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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08-10-10 17:3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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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산(해발 1240미터)

마음이 정하는 것이 아니라 운명이 정하는 것이 있다.
비구니의 길이다.
가지산은 운명의 산이다.
가지산 고산준령의 기운 위에 비구니승의 절 석남사가 터잡고 있기 때문이다.
마음의 결정으로 찾아온 숱한 여성들이 운명의 거부로 발걸음을 되돌렸을 것이다.
이미 마음의 결정을 내려놓고 운명이 정하는 길을 소망하는 여성들이 수도 없이 이곳에 찾아 왔으리라.
그래서 가지산은 여성의 산이다.

'가지산 석남사'의 돌표석을 바라본다.
하늘로 비상을 하는 날개짓의 독수리마냥 유려한 필체가 힘차다.
석남사 입구에서 올려다 보는 산이 활처럼 팔을 벌리고 있다.
정상부근에는 구름이 회오리를 일으켜 수줍음을 감추고 있다.
수줍어도 차마 고개숙일 수 없어 산은 그렇게 구름으로 감추고 있는가 보다.

돌판에는 노란 벼이싹이 고개숙이고 있다.
그리움이 발동한 바람결이 제법 세차게 벼이삭을 때리고 있건만 조금도 응수하지 않고 있다.
벼이삭의 들판을 멀리에 바라다 보면서 석남터널에서 산행을 시작한다.
가파른 오솔길 접어들며 산이 전하는 기운을 감지한다.
발걸음 하나 옮기자 숨바꼭질처럼 산속으로 몸이 빨려간다.

정상(해발 1240)
마음에 담은 시간이 하도 길어서 쉴 틈이 없다.
마음에 담은 생각이 하도 깊어서 말조차 삼간다.
마음에 담은 상상이 하도 맑아서 머리가 텅빈다.
쉬지도 않고 말도 삼가며 텅빈 머리로 오르는 정상의 가파른 길이 가볍다.
내보내면 가벼워지고 가벼워지면 더 편하게 돌아오는 것이다.
가벼움에 편승한 걸음이 되었다.

정상이 눈앞이다.
통채가 다 바위이다.
아래에서 바라다 볼때에는 그렇게도 수줍은 듯 모습을 감추고 있더니만,
가까이에 다가오니 어써 오라고 준비를 하고 있는 듯,
돌층계를 만들어 발디딜틈을 아기자기 만들어 놓고 있다.
먼 조망의 산계곡은 아직 푸르른 채색으로 젊은데,
노란 들판에서 막무가내로 달려온 세찬 바람이 벌써 겨울을 만들고 있다.
정상에서는 벌써 겨울채비를 끝낸 듯 즐비한 낙엽이 이불처럼 산을 덮고 있다.

어디에서 그렇게 성이 나서 불어온 바람인지,
이제는 회오리구름까지 대동하고서 정상을 뒤덮고 있다.
더 오를 곳이 없는 정상이 구름아래에 놓여 있다.
모든 것을 다 삼켜서 하늘로 쓸어올리는 용회오리처럼 크게 구름이 회오리를 만들고 있다.
먼 조망을 잃어버렸지만 마음에는 장관을 떠올리고 있다.
구름의 회오리에 실려 세속을 훌 떠나는 상상에 신나하고 있다.

쌀바위
어느 방향에서 보아도 폼나는 모습으로 우뚝한 바위가 쌀바위이다.
산 굽이 휘돌아 가는 발걸음이 가벼워지는 것은 마음비워짐에 연유하는 것도 있지만,
쌀바위의 아름다운 장관 때문이기도 하다.
바위에 올라 숨이 턱 막힐 듯 직선으로 암벽아래를 내려다 본다.
얼마나 많은 젊음이 그 암벽에 미쳐 정신을 잃었을까하는 생각에 젖어 본다.
맥박이 요동치던 젊음의 암벽도전이 활개를 치던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하다.
하얀 적설의 침묵 앞에서는 더욱 우뚝할 것이다.

상운산(해발114미터)
산행은 항상 앞으로하는 것보다 뒤로 하는 것이 더 많다.
인생이 뒤로하는 것보다 앞으로하는 것이 항상 더 많다고 생각하면서 사는 것에 비하면 산은 얼마나 진실한가.
쌀바위를 뒤로 한다.
구름위의 산인 상운산에 올라 멀리 청도의 운문댐의 아득함에 시선을 보낸다.
구름에 뭍힌 고헌산의 기품이 코앞에 와 있다.
갈참나무를 휘하에 거느린 상운산이 넉넉한 나무잎새처럼 넓다.
구름을 다 가지산의 정상으로 보낸 상운산이 할일이 없는 듯 한가를 누리고 있다.
한가의 시간에도 그 의미가 퇴색하지 않고 있다
어디에선가 구름을 몰고올 바람들이 그곳에 항시 대기하고 있다.

귀바위
산능성이에서는 아무리 찾으려 하여도 보이지 않는 바위가 귀바위이다.
숨어 있기에 더더욱 찾아 나선다.
긴 산능성이를 단숨에 달려온 듯 걸음에 아직 힘이 넘친다.
마음이 그렇게 정하고 있다.
산초입에서 다른 것을 다 놓치더라도 귀바위에는 꼭 당도하리라 다짐하였기 때문이다.
굳이 귀에 대고 속삭일 비밀이 있는 것도 아닌데,
산 단조로움에 마지막 한 형상을 만들고 있는 그 모습이 그저 대견한 것이다.
자기가 들은 것만 있고 전하는 것은 없는 그리하여 말이 전하는 싸움이 없는 세상을 가르쳐주려고 늘 그 자리에 있는가 보다.

늘 그러하듯이
입구에서 절로 향하는 길에는 운치가 머문다.
늘 그러하듯이
산자락에서 산정상을 올려다 보는 마음이 맑다.
늘 그러하듯이
하산하여 되돌아오는 발걸음이 무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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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극원 취재기자 정극원 취재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 대구대학교 법과대학 학장
    대구대학교 법대 졸업
    독일 콘스탄츠대학교 법대 법학박사
    한국헌법학회 총무이사(전)
    한국비교공법학회 총무이사(전)
    한국공법학회 기획이사
    한국토지공법학회 기획이사
    유럽헌법학회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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