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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09-01-07 22:4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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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사랑하는 아내 윤화영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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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미국 남뉴저지 체리힐 제일교회 성가대원 김남옥 집사가 루게릭 병으로 시한부 인생을 살아가는 그의 아내 윤화영씨에게 드리는 글을 안드레명상에 소개해 드립니다.

지금 제 아내 윤화영의 정확한 질병의 명칭은 Amyotrophic Lateral Sclersis(ALS) Lou Gehrigs Disease 즉 근육이 축소되어가는 루게릭이란 병이다. 현재 상태를 간단히 요약하면 정신만 살아있고 그외 인체의 모든 기관은 서서히 퇴화되어가는 증상이다.

사실 안드레명상 집필자인 김수호 장로의 우리집 방문을 정중히 사양한 것도 제 아내에게 어떤 질문을 해본들 그는 말을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 루게릭의 생존확률은 5년이상이 그의 없는 절망과 불치의 병이다. 나의 사랑하는 아내 윤화영! 그는 너무나도 예쁘고 사랑스러웠다.

지금 침대에 누워있는 모습을 남들이 보기에는 뼈만남은 처량한 모습으로 보이겠지만 내가 보기에는 아름다운 공주인형처럼 너무나 예뻐 보인다. 나의 아내 윤화영이 루게릭이란 병명을 알게된 것은 발병 1년이 지난 2002년도 였다.

나는 초창기 아내의 병명이라도 알고 싶어 뉴욕을 비롯한 미국의 여러 도시 여러 병원을 안가본 곳이 없었다. 수십번의 X-RAY촬영, MRI검사, 뇌파검사, SPINE검사 등 별별 검사를 다 받았다. 병원마다 의사마다 똑같은 검사를 할때는 귀찮다는 생각보다 제발 더 많이 더 자세하게 확실한 진단을 내려 달라고 애원했다.

그러나 어떤 의사들은 정확한 병명을 알려주지는 않고 오히려 역조사를 하며 계속 재검사를 요구할 때는 그 의사에 대한 믿음 보다는 실망과 불신, 분노, 그리고 더 많은 좌절감에 빠졌다. 그동안 우리 부부는 부모 몰래 또 아이들 몰래 밤마다 참 울기도 많이 울었다.

당시 아내 나이 30중반에 그 절망과 탄식의 슬픈 울음소리는 차마 들을 수가 없었다. 하다 못해 아내 나이가 50이상이라도 되었다면 어느 정도 인내심으로 남편 앞에서는 우는 모습은 다소나마 자제를 했을텐데 그러나 아내는 나를 항상 마치 친정 어머니처럼 껴안고 한없이 울었다.

그런데다 남편으로서 아내에게 격려를 해주고 투병의 용기를 주어야 할텐데 오히려 내가 아내를 껴안고 덩달아 함께 울어댔으니……아내의 몸은 절망감과 더불어 하루가 다르게 말라갔다.

고국에 가면 이 병을 고칠 수 있다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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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런 절망가운데 한가닥 희망과 삶의 용기가 생겼다. 그것은 어느 친지가 이 병은 한국으로 가면 고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즉, 중풍환자를 고치는 한국의 유명한 한의대 병원에 입원을 시키라는 것이다.그 분께서는 오늘날 양의가 못 고치는 병을 한의가 고칠수 있다는 확신을 주었다.

나는 직장 때문에 아내만 한국으로 보냈다. 집을 나서는 나의 사랑하는 아내 윤화영은 참으로 오랜만에 나에게 미소까지 지으면서 “꼭 낳아 올께요”하고 손을 흔들었다. 나는 매일 매일 전화로 아내의 치료상황을 들으면서 격려와 용기를 주었다.

계속되는 침술, 뜸, 물리치료, 그리고 갖가지 한약 등을 열심히 먹는다고 했다.
의료보험이 안되니 매일같이 들어가는 치료비는 눈덩이처럼 불어났지만 그래도 매일같이 전화통화에서 아내의 힘찬 음성소리를 들을 때마다 치료비는 아무 걱정말고 열심히 치료만 받으라고 용기를 주었다.

그런데 어느날 서울의 처남으로부터 걸려온 전화는 매우 불안하고 안타까움에 차 있었다. 나는 즉시 한국으로 가 처가에서 두달만에 아내의 모습을 보는 순간 억장이 무너졌다. 두달동안 계속된 침술과 뜸, 한약 복용, 기타 물리치료 등으로 아내의 몸은 그야말로 서리맞은 겨울 배추처럼 보였다.

그럼 전화할 때마다 그렇게 힘찬 그 음성은 도대체 어디서 나왔단 말인가?
그것은 나를 안심시키기 위해 있는 힘을 다해 말을 했던 것이다. 다음날 나는 아내를 데리고 한의대 병원으로 갔다.

두달전 혼자서 비행기를 타고 갈 정도의 건강했던 몸이 지금은 보행의 장애까지 왔고 말씨조차 어눌해졌으며 병은 더 악화되고 있었다. 우리들의 한가닥희망은 산산조각이 났다. 담당의사는 최종진단으로 불치의 병으로 알려진 루게릭이라고 했다.

그럼 두달만에 비로서 루게릭을 알게 되었는지 아니면 처음부터 루게릭이란 것을 감지하고도 한의학으로 고쳐볼려고 시도했다가 안되니까 포기한 것인지? 나는 단 한마디 질문도 하지 않고 담당의사를 원망의 눈으로 쏘아 보고 단 2분만에 진료실을 박차고 나와 버렸다.

남들은 병이 완치되어 가족들의 포옹을 받으며 즐겁게 병원문을 나서는데 우리 부부는 갈곳 없는 고아처럼 멍하니 서 있었다. 흰 까운을 입은 의사가 지나가면 우리 마누라 좀 살려달라고 고함을 치고 싶을 정도로 나의 감정은 극도로 불안하고 초조했다.

나는 보따리를 안은체 힘없이 계단에 앉아 있는 아내를 일으켜 세우고 우리 무조건 여행이나 가자면서 동생이 있는 부산으로 갔다. 우리는 한달간 무조건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을 찾았으며, 특히 아내가 좋아하는 바닷가를 자주 갔다.

그리고 먹고 싶은 것도 자주 먹으면서 나는 이 여행이 우리 부부로서 마지막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한달간의 부산에서 여행을 마치고 다시 서울로 올라왔다.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데 친지들이 우리를 대하는 태도는 너무나 어색하기만 느껴졌다. 그래서 우리 부부는 하루라도 더 이곳에 있을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고 그 다음날 당장 미국으로 왔다.

우리는 점점 더 어두운 장막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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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점 혼란스러워진 내 마음은 모든 일을 엉망으로 만들었고 하루 하루의 생활은 이유없는 짜증으로 진행되었다. 그리고 평소 잘 알지도 못하는 교인들의 방문은 이상하리만치 나에게는 심술같은게 생겨났고 날이갈수록 내 개인의 울타리는 높아만 갔다.

특히 직장 퇴직후 미국으로 와서 은퇴생활로 여생을 보내던 부모님의 입장이 날이 갈수록 난처해졌다. 수심에 찬 부모님을 볼때마다 나는 죄인이 된것 같았다. 그러나 지금 이 상황에 만일 부모님이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지금 아내의 대소변과 각종 병수발을 부모님이 다 해냈다. 그런 부모님 덕분에 나는 직장생활을 계속 할수 있었고 또 아이들도 학교를 잘 다닐 수 있었다. 사실 그동안 우리 가정은 크게 웃는 소리가 이미 사라진지 오래 되었고 가족간의 우울한 얼굴들만 보였을 뿐이다.

그럼 지금부터 주 예수님이 우리 가정에 어떻게 역사했는지를 안드레명상 독자 여러분에게 가감없이 기록하고저 한다. 나는 서울중앙고등학교를 다닐 때부터 교회를 다녔다. 그렇게 알게된 예수님은 천천히 아주 천천히 나를 기다리고 계셨고 또한 많은 사랑을 나에게 주셨지만 나는 천방지축으로 살다보니 그 귀한 사랑을 알기까지는 너무나도 오랜 시간이 흘렀다.

크리스찬 학교를 다녔지만 나는 항상 형식적인 신앙생활이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식사때 몇마디 기도하고 주일날 교회가고 또 결혼해서 아이들이 태어나고 그러다가 매사에 좋은 일이 생기면 다 내가 잘해서 생긴 일이라고 자화자찬했던 사람이다.

그러니 내 인생의 중심에는 예수님이란 존재는 아예 없었다. 그래서 기도를 하면서도 그 기도를 받아줄 주체가 없었던 것이다. 더구나 아내의 병이 발병한 후부터 나의 신앙은 더 퇴보하는 것 같았다. 첩첩산중처럼 진행되는 그 고난의 여정에서 나는 남몰래 수없이 탄식하고 울었다.

그러던 어느날 보스톤에 있는 어느 목사님께서 나를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사람들 만나기를 싫어하는 나는 귀찮지만 그래도 먼길에서 온 목사님을 생각해서 약속된 장소로 나갔다. 절망의 나락으로 빠져가는 우리 가정에 주님의 손길이 다가왔다.

목사님은 나를 만나자마자 다짜고짜로 자기와 같이 새롭게 신앙생활을 하자면서 나를 위한 감사기도부터 시작했다. 순간 나는 내가 지금 어떤 절망 속에 어떻게 살아가는지 나의 형편을 목사님이 잘 알면서도 어떻게 감사하다는 기도를 하실까?

나에겐 지금 감사할 것이라고는 단 한가지도 없고 오히려 하나님에 대한 섭섭한 마음 뿐이다. 그런데 목사님이 기도중에 갑자기 목이 메이더니 급기야는 눈믈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 순간 나의 마음에도 표현할 수 없는 평안이 찾아왔다.

처음 겪는 일이라 다소 당황을 했지만 나는 그 목사님의 뜻에 따라 함께 신앙생활을 하면서 전에는 행하지 않았던 나만의 기도를 하면서 성경말씀에 심취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목사님께 요청하여 기도원을 찾아 1주일간의 난생처음 금식기도를 시작했다.

조그마한 방에서 간절한 나의 기도는 처음에는 왜 그렇게도 어색했든지 그러나 시간이 가면서 나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기도는 기도가 아니라 마치 어릴적 엄마에게 매달리며 울어대는 소리와 같았다. “주님!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지금 저 기도를 듣고 계십니까? 저는 확실하게 주님을 알기를 원하며 주님을 영접코자 하오니 저를 좀 붙잡아 주십시오!…… 이 말이 내가 하는 기도의 전부였다. 더 이상의 기도의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래도 기도를 하고 난후 나는 마치 한여름 낮 사이다를 마신 것 같이 가슴이 시원해졌으며 그리고 한참 기도를 하다 눈을 떠보니 창밖에는 꽁꽁 얼어붙은 호수 한가운데 한쌍의 백조가 너무나도 평화롭게 노닐고 있었다. 저렇게 추운날씨 그것도 얼음 위에서…… 백조는 마치 나를 가까이 오라는 듯 날개를 들어보이기도 했다.

나는 백조의 하얀 날개짓에 이끌리듯 방문을 열고 나서자 따스한 겨울태양이 나를 감싸주었는지 얼음판을 걸어도 춥지가 않았다. 그 백조를 바라보면서 나는 형언할 수 없는 마음의 평안을 찾았다.
그리고 그 백조의 평화스러운 모습을 보면서 나는 다짐을 했다.

나의 형편이 아무리 고통스럽더라도 나를 사랑하는 주님이 내옆에 계신다면 나는 그 어떤 괴로움도 이길 수 있을 것이라는 신앙의 다짐을 가졌다. 그리고 금식기간중 나는 처음으로 성경을 완독하는 기쁨도 가졌다. 기도원에서 돌아온 나의 밝은 모습을 본 아내와 가족들은 감짝 놀랐고 이때부터 우리 집안에는 웃음소리가 나고 가족들의 기도도 열심을 다했다.

한알의 밀알이 아내에게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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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 아내 윤화영의 얼굴이 이상하게 보였다.
항상 창백했던 그 얼굴이 오늘은 완전 사색이 된채 떨고 있었다. 내용인즉 임신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이를 꼭 낳아야 하겠다는 비장한 표정까지 지었다.

나는 순간 주저 앉았다. 자기몸 하나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통증으로 하루 하루를 살아가는 판국에 아이를 낳겠다니…… 나는 벌떡 일어나 아내를 껴안았다. 나날이 바싹바싹 말라가는 이 몸에! 손바닥만한 이 배안에 새로운 생명이 싹트고 있다는 사실!

나는 모든 책임이 나에게 있다는 사실을 주님께 눈물로 회개하며 깊은 고뇌에 빠져들었다. 도대체 이 난감한 사건을 어떻게 해야 할까? 하루가 지난 다음날 우리 부부는 우리 마음대로 함부로 아이를 뗄수 없다고 합의를 하고 나는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다. “생명을 주시는이도 생명을 거두어 가시는 것도 오직 전지전능한 하나님이십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나는 그때부터 산부인과, 소아과, 심장의학과, 마취과 등 각 분야의 의사들을 만나면서 아내의 출산문제를 두고 수도없이 토의했다. 그들의 대답은 모두가 한가지였다. 즉, 루게릭 환자의 임신도 기적이지만 특히 루게릭 환자가 아이를 출산한 예는 미국에서는 전무하다는 사실을 말해 주었다.

그러나 아내는 분명하게 “내 생명은 끝나도 내 아이의 생명은 하나님께서 확실하게 지켜주실 것”이라면서 오히려 불안에 떨고 있는 나를 위로해 주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태중에 있는 아이의 활동이 점점 커 가면서 아내의 평소 힘든 호흡도 곤란을 느끼기 시작했다.

아내의 숨결이 점차 힘들고 절박한 상황이 지속되자 우리는 유도분만을 택하는 방법 이외에는 다른 조치를 취할 수 없었다. 이렇게 해서 한달을 덜 채우고 아들 영준이가 태어났다. 그때 아내 나이 38세였다. 한편 앞서 언급된 의사들의 소문으로 아내의 임신과 출산이 미국 의학계의 관심사로 등장했다.

그리고 뉴욕의 17번 채널 TV에서 아내와 특별대담 프로그램까지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내는 TV 대담을 사양하고 아들 영준이의 앞날을 온전히 하나님께 맡긴다고 했다. 그리고 딸만 둘 있는데 손자를 부모님께 안겨준 아내의 표정은 너무나 행복해 보였다.

한편 영준이는 태어날 때 체중미달에 심한 호흡곤란 등이 있었지만 하나님은 영준이를 완전 정상아로 성장시키기 시작했다. 생존기간 5년의 진단을 받았던 나의 사랑하는 아내 윤화영은 현재 (2008년 12월 현재) 7년째를 살고 있다. 아마 하나님께서 영준이를 좀더 보살피라고 아내의 생명을 더 연장시켜 주시는 것으로 나는 확신하고 있다.

특히 내가 출석하는 체리힐 제일교회 성도들과 목사님의 심방기도를 나는 한없이 감사하고 있다.
한편 지금 아내의 상태는 아무말도 못하고 눈만 깜박이며 모든 신체기관은 계속 말라가고 있다. 현재 다섯 살인 영준이는 교회에서 같은 나이 또래의 아이들 보다 제일 튼튼하고 또 얼굴이 잘생겨서 유치부에서 제일 인기가 있다고 한다.

교회에서 예배가 끝나면 나는 세 아이와 같이 모여서 교회 식당에서 식사를 한다.
그때마다 우리 영준이는 자기 친구가 엄마들과 함께 식사하는 모습을 물끄러미 보고 있을 때가 많다.
나는 우리 영준이의 그런 모습을 볼때마다 목이 메어 음식이 넘어가지 않는다.

영준이가 교회에서 집에 돌아오면 엄마에게 달려가 오늘 유치부에서 배운 찬송가와 그리고 영어설교를 엄마 앞에서 또렷하게 말한다. 그때는 아내도 눈을 더 크게 깜박이며 감격의 표정을 짖는다. 이제 고등학교 3학년이된 큰딸과 그 아래 둘째딸도 지난날의 그 악몽에서 벗어나 이제 마음의 평강을 찾았다.

그러나 언젠가는 어머니와의 이별이 있을 것을 알고 미리미리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아내가 몸이 성한시절 우리교회 유치부에서 열심히 봉사했던 것을 생각하면서 나도 현재 체리힐 제일교회 찬양대원으로 봉사하고 있다. 그리고 현재 내가 아내와의 유일한 대화 방법은 내가 글자를 적어서 하는 필담이다.

건강했던 그 시절 흘러간 추억을 회상하는 나의 사랑하는 아내 윤화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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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명상에 잠길때가 자주 있는데 그때는 지난날 자신의 건강했던 모습과 그리고 우리들의 고국방문 추억을 회상하고 있었다. 한국에 가서 비록 병은 못고치고 왔지만 그때 아내가 가고 싶어했던 해운대 관광에서 먹고 싶은 것도 실컷 먹었다.

특히 해운대 백사장에서 동백섬까지 백사장을 걷는 코스는 자신의 건강에도 크게 무리가 가지 않아 아내는 매우 좋아했다. 그때 너무나 오랜만에 나는 아내의 함박웃음을 보았다. 그러나 그때 나는 마음 속으로 중얼거렸다.

“사랑하는 나의 아내 윤화영아! 이것이 우리가 부부로서 손을 잡고 걸어가는 마지막 여행이야, 실컷 웃어라”…… 아내 윤화영은 남들이 지금의 우리 모습을 좀 봐 주었으면 하는 표정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과거 같으면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항상 못마땅했던 그가 아닌가?

아내는 찰삭거리는 바닷물을 보면서 “우리 매일같이 이 백사장을 걷자”고 속삭였다. 그때 멀리 도로가의 자동차에서 흘러나오는 노래소리가 우리 부부의 마음을 파고 들었다. 아내는 나의 허리를 쿡지르면서 “당신 제일 좋아하는 18번 노래가 나오네”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헤어지지 말자고 맹세를 하고 다짐을 하던 너와 내가 아닌가, 세월이 가고 또 너도 가고 만날길이 없다면 못난 미련을 던져 버리자 저바다 멀리 멀리』지난날 노래방에서 이민생활의 고달픔을 달래며 고국이 그리울 때마다 내가 자주 불렀던 “해운대 에레지”란 노래였다.

노래의 가사를 생각하며 우리는 서로를 보며 피식 웃었지만 노래가 계속 나오자 아내는 듣기 싫어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날따라 내가 과거에 그렇게도 좋아했던 그 노래가 그날은 나의 가슴을 사정없이 찌르며 파고 들었다.

『백사장에서 동백섬에서 속삭이던 그 날이 오고 또가는 바닷물 따라 들려오네 지금도 이제는 다시 두번 또다시 만날길이 없다면 못난 미련을 던져버리자 저바다 멀리 멀리』 나는 지금 그 날 그 백사장에서 들었던 그 노래를 생각하면 마치 내가 다시 나혼자 그 백사장을 찾아 6년전 아내와의 그 아픈 추억을 회상하는 그 노래의 주인공이 된것 같아 눈물이 핑돈다.

이제 이 글의 끝을 맺고자 한다. 주님은 먼 시간 전부터 나를 찾았지만 나는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방황했다. 구원의 중심이신 주 예수님께서 참담했던 우리 가정에 어느 날부터 우리 가족 모두에게 미소를 머금게 했고 돌덩이처럼 무거운 나의 가슴에 알수 없는 위로와 평강을 주셨다.

그리하여 항상 무거운 침묵만 흐르던 우리 가족들에게 평안과 사랑을 주신 것을 나는 너무나도 감사하게 생각한다. 이제 주님만이 우리의 반석이시며 피난처이심을 믿사오며 나의 사랑하는 아내 윤화영을 한알의 밀알이 되게하여 아들 영준이를 이땅에 보내주신 하나님의 그 오묘한 섭리를 제 마음대로 판단하기에는 저가 너무나 부족한 인간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저의 개인적인 글을 안드레명상에 게재 시켜준 김수호 장로님께 감사를 드리며, 이제 안드레명상 독자 여러분에게 한가지 부탁을 드리지 않을 수 없다. 저의 아들 영준이에게 엄마의 존재는 너무나도 크다고 본다.

남들은 지금 제 아내를 식물인간으로 보지만 우리 영준이에게는 비록 식물인간 엄마지만 그래도 매일같이 엄마가 옆에 있다는 그것만으로도 영준이는 행복하다. 이 안드레명상을 읽는 독자 여러분에게 나의 사랑하는 아내 윤화영의 생명을 연장시켜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좀 해 주시기를 간절히 부탁드리는 제 심중이 지금 얼마나 갈급한 것인지를 이해해 주기 바랍니다. 글 : 김남옥


※ 안드레명상은 다음 95호에도 해외 취재편이 게재됨.

<안드레 명상은>

안드레 명상은 1991년 당시 교회 성도들의 신앙 교양지로 출발했는데 이 글이 삽시간에 전도지로 사용되면서 전국 교회 선교회는 물론 3군 사관학교를 비롯한 군부대, 교도소, 병원, 직장신우회 그리고 해외 38개국으로 퍼저 나갔습니다. 매호 8만부가 발행되어도 그 수요를 충족치 못했습니다.

안드레 명상은 1호에서 50호까지를 모아서 국민일보와 바울서신사에서 이미 두권의 책을 발행했습니다.
한편 1998년 IMF 여파로 안드레 명상의 동역자들이 없어지면서 74호에서 발행이 중단되고 75호부터 인터넷으로 나갔습니다.

그동안 기존의 많은 독자들이 안드레 명상을 다시 전도지로 사용할 수 있겠끔 요청이 쇄도하여 지난번 92호부터 다시 발행 했습니다.안드레 명상은 무료로 기증되며 특히 현재는 아직 동역자가 없어 개인 자비량으로 인쇄합니다.

그래서 이 글을 보신후 버리지 마시고 꼭 권하고 싶은 분에게 이 글을 전해 주십시오.
이 한 장의 글이 앞으로 그 분의 인생관을 어떻게 변모시킬지? 그것은 아무도 모릅니다.


- 안드레 명상을 전도지로 사용할 때는 전체를 그대로 복사해서 사용해도 무방합니다. 그러나 부분적으로 발췌 복사 사용은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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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견(총 1 개)
  • evergra2009-01-08 18:37:04

    진심으로 쾌유를 손모아 빕니다.여호와 하느님의 은총이 김남옥님의 가정에 내려주시기를 간곡히 기도합니다.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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