단을 도는데 기수단의 장병들이 눈물을 흘리는 것이 보였다.
식을 마치고 정문까지 가는동안 도열한 장병들도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고 만감이 교차했다. 그가 탄 차가 고속도로 돌게이트에 들어서자 꾹 참았던 눈물이 주룩 흘렸다. 차창 넘어로 전개되는 먼 하늘을 보면서 채명신의 입에서 하나님! 하면서 기도가 터져나왔다.
6.25 전쟁과 베트남 전쟁 두 전쟁터에서 포연이 지축을 뒤흔들고 총탄이 빗발치는 그 생사의 교차로! 그 때마다 지휘관으로서 사명을 완수케 해준 하나님께 눈물의 감사 기도를 드렸다.
한편 전역한지 얼마후 박정희는 채명신을 멀리 스웨덴 대사로 보냈다.
그후 다시 그리스 대사 브라질 대사를 역임하는 동안 고국에는 계엄령과 더불어 유신시대로 들어갔고 다시 박정희 시해 사건을 듣게 된다.
지난날 대구 식당 별실에서 박정희의 집권연장을 반대했던 그날밤 박정희의 고뇌에 찬 그 모습이 자꾸 눈앞에 떠올라 며칠간 잠을 잘 수가 없었다.
10여년간 외교관 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후에도 그는 박정희가 사준 후암동 자택에서 살았다. 부인은 자꾸 아파트로 이사 가자고 날마다 졸랐지만 성냥갑 같은 곳에서는 살수 없다고 했다.
그래도 대통령이 하사한 집인데 어떻게 이 집을 팔고 가겠느냐고 30여년을 버티다 결국 아파트로 이사했다. 과거 주월사령관 시절 일시귀국때 채명신과 대담 녹화를 하기 위해 제작진이 자택을 찾아갔는데, 차가 들어갈 수 없는 골목길이어서 TV녹화 기자재를 메고 올라가는데 큰 고생을 했다.
이런 사실을 청와대 모 대변인이 박정희에게 보고하자 박정희는 깜짝 놀라 차가 들어가는 큰집을 한채 사주었던 것이다. 2009년 여름 퍽 오랜만에 필자를 만난 채명신은 "아파트가 이렇게 좋은 줄 몰랐소, 이 서재에서 저기, 저기좀 보세요, 한강도 내려다 보이잖아요" 하고 껄걸 웃었다.
서재에는 40여년전 중장 계급장에 지휘봉을 든 주월사령관 시절의 멋있는 사진이 걸려 있었다. 그때의 그 모습과 지금은 이미 할아버지가 된 (2009년 83세) 모습을 보니 인생 무상이 마치 흘러가는 구름처럼 생각되었다.
한편 채명신의 오늘이 있기 까지는 부인 문정인(권사)의 기도가 마치 다람쥐 채바퀴처럼 쉴새없이 달려왔다. 문정인은 이화여대 제1회 메이퀸으로 지성미를 겸비한 훌륭한 신앙의 여인이다.
한편 채명신은 월남에서 귀국할 때부터 여의도 순복음교회 협동장로로 적(籍)을 두고 있다. 끝으로 채명신은 월남 전선에서 산화한 옛 전우들과 아직도 고엽제로 고통 받는 전우들을 위해서 교회 갈때마다 그들을 위해 하나님께 간절한 기도를 하고 있다.
글 : 김수호 (안드레명상 발행인 주님의 교회 협동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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