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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09-06-09 23:3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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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수호 안드레 명상 발행인
<나라가 어지러울 때 마하트마 간디의 구국정신을 생각하자.>

1893년 남아프리카의 프레토리아로 달리든 야간열차의 1등칸에서 승차권 검사를 하던 백인 차장과 한 청년과의 언쟁이 벌어졌다. 백인 차장과 보안경찰은 “1등칸에 검둥이는 절대 못타”하면서 그를 3등칸으로 나가라고 고함을 쳤다. 그러나 이 승객은 1등표를 가지고 1등칸에 탔는데 무슨 소리냐고 항의를 했다.

기차가 마리쯔 브리끄역에 도착하자 백인 차장과 보안관은 이 승객을 양쪽에서 버쩍들어 창문밖으로 던저 버렸다. 캄캄한 밤 땅바닥에 떨어진 이 사람이 바로 영국 런던대학을 졸업한 24세의 청년 변호사 간디였다. (Gandhi) 간디는 마리쯔 브리끄역 대합실에서 꼬박 뜬눈으로 밤을 세우며 분을 삼키면서 자신의 앞날을 생각했다.

주권없는 식민지의 인도인으로서 특히 남아프리카에서 일하는 인도 동포들의 인권과 자유를 위해 이 오만하고 건방진 백인들과 싸울 것이냐! 그렇지 않으면 이 굴욕을 참고 고국으로 돌아가 편안한 변호사 생활을 해야 할 것이냐! 간디의 결론은 고국행을 포기했다.

간디의 고난의 역사와 그 위대한 인종(忍從)의 투쟁사는 캄캄한 밤 그가 차창 밖으로 내동댕이쳤던 마리쯔 브리끄역사에서 시작되었다. 간디가 이날밤 역 대합실에서 다짐한 그 피맺힌 결심은 자신의 생애에서 가장 창조적인 경험이었다고 후일 그의 자서전에서 밝혔다.

인도 상사의 법률고문으로 꼭 1년만 봉사하고 귀국하겠다고 이곳으로 왔던 간디는 이날밤의 사건으로 인해 무려 21년간을 이 악흑의 땅에서 인도 노동자들이 당하고 있는 억압과 착취와 인권을 위해 젊음을 다 바치고 말았다.

간디는 21년간 남아공에서 주권없는 식민지 나라의 변호사로 호텔 정문에서 또 관공서 정문에서 완전 거지 취급을 당하며 수 도없이 두둘겨 맞았다. 간디는 1869년 10월 2일에 태어나서 아라비아의 해안 포르반다르라는 조그만 왕국의 수상을 지낸 아버지 밑에서 부유하게 성장 13살에 결혼을 하고 19살에 영국으로 유학을 갔다.

간디가 유학길에 오르던 날 어머니 푸를리바이 앞에서 세가지 맹세를 했다. 즉 술과 육식과 여자를 멀리하겠다고 했다. 특히 간디의 철저한 채식주의는 훗날 그의 아들 마니라르가 폐렴으로 죽어갈 때 의사가 영양 보충으로 닭고기 수프를 권했지만 간디는 의사의 권고를 거절했다.

간디는 어려서부터 어머니의 경건한 종교적 분위기에서 자랐으며, <만인은 다 하나님의 피조물이다. 각자 신성불멸의 힘을 갖는다.> 이것이 간디의 확고부동한 신앙이었다.

-톨스토이와 간디의 관계

20세기 세계 역사는 인도의 간디를 비폭력과 무저항주의 실천의 대표적인 인물로 기록하고 있다. 간디가 비폭력 무저항 주의자가 된 것은 러시아의 대 문호 톨스토이의 영향이 큰 것으로 알려졌다. 간디의 청년시절 톨스토이는 이미 환갑을 넘긴 인생의 대 선배였다.

톨스토이는 간디와의 수많은 서신왕래를 통해 기독교의 진리와 무저항주의 철학을 강조했다. 특히 톨스토이가 간디에게 선물한 자신의 저서<하나님의 나라는 그대 마음 속에 있다>라는 책을 통해서 간디는 큰 감명을 받았다.

간디는 그의 자서전에서 구약성경보다 신약성경에서 많은 감동을 받았다고 했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마태복음 5장에서 7장까지의 예수님의 산상수훈을 애독했다는 것은 톨스토이의 생각과 같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성경의 산상수훈에서 솟는 샘물을 깊이 마셔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크게 후회할 것이다.
산상수훈의 가르침은 우리 모두를 위한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과 돈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

한편 이미 널리 알려진대로 톨스토이는 우연한 기회에 신약성경 마태복음의 산상수훈을 읽다가 흥분을 참지 못해 성경을 가슴에 품고 이 글은 내 생명이요, 기쁨이요, 영원한 진리의 등불이라고 크게 울었다고 한다.

이때부터 톨스토이는 자신의 문학에 대한 인생관을 성경의 산상수훈과 같이 살기로 결심하고 자신의 부귀영화를 모두 버리고 집을 나가게 됐다.

한편 간디도 이 산상수훈을 수없이 읽었을 것으로 추측되며 특히 산상수훈가운데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덕치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주며”…… 이 무저항주의적인 성경귀절에서 간디의 비폭력과 무저항주의가 잉태되었을 것이라고 예측할 수도 있다.

간디의 비폭력 무저항주의는 조국 인도를 독립시키는 새로운 무기가 되었다. 후일 간디의 비폭력 무저항 주의를 절대적 지지로 실천에 옮긴 대표적 인물이 미국의마틴루터 킹 목사였다. 미국의 인종차별 폐지와 흑인 민권 운동으로 희생된 킹목사의 위대한 업적을 인정한 미국정부는 그의 생일인 1월 15일을 국가 경축일로 정했다. 한 개인의 생일을 경축일로 지정한 것은 미국 역사상 죠지워싱턴 이래 두 번째 있는 일이었다.

위대한 영혼 마하트마 간디 드디어 아프리카에서 고국으로 돌아왔다.

간디는 1914년 세계 제1차 대전을 계기로 45세의 나이로 귀국했다. 인도의 모든 경제는 깊은 늪에 빠져있었고 고난과 빈곤 속에 방황하는 인도 국민들은 완전히 영국의 경제적 노예가 되어 있었다.

이러한 절망의 시대에 인도 독립운동에 가장 훌륭한 지도자가 귀국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인도의 전 국토가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간디가 움직이는 곳 마다 민중은 구름처럼 몰려들었고 간디의 얼굴을 단 한 번이라도 보겠다고 밀려드는 인파는 그야말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당시 인도 지성의 대변자며 동양의 시성(詩聖) 라빈드라나드 타고르는 전 인도 민중을 대표하여 간디에게 귀국 환영시를 바쳤다.

“위대한 영혼 마하트마 간디, 우주의 생명과 합치한 사람”…… 마하트마(mahatma)는 위대한 영혼이란 뜻으로 타고르가 이때 지어준 이름이다. 또한 인도의 네루는 그의 자서전<인도의 발견>에서 당시 간디의 귀국은 청풍<淸風>과도 같았고 특히 인도 민중의 마음속에 정신의 혁명을 가져왔다고 기록했다.

당시 간디가 한 번 연설할 때 모이는 군중의 숫자는 평균 40만에서 50만명이었다. 특히 간디는 군중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환호하거나 박수치는 것을 매우 싫어했으며, 항상 조용한 분위기에서 자신의 연설을 경청하는 것을 원했다.

간디가 영국에 대해 가장 분통을 토한 것이 1차대전의 결과였다. 인도는 당시 30억 파운드에 해당하는 전쟁비용과 120만명의 인도청년들이 영국을 위해 피를 흘렸다.

그러나 당시 영국 수상 로이드 죠오지는 전쟁이 끝난후 자신이 직접 약속했던 인도독립을 거부하고 오히려 독립운동자는 재판없이 바로 투옥하는 이른바 로울라트(Rowlatt), 법안을 만들었다.

-간디의 비폭력(Non-Violence) 비협력(Non-Cooperaton)과 국산품애용 운동

간디는 이때부터 영국정부를 배반하는 반영(反英) 운동과 비폭력, 비협력 운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하면서 인도 민중들에게 여덟가지 실천운동을 요구했다. 이 여덟가지 중에서도 특히 강조한 것이 영국 상품을 보이코드하고 국산품을 애용하자는 이른바 스와데시 운동이다.

간디는 인도의 자력갱생을 위해서 최우선 정책으로 찰카운동 즉 물레질 운동을 전국민에게 호소했다.
당시 인도는 목화의 대량 생산국이었지만 이 목화를 실로 만들지 못하고 목화를 그대로 싼 값으로 영국으로 수출하여 그 목화가 직물이 되어 다시 비싼 가격으로 수입해야 하는 처지였다.

간디가 전세계적으로 그의 이름이 널리 알려진 것은 영국의 원탁회의 참석 때였다. 원탁회의는 영국의 인도지배를 공식화시킨 기본법인 <인도통치법>의 개정을 둘러싸고 영국과 인도가 치열하게 벌린 국제회의다.

간디가 인도를 대표하여 제2차 원탁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영국으로 갈 때 간디는 영국 정부가 제공한 국빈대우의 귀빈실을 정중히 사양하고 3등실에서 물레질을 하면서 갔다.

그 당시 간디의 외출복 의상은 항상 정해져 있었는데 상의는 흰 천을 어깨와 가슴에 걸치고 하의는 무명바지에 허리띠를 맨 마치 우리나라 옛 시골 농촌의 여름날의 할아버지 옷차림이었다.

참고로 필자는 간디가 양복에 넥타이를멘 정장모습의 청년시절 사진을 처음 본 것은 1927년 1월 5일자 동아일보였다. 당시 간디는 인촌 김성수 선생에게 보낸 편지에서 “조선이 조선의 것이 되기를 바란다”라는 편지와 함께 넥타이 차림의 정장모습 사진도 함께 보도했다.

한편 3등실에서 반 나체로 물레질을 하면서 원탁회의에 가는 간디의 모습은 전 세계인들에게 큰 흥미꺼리였지만 그러나 간디의 이 물레질 사진을 보고 인도의 국민들은 탄식의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특히 이때 간디는 마르세유 세관원에게 소지품 검사를 하기 위해 자신의 가방을 열었을 때 “내가 가진거라고는 지난날 교도소에서 사용했던 이 밥 그릇과 염소젖을 담았던 이 깡통 그리고 모포 6장, 수건, 그리고 대단치도 않은 평판(評判) 이것 뿐이요”……

인도는 영국 원탁회의에 3번 참석했지만 아무런 효과도 얻지 못했다. 그러나 두번째 원탁회의때 앞에서 언급된 간디의 구국일념의 모습들이 인도 국민의 가슴에 본격적인 독립운동의 불을 부쳤다.

드디어 인도 국민들은 간디가 부르짖는 스와데시 경제운동에 총매진 했으며, 1차로 전 국민들의 금주운동이 일어나면서 술집들이 자진하여 간판을 내렸고 이어서 외국 상품 불매운동이 실천에 들어갔다. 이때 특히 강조할 것이 국민들은 이미 가지고 있던 외국 상품들을 본인이 직접 가지고 나와 뉴델리 광장에 쌓기 시작했다.

-뉴델리 광장에서 불태워진 인도 여성들의 사치품

인도 국민들은 뉴델리 광장에 산더미처럼 쌓여진 외국 상품을 보면서 다시는 외국 상품을 사지 말 것을 결의하고 이 상품을 불태우기로 했다. 그런데 이때 강력한 반대인물이 나타났다. 바로 타고르였다.

타고르는 이런 행동은 근로 결실의 파괴며 죄악이라고 하면서 이 좋은 옷들을 불태우지 말고 가난한 인도의 빈민들에게 나누어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간디의 주장은 정 반대였다.

이 사치품들을 빈민들에게 나눠주면 그들에게 일시적 기쁨은 주지만 그러나 이로 인해 우리의 독립은 더욱더 멀어질 것이며 또한 나날이 매춘부로 전락하는 빈민층 여인들에게 이 사치품들은 돈의 노예생활을 연장시키는 마약이 될 것이라고 했다.

이미 우리 국민들이 마음에 자부를 느끼고 내놓은 이 사치품을 불태우는 것은 경제적 손실이라기 보다는 3백년 영국의 식민지 생활을 청산하기 위한 즉 인도 독립을 위한 대 외과 수술이며 이 비장한 결심이야말로 인도 여성들이 첫 아들을 낳을 때 겪는 산고의 고통으로 생각하자고 역설했다.

결국 뉴델리 광장에 쌓여진 화려한 옷과 화장품 기타 각종 사치품들은 인도 국민들의 열광하는 환호속에 거대한 불길과 함께 타기 시작하여 그 화염이 뉴델리의 하늘을 검게 덮었다.

한편 간디와 타고르의 치열했던 이 논쟁에서 인도 민중이 간디를 더 지지한 것은 한마디로 영국 식민통치를 종식시킬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은 간디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타고르 역시 인도 독립을 위한 인도 국민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벵갈어 시집<기탄잘리>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타고르는 인도가 자랑하는 위대한 시인이요 종교 철학자였다. 그러나 타고르는 결국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하고 1941년 80생애를 마쳤다.

<운명이라는 수레바퀴는 언젠가 영국으로 하여금 대국 인도를 포기치 않으면 안될 것이다.> 이 말은 그가 생전에 영국을 향해 보낸 경고의 글이다.

또한 <한개의 등불이었던 코리아 다시한번 그 등불 켜지는 날에 그대 동방의 밝은 빛이 되리라> 이 시(詩)는 한국을 찬미하면서 일본에게 한국 독립의 당위성을 경고한 글이다. 앞서 언급된 간디가 동아일보의 인촌 김성수 선생에게 보낸 “조선은 조선의 것”이라는 편지도 역시 일본의 식민정책을 경고한 글이다.

한편 당시 인도국민들은 간디와 타고르에 대해 세계 인류사에 보기 드물게 한 시대에 국제적으로 널리 알려진 두사람의 훌륭한 민족지도자를 가졌다는 것에 대해 큰 자부심을 가졌다.

그러나 영국도 여기에 대항마로 내세운 인물이 세익스피어였다. 영국은 세익스피어야말로 인도 땅덩어리를 다 주어도 바꿀 수 없는 위대한 인물이라고 했다.

영국의 이 짧은 말 한마디가 인도 국민의 감정을 폭발시켰다. 특히 인도의 지성인들은 간디야말로 세익스피어 열사람하고도 바꿀 수 없다.

우리가 비록 3백년 영국의 식민지 생활을 했지만 간디 한사람을 민족지도자로 배출함으로서 우리는 3백년 식민지의 본전을 뽑고도 남았다고 응수했다. “권리를 주장할려면 의무를 다하라” 이 유명한 인도의 격언은 바로 간디가 한 말이다.

-대영제국을 굴복시킨 간디의 비폭력 무저항주의

한 나라의 독립은 칼이나 총으로만 쟁취할 수밖에 없다고 믿었던 세계 독립운동의 역사는 간디에 의해 바꾸어진 것을 인도 독립을 통해 증명되었다.

당시 대영제국이 그 막강한 군사력 즉 전투기 한 대 날려보지 못하고 대포 한방도 쏘아보지 못하고 인도를 독립시킬 수밖에 없었던 것은 국제여론이 아니라 바로 간디의 비폭력 무저항주의 때문이다.

원자폭탄도 진실과 비폭력을 이길수는 없다. 이 유명한 말은 간디가 발행한 <하리잔>이란 책에서 언급한 글이다. 간디는 죽음 직전까지간 11번의 단식투쟁과 수차레의 투옥을 당하면서도 끝까지 영국에 저항했다.

간디의 암살 명령을 받은 영국 특수부대원이 막상 간디의 얼굴을 보는 순간 간디의 진실하고 정직하고 온화한 그 모습에 차마 권총의 방아쇠가 당겨지지 않아 총을 버리고 도망쳤다고 한다.

지난 3월 5일 (2009년) 미국 뉴욕 경매장에서는 간디의 유품 중에서 둥근테안경, 회중시계, 가죽샌들, 접시, 사발등 다섯점이 28억원에 낙찰되었다. 그런데 이중 대부분이 당시 영국군 장교들이 간디로부터 직접 선물을 받은 것이다.

간디 사상에 제일먼저 앞세우는 것이 진실이며 비폭력은 두번째다. 진실과 정직과 겸손한 자세 이 세가지가 간디를 위대한 지도자로 만들었다.

간디가 청년시절 아버지의 병환을 간호하다가 갑자기 부인에 대한 욕정이 생각나 임신중인 부인의 방으로 들어갔는데 그 사이에 아버지가 운명했다.

결국 육욕(肉慾)을 참지 못해 아버지의 임종을 놓치고 말았다.
보통 사람의 경우 이런 내용을 자신의 자서전에서 기록하기는 다소 부끄러운 내용이지만 그는 사실대로 기록했다.간디의 정직과 진실이 자서전에서도 그대로 나타나 있다.

한편 1906년 간디 나이 37세때 부인 카스투르바이의 동의를 얻어 죽을 때까지 부부관계를 하지 않을 것을
약속하고 오누이처럼 지냈다. 간디는 인간이 육욕을 참는다는 것은 맨발로 칼날 위를 걷는 것과 같았다고 회고했다.

간디가 58세에서 60세 사이에 집필한 두권의 자서전 상, 하권은 오늘날 전세계인들에게 가장 고귀한 자서전으로 평가받고 있다. 지난날 로망롤랑은 간디를 한마디로 평해서 인도의 정신적 보석이라고 기록했으며, 토인비는 간디를 가리켜 20세기 최고의 위인이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한편 간디가 평생을 기다렸던 인도의 독립 기념식에 그는 참석을 거부했다. 이유는 바로 인도 독립은 하나가 아닌 두나라로 갈라진 독립이었기 때문이다. 즉 회교국인 파키스탄과 힌두교국인 인도로 분할 독립이 되고 말았다. 일평생을 조국 독립을 위해 살아온 간디에게는 너무나 허망한 일이었다.

그러나 간디는 여생을 계속해서 갈라진 조국의 민족화합을 위해 생명을 걸었다.
1948년 1월 30일 간디는 회교도와의 화해를 위한 5일간의 단식이 끝나고 5백여명이 참석한 저녁 기도회에 참석했다.

운명의 시간 오후 5시 79세의 간디는 회교국과의 화합을 절대 반대한다는 힌두교인 꼬제가 쏜 세발의 총탄을 맞았다. 간디는 잠시 정신을 차려 “오 하나님”을 부르면서 자신을 향해 총을 쏜 청년을 용서하라고 두 번 “람, 람”을 외치고 쓰러졌다. 비폭력의 성자는 엉뚱하게도 마침내 폭력에 의해 살해되고 말았다.

한편 지난 2월(2009년) 간디의 형상처럼 알려졌던 둥근테 안경을 비롯한 유품이 경매에 부친다는 뉴스가 전해지자 인도 정부와 간디의 후손들 그리고 11억 인도 국민들이 인도 구국의 아버지 간디에 대한 엄청난 모욕이라며 벌떼처럼 일어났다. 다행히 인도의 재벌 비제이 말리야가 180만달러에 낙찰 받아 인도에 기증했다.

끝으로 간디는 모든 죄악의 배후에는 물질이 숨어 있기 때문이라고 서양의 물질 문명을 진리앞에 고발했다.그래서 그는 항상 인도 민중에게 제발 돈의 노예가 되지 말자고 외쳤다.

오늘날 (2009년) 한국 정치사에 추악하게 전개되고 있는 돈의 노예들을 보면서, 특히 걱정되는 것이 우리 학생들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면서 공부를 하고 있을까?

돈의 노예가 되지 말라는 간디의 이 외침은 바로 성경의 진리를 암시하고 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악의 뿌리가 되나니”

(성경 디모데전서 6:10)
“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바를 족한줄알며”

(성경 히브리서 13: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리나” (성경 야고보서 1:15)

돈의 욕심은 부모 형제도 갈라지게 하고 자신도 망하고 크게는 국가의 기초도 흔들리게 한다.
역사는 의(義)의 불꽃이 꺼지고 그리고 의인(義人)의 외침이 없어질 때 그 국가는 위기에 처한다고 했다.
대한민국에는 왜 간디와 같은 지도자는 나오지 않을까?

글 : 김수호 (안드레명상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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