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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09-05-23 12:4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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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學, 哲學, 歷史가 다 죽어버린 요즘 세상에 '빅토르 위고'가 누구인지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냐마는 그래도 그의 작품을 뮤지컬로 개작한 '레.미제라블'은 오늘도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으니 그걸로 위안으로 삼아야겠다.

이명박이 어떻고 박근혜가 어떻고 하는 글엔 조회수 추천수도 많지만 빅토르 위고가 눈감은 날을 맞아 그의 이력을 간단히 소개하는 글에는 파리날릴 게 뻔하겠지. 그래도 이왕 시작한 일이니 앞으로 일년동안 계속할 작정이다.

20세기 프랑스가 자랑하는 文豪, 앙드레 지드에게 '프랑스 최고의 작가가 누구냐?'는 질문을 하자 지드의 대답은 이랬다

"그래도 빅토르 위고지. 사실은 사실이니까......"
뭔가 인정하긴 싫지만 어쩔 수 없이 인정한다는 투로 말했지만 이어 이렇게 부연한다.

"영국에 세익스피어가 있고 독일에 괴테가 있다면 프랑스엔 위고가 있다."

그가 태어났던 1802년은 나폴레옹이 등장해서 유럽을 공포에 떨게 했던 시기였는데 나폴레옹이 지휘하는 부대의 군인을 아버지로 두고 세상에 태어났던 위고는 젊은 시절 철저한 왕당파요 보수주의자였는데 나이가 들자 공화파로 변신해 요즘 말로 하자면 진보세력이 되었다.

절은 시절엔 진보요 나이들면 보수가 되는 정석을 꺼꾸로 실천한 사람이다.
(우리나라에서 제 꼴리는대로 써먹는 진보, 보수의 의미가 아님)

"나는 가난한 사람들의 영구차에 실려 무덤으로 가기를 원한다"는 그의 유언에 따라 볼품없는 수레에 실려 영웅들이 묻힌다는 팡테옹에 묻혔다. 그의 마지막 길을 보기 위해 무려 200여만명이 그를 찾았다. (당시 프랑스인구의 10%)

위고는 위대한 詩人, 소설가, 극작가이면서 열렬한 공화파 정치가이기도 했고(中年이후에) 사형폐지를 주장한 인도주의자였지만 프랑스인들에게 위고는 수사가 필요없는 '영웅'이었다.

청년기엔 왕당파, 낭만주의자였던 위고의 정치 문학적 경향이 공화파, 자유주의자, 인도주의자로 변신하게 된 것은 1830년의 7월 혁명과 1848년의 2월 혁명을 경험하면서였다.

투표로 통령의 위치에 오른 루이 나폴레옹(나중의나폴레옹 3세로 나폴레옹의 조카)이 친위 쿠테타을 일으켜 皇帝가 되자 이에 격렬히 반발하다 19년동안 해외로 망명하게 된다.

이때의 프랑스의 정치적 혼란과 자신에게 닥친 탄압의 경험을 배경으로 쓴 작품이 유명한 "레 미제라블"이고 이때 그의 나이 60이었다.

이후에도 정력적으로 작품활동에 정진해서 수많은 걸작들을 내놓았는데 노후에 이렇게 세기의 걸작을 생산한 사람이라면 위고 말고도 독일의 괴테와 이태리의 오페라 작곡가 베르디가 있다.(당시의 평균연령을 참작하면 요즘 나이로는 100살 넘어서도 활동한 셈이다.)

위고는 그런 집필활동 말고도 빈민구제, 언론자유보장, 유럽통합을 주장하고 유로貨의 출현을 예고하기도 한 뛰어난 통찰력과 혜안을 가진 사람이기도 했다.

<프런티어타임스 이태준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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