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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데요시의 세기적인 오판 - 일본은 투입병력의 50%를 잃은 채 목표도 달성하지 못하고 퇴각 - 문화재 등 약탈품과 포로를 일본으로 끌고 갔다 - 조선 인구 500만 중 3분의 1이 전쟁으로 희생
  • 기사등록 2019-03-23 10:5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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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팔웅 논설실장


히데요시의 세기적인 오판

* 조 • 일 전쟁은 16세기말 히데요시의 오판으로 일어났다.

1592413(양력 523)선조 25, 조 • 일 전쟁(임진왜란)이 발발, 1598(무술년)11월까지 무려 7년 동안 조선 땅에서만 전투를 전개했다. 이 조•일 전쟁은 조선 • 명나라 • 일본 등 3국이 거의 50만 명이 넘는 병력을 투입했으며 동양 근대사에서 20세기 초 러 • 일 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300여년 동안 일어났던 전쟁 중 가장 규모가 컸던 동아시아의 국제전이었다.


일본에서는 전쟁영웅으로 받들고 있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6세 때에 가출해 당대의 명장 ‘오다 노부나가’의 당번병으로 들어가 무사로 입신해 전투에 큰 공을 세워 장수로 명성을 얻었다. ‘오다 노부나가’가 죽자 그의 계승자가 됐다.


조 • 일 전쟁의 기획자이며 명령자인 ‘히데요시’는 156cm의 단구에 못생긴 인물이다. 1590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55세 때 일본 66개주를 통일한 주역이 되었다. ‘히데요시’가 권력을 장악했으나 전국 도처에서 영주와 그의 세력들이 불만을 토로하기 시작하자 ‘히데요시’에게는 돌파구가 필요했다.


그 돌파구가 조선 침공이다.

히데요시는 각지의 영주들에게 새로운 선박 2000척을 만들라고 명령, 전쟁준비에 몰두했다. 그러나 건조된 선박들은 부실공사로 해상에서 제대로 기능을 수행하지 못했다.

1592312일 조선 침공군이 나고야를 출발해 쓰시마의 병력과 합류했다. 이 때 1진 사령관은 ‘고니시 유카나가’(小西行長), 쓰시마 영주 ‘소오 요시모토’로 18,700명의 전투병력, 700여척의 선박에 분승해 412일 쓰시마 섬을 출발 413일 부산포에 상륙함으로써 조 • 일 전쟁(임진왜란)이 시작된 것이다.


* 일본의 조선 침략이 좌절된 원인.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의 임금 조정 백성 등 모두가 무능하고 썩어빠진 나라로 알고 조선을 당장이라도 접수할 수 있다고 자신하며 조선을 완전히 무시했다. 그러나 히데요시의 판단은 시작부터 세기적인 오판으로 이어졌다. 일본군이 조선을 침공 후에 예상하지도 못한 의병이 전국 도처에서 궐기하고 명나라가 참전하면서 20여만의 병력으로는 조선 점령이 불가하다는 것을 '히데요시‘는 뒤 늦게 깨달았다.

* 조선은 200년을 버텨온 저력이 있는 나라이며 22만 평방km 면적을 20만 병력으로 점령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히데요시의세기적인 오판은 병력 동원에서부터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 당시 일본의 인구는 2천만 정도로 추산되는데 ’히데요시‘가 동 원할 수 있는 병력은 30만 명이었으니 당초부터 이 병력으로 조선을 점령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 오판이었다.


* 그리고 의병의 궐기와 이순신의 수군 전력이 막강하다는 정보 가 없어 이들의 활동을 예상치 못하는 치명적이며 세기적인 전 략상의 실수와 오판을 빚은 것이다.


* 조선의 지방 수령들이 수탈이 극심해 일본군이 처 들어가면 조 선 백성들이 크게 환영할 것으로 알았다는 ‘히데요시’의 결정적 인 오판, 그러나 조선 백성들은 일본의 지배를 단호하게 거부했.


* 일본군이 함경도 회령까지 도달하고 전라도를 제외한 국토를 거의 점령하면서 보급선이 길게 종선으로 군수품을 현지까지전달하는데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 이는 각지의 의병들이 일본군의 보급품 수송을 공격해 불태우거나 빼앗았기 때문이다.


* 의병들의 눈부신 활약은 백성들의 애국심과 자각을 불러 일으켰으며 그동안 지배의 대상으로 수동적이던 백성이 나라를 구하는 주체가 되었다.

* 일본군은 보급품을 지키기 위해 3-5만의 병력을 배치해야 함으로 전력의 약화를 초래했다.

* 조선 수군이 일본군의 서해 해상로로 진격하려는 길을 봉쇄하는 바람에 군수품 조달에 큰 어려움에 봉착하는 작전상의 실수를 범했다.


* 이순신이 일본군의 서해 진격로를 차단해 일본군이 당초에 계획했던 한성과 평양으로 진격하려는 수륙병진 작전을 포기하게 했다.이는 일본군의 전략상의 허점을 드러낸 것이다.


o 1904년 러 • 일 전쟁을 승리로 이끈 일본 해군사령관 ‘도고 헤이 하치로’ 제독은 ‘나를 영국 넬슨제독에 비유하는 것은 몰라도 조선의 이순신과 비유하는 것은 도저히 감당하지 못할 일이라고 술회하기도 했다.


* 전쟁 초반 약 6개월 정도 승승장구하던 일본군이 겨울이 시작되면서 조선의 매서운 겨울 추위에 동사하는 병사가 속출하는 등 기세가 꺾여 차츰 밀리기 시작했다.

1598년 히데요시의 병사가 조, 일 전쟁의 종결을 촉진했다.

조•일 전쟁으로 일본이 조선에서 얻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결국 일본군의 패인은 한마디로 애국심에 불타는 조선의 의병과 수군 그리고 명나라의 파병 때문으로 결론지었다.


o 조 • 일 전쟁의 결과


일본은 투입병력의 50%를 잃은 채 목표도 달성하지 못하고 퇴각 했다. 다만 적지 않은 문화재 등 약탈품과 포로를 일본으로 끌고 갔다. 전쟁의 결과 조선은 국토가 피폐화 되었고, 당시 조선 인구는 500만 정도였는데 3분의 1이 전쟁으로 죽었다.


반면 일본군은 전투에서 죽고, 질병으로 죽고, 동사자가 속출하, 굶어죽고, 도망치다 조선백성에게 붙잡혀 맞아죽고 그래서 일본군의 사기와 전력은 날이 갈 수록 약화되어 전쟁을 더 이상 수행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일본 본토로 철수해 전쟁이 종결 된 것이다.



결국 조 일 전쟁은 승자도 패자도 없는 전쟁으로 조선, 명나, 일본 등 모두 피해가 컸고 특히 조선만 박살이 난 지경이었다. 한 국가의 지도자가 이루지 못할 꿈과 세기적인 오판은 국가를 거덜나게 하고 백성을 고통에 빠지게 한다는 교훈을 남겼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그런 인물이었다.

: 이팔웅 논설위원 2019. 3. 20.

참고문헌. 조일전쟁. 임진왜란 비겁한 승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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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논설집필 직접출연방송
    -TBS방송 프리랜서 시사해설 담당
    -시니어저널 신문 논설위원
    -관동대학교 출강(컴뮤니케이션강의)
    -월드뉴스 논설실장/보도총괄본부장
    -바른말실천운동시민협의회 사무처장
    -현재 월드뉴스 논설위원(논설실장)
    -월드뉴스 보도기획총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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