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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09-05-14 13:1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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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두봉
삼도봉(해발1177)-석기봉(1198)-민주지산(1242미터)

약속을 미루는 허가받은 핑계가 있다.
"일때문에 약속을 이행할 수가 없다"라는 핑계이다.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의 삼도를 아우르는 삼도봉이다.
오르는 길목에서 "일때문에"의 의미를 다시 해석하여 본다.
"일"은 하여야 하는 일(事)이 아니라 첫 번째의 일(一)을 의미하는 것일테다.
그리하여 산에 가는 것은 첫 번째의 일이고 그 이외의 모든 일들은 두 번째의 이가 되는 것이다.

산을 꿈꾸는 자에게 산은 일인 것이다.
진정으로 산을 꿈꾸는 자 삼도봉으로 가라.
그 곳에서는 후회없는 그 일을 만나게 된다.
청아한 물소리의 맑은 계곡 하나 지나면 곧바로 세속을 떠나게 된다.
겹겹의 산속으로 흔적을 감출 수 있으니 말이다.
삼도봉 오르는 올곧은 길은 황룡사 앞 계곡에서 시작된다.

계곡을 접어 들면 하늘을 볼 수가 없다.
산초입의 주연은 삼나무와 잣나무이기라도 한 듯,
생존의 본성때문에 하늘을 향하여 앞다투어 자라난 삼나무와 잣나무이다.
울창함을 만들어 하늘을 덮고 있다.

진정으로 산을 꿈꾸는 자 산을 오르면서 하늘을 쳐다보는 법이란 없다.
오로지 가야할 앞에만 몰두하고 응시하는 것이다.
샤머니즘의 시대에서는 큰 나무들을 통하여 하늘에 제일 먼저 닿을수 있다고 생각했다.
곧게 하늘로 자라난 삼나무와 잣나무 덕에 곁눈질로 살짝 하늘을 올려다 보지만 허사이다.

계곡이 넘쳐날 듯이 물이 흐른다.
울울창창의 숲과 내기라도 하려는 듯, 계
곡의 물은 사방을 다 삼키는 소리를 내면서 폭포를 만들고 있다.
아마도 인간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말라고 그렇게 호령하듯 흐르는가 보다.
언어를 잃버리고서야 산의 속내를 알아차린다.
언어를 감추고서야 비로소 무념무상의 경지에서 산을 찬찬히 바라다 본다.

쉼터고개에서 길게 한숨을 들이켜 본다.
산중턱에 겨우 이르렀건만 농무보다도 더 짙은 구름의 하얀 포말이 소리없이 얼굴을 강타한다.
배냥을 내려놓으니 등에서 하얀 안개가 피어나고 있다.
문득 나뭇잎을 올려다 보니 절제하고 있던 물방울들을 주루룩 지상으로 한꺼번에 떨어뜨린다.

터덜터덜 작은 나무숲의 터널을 지나 금새 헬기장 안부에 이른다.
억새가 우거진 능선이 짙은 구름을 좌우의 호위병처럼 거느리고 있다.
오름과 내림을 경계짓고 있는 나무계단을 따라 삼도봉을 올려다 본다.
맑게 햇살이 비추는 한낮의 시간이었다면 아마득한 산의 전설을 말하여 줄듯도 하건만,
말없는 억새가지 하나 꺽어 휘익 허공으로 날려본다.
삼도봉 오르는 시간도 그렇게 날아 오른다.

산깊은 삼도봉 정상에서 팔도사람을 만난다.
음성의 왁짜지껄함만으로 본다면 저자거리보다 더 시끌하다.
잠시간의 머뭄에서 쉽게 알아듣지 못하는 각양각색의 억양을 만난다.
인가 두 채가 고작인 무주 설천이라는 곳의 자기 집이라는 사람이다.
산에 올랐으니 방향을 잃고서 길을 묻는 순박한 사람들이다.

술 한잔을 권한다.
지난 봄에 왔을 때 그리도 하늘이 맑아 황악산, 가지산, 덕유산이 손에 잡힐 듯 다 보이더니만,
어렴풋하게 먼 방향만 가르켜 준다.
서울에서 온 사람들과 산인사를 나눈다.
대전에서 온 사람에게 사진 한장을 부탁한다.
구미에서 온 사람에게 밀감 한 개를 얻는다.
어디에서이건 그 무엇이라도 나누는 삼도봉이다.

석기봉에 오른다.
산의 운치가 있다.
한발한발 보폭을 옮길 때마다 울려오는 땅울림을 듣는다.
바위밑으로 졸졸 흐르는 물소리가 만들어 내는 맑은 소리 같다.
석기봉으로 구름을 몰아가는 세찬 바람소리 같기도 하다.
잎사귀 넓은 상수리나무의 원만한 메아리 같기도 하다.

석기봉 바로 아래 정자가 있다.
충북 영동의 방향으로만 소통을 하도록 만든 정자이다.
영동군에서 지었기에 그렇게 방향을 잡고 있는 것이다.
신선이 되어 마음의 바둑판을 정자바닥에 그려놓고 마음의 바둑 한판을 거나하게 둔다.

한치 앞도 바라다 볼 수 없는 구름이 소용돌이를 일으키고 있다.
싸늘한 바람이 회돌이를 하고 있다.
그렇게 자신의 위용을 내보이고서야 직성이 다 풀리는 듯,
직선으로 우뚝 솟은 석기봉이 그윽하게 서있다.
석시봉이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맑은 절경을 감춘 고혹스러운 아름다움만이 있다.
온 산이 다 구름에 가리어 있는데 오직 석기봉만 눈앞에 솟아 있다.
풍경과 절경이다.
다른 비교를 범접하지 않는 석기봉 홀로의 독무대이다.

민주지산에는 평온이 머문다.
석기봉까지의 긴 산여정들이 아쉬움을 남긴다.
내친김에 민주지산으로 향하건만 인적이 드물다.
산정상의 바위들이 태고의 채색을 밞아 모나지 않고 평평하다.
백두대간의 기풍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듯,
한켠으로는 각호산을 다른 한켠에서는 석기봉을 나란히 하고 있다.
가만 보노라면,
더 높이 솟은 자신을 뽐내려 하지 않는다.
내색이라고는 조금도 없이 오직 같은 눈높이로 산들이 어깨동무하고 있다.

삼도봉, 석기봉, 민주지산이 함께 떠오른다.
하산이 너무나 아까운 것이다.
산을 꿈꾸는 자 발길을 돌려 하산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꿈을 뒤로 하고 내려오는 발길이 그 무게가 천근만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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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극원 취재기자 정극원 취재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 대구대학교 법과대학 학장
    대구대학교 법대 졸업
    독일 콘스탄츠대학교 법대 법학박사
    한국헌법학회 총무이사(전)
    한국비교공법학회 총무이사(전)
    한국공법학회 기획이사
    한국토지공법학회 기획이사
    유럽헌법학회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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