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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09-01-02 18:3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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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오 국회의장이 직권상정 압박에 시달리고 있다.

송구영신의 들뜬 연말인데도, 국회 본회의장을 점거한 야당과 끝없이 직권상정을 압박하는 여당, 강공 드라이브를 늦추지 않는 청와대의 중간에서, 순국선열에게 낯을 보일 수 없다며 국립묘지 참배까지 포기한 고뇌하는 그의 모습이 너무나 안타깝다.

그의 모습을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불과 1년전까지만 해도 대통령직 인수위 부위원장을 맡았고, 골수 한나라당 핵심당직자였던 그가 이번 일을 어떻게 처리하느냐는 그의 정치역정에 큰 기로가 될 일이란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일이다.

그렇지만 김 의장은 여야 합의로 국회의장 무당적(無黨籍) 제도를 도입한 입법취지에 맞게 비교적 자유로운 정치적 결단을 내려야 한다.

비록 한나라당 출신으로 임기후 당연히 그 당적을 되찾겠지만, 정권 초기의 극도로 혼란한 상황을 잘 수습하게 된다면, 무당적 국회의장으로서 한 그의 최상의 합리적 결단이 장래 당 원로로서의 활동에 어떠한 제약도 될 수 없다. 오히려 현명한 결단을 통해 의정혼란을 수습한 인물로 길이 남게 된다.

적어도 여·야당은 더 이상 양보가 어렵게 보인다. 극단적인 대치와 폄훼는 이미 도를 한참 넘어섰다. 더욱이 단전·단수로써 인간으로서 견딜 수 있는 한계를 맛보게 해야 한다는 말은 시정잡배들, 깡패들이나 할 얘기다. 이렇듯 이미 제각기 자기 당의 압박과 강력한 청와대 의지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양당에 해법을 찾으라고 하는 것은 곧 현재의 대치정국을 계속하라는 말과 다름 없다.

국회법에 의하면 사실 ‘직권상정’이란 말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다. 동법 제85조의 특별절차가 있을 뿐이다(“의장은 심사기간을 정해 안건을 위원회에 회부할 수 있으며 위원회가 이유 없이 기간 내에 심사를 마치지 아니한 때는 중간보고를 들은 후 다른 위원회에 회부하거나 바로 본회의에 부의할 수 있다”). 그러나 직권상정에도 요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김형오 국회의장으로서 취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해법절차는 무엇일까. 우선 강공으로 밀어붙이는 여당의 분위기를 다소 안정시켜야 한다. 그리고는 다음의 순으로 문제를 풀어주면 좋을 듯하다.

첫째, 위헌판결을 받았거나 올해로 효력이 정지되는 법안과 경제살리기법안·예산부수법안·사회개혁법안 중 “순수하게” 당장 시급한 법안은 바로 처리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 중에도 소관 위원회에서 충분한 논의를 거치지 않은 법안이 있다면 이는 재검토해야 한다.

둘째, 적어도 앞장서서 협상에 임하는 원내대표 등이 발의한 법안들, 이른바 홍준표법안, 나경원법안 등은 내용상 극도의 국민분열을 초래할 수 있으므로 스스로 자기의 발의법안을 유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자기 법안을 관철시키려다보니 이런 사태까지 이른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

셋째, 발의 또는 수정발의한 지 며칠 되지 않는, 국회법상의 절차 하자가 있는 법안들은 최대한 절차에 맞도록 진행해야 한다. 직권상정에 무임승차하려던 법안에 제 발목 잡히는 일은 하지 않는 것이 타당하다. 이러한 법안들은 이번 처리목록에서는 제외해야 한다.

넷째, 김형오 국회의장은 과거의 직권상정에서 지혜를 발휘했던 사례를 교훈삼아 더 이상 all or nothing의 관점에서 법안을 바라봐서는 안된다. 직권상정 요청법안이 의장에게 제출되더라도 그 중 문제 없는 법안은 본회의 상정하고, 문제가 심각한 법안과 보다 충분한 재논의과정을 거치거나 여론수렴을 요하는 법안들은 더 검토를 요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불과 수년전인 2006년 5월, 지금은 비록 뒤바뀐 입장이지만, 김원기 의장이 직권상정 요청된 법안 16개 중 합의가 덜 된 로스쿨법안 등은 이를 재논의토록 되돌려 보내고 당시 시급한 도정법·재건축초과이익환수법 등 4개만 상정하려다가 결국 동북아역사재단법 등 3개를 추가하여 7개 법안을 통과시킨 전례도 있다.

이를 간략히 정리해 보자. 여당에서 스스로 직권상정 요청법안을 최소화시켜라. 적어도 원내대표 등은 자기 제출 법안을 유보하는 등 모범을 보이라. 발의한지 며칠 되지도 않은 절차하자 법안은 제외하라. 국회의장도 요청받은 법안을 엄밀히 선별하여 본회의에 직권상정하라.

소수 야당에게 자기 정체성을 포기하도록 무조건 양보만을 요구하는 것은 타당하지 못하다. 여·여당이 이러한 해법을 쉽게 받아들이기는 어렵겠지만, 적어도 김형오 국회의장이 이러한 의지를 천명한다면 야당도 이를 믿고 본회의장 점거를 해제할 것으로 본다.

우리 국민들은 김형오 국회의장의 통 큰 정치적 결단을 기대한다. 그리고 어쩌면 지금, 상실(喪失)의 시기에 그의 합리적 판단에 환호를 보낼지도 모른다.



[한나라당의 직권상정 요청 법안]
(1) 위헌판결을 받았거나 올해로 효력이 정지되는 법안<14개>
공직선거법, 주민투표법, 국민투표법, 공직자윤리법, 지방교부세법, 대부업법, 의료법, 언론중재법, 신문법, 방송법, 지상파TV의 디지털 전환과 디지털방송 활성화 특별법, 인터넷 멀티미디어 방송사업법, 전파법, 저작권법 등
(2) 경제 관련 법안<43개>
채권추심법, 한·미FTA비준동의안, 국가재정법, 외국환거래법, 은행법, 금융지주회사법, 공정거래법, 산은법, 한국정책금융공사법, 자본시장과 금융투자업에 관한 법, 예금자보호법, 주식회사의 외부감사에 관한 법, 한국주택금융공사법, 중소기업은행법, 농림수산업자신용보증법, 신용보증기금법, 기술신용보증기금법, 여신전문금융법, 신용정보 이용·보호법, 한국토지주택공사법, 토지임대부 분양 주택 공급 촉진 특별법, 공공토지 비축법, 국토 계획·이용법, 토지이용규제기본법, 측량·수로조사·지적법, 자동차관리법, 자동차손해배상보장법, 건축법, 산업기술혁신촉진법, 에너지기본법, 석유·석유대체연료사업법, 중소기업창업지원법, 산업집적활성화·공장설립법, 한국환경공단법, 수도법, 사회복지공동모금회법, 국민연금과 직역연금 간 연계에 관한 법률, 식품위생법, 혈액관리법, 도시·주거환경정비법, 개발제한구역 지정·관리 특별법, 지방자치단체를 당사자로 하는 계약에 관한 법, 제주도특별법 등
(3) 사회개혁법안<13개>
통신비밀보호법,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 국가공무원법, 지방공무원법, 북한인권법, 교원노조법, 초·중등교육법, 학교용지 확보 특례법, 정보통신망법, 국가정보원법, 대테러활동법, 불법집단행위에 관한 집단소송법, 비영리 민간단체 지원법 등
(4) 예산 부수 법안<15개>
지방세법, 교육세 폐지법, 농어촌특별세폐지법, 교통·에너지·환경세 폐지법, 주세법, 한국수출입은행법, 국가균형발전특별법, 승강기 제조·관리법, 한국과학기술원법, 문화산업진흥기본법, 산업안전보건법, 지방교육재정교부금법, 한국대학교육협의회법, 한국전문대학교육협의회법, 한국연구재단법 등


[덧붙이는 글]
현재의 입법전쟁이 원만히 해결될 수 없을 것인가. 여야가 양보하더라도 청와대의 개혁의지가 워낙 강해 쉽게 해결될 기미가 없다. 김형오 국회의장이 여와 야, 청와대, 그리고 우리 국민 전체를 감싸는 해법을 찾을 수는 없는 것일까? 그의 현명한 해법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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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봉기 취재기자 신봉기 취재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 (현)경북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독일 뮌스터(Muenster)대학교 법과대학(법학박사), (현)국무총리행정심판위원회 위원, 국회 입법지원위원, (현)한국지방자치법학회/한국토지공법학회/한국비교공법학회 부회장, (전)헌법재판소 헌법연구관보, 동아대학교 법과대학 교수, 한국공법학회 연구이사, 사법시험(2005, 2007) 및 행정고시(2003, 2001) 2차시험위원, 전국시장군수구청장협의회 정책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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