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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08-12-24 22:3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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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대학교 법과대학 정극원 교수
중국 장가계(원가계), 황룡동굴


아래가 방향이다.
물의 흐름이 그렇다.
흐름은 정지와는 반대개념이다.
물의 흐름은 두 가지의 운동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 첫째가 앞서서 흐르는 것이다.
그 둘째가 밀려서 흐르는 것이다.

앞서서 흐르는 물은 소리로서도 졸졸이다.
그래서 맑고 소박하며 시원하다.
밀려서 흐르는 물은 소리로서도 귓청을 찟는 폭발음이다.
그래서 불가항력이고 그 거대함이 노도같다.
앞서서 흐르는 물은 인간의 일상에 해갈이 되지만,
밀려서 흐르는 물은 인간의 일상을 송두리채 앗아가는 재제어할 수 없는 수마가 된다.
앞서서 흐르는 물이 계곡맑음을 만든다며,
밀려서 흐르는 무지막지한 분노같은 대홍수를 만든다.

위로가 방향이다.
산의 솟아남이 그렇다.
산은 그 솟아남으로 인하여 장엄하다.
산은 그 솟아남으로 인하여 웅대하다.
산은 하늘을 찌르려는듯 가파르게 솟아나서 장엄하다.
산은 지구를 다 덮을듯 원만하게 터잡아 솟아나서 웅대하다.
가파르고 가파르게 솟아나 장엄한 장가계에 발을 들인다.

장가계가 천하를 호령하고 있다.
장가계는 장씨의 성을 가진 토족들이 사는(점령한) 곳이라는 데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장가계가 인간을 호명하고 있다.
그 호명에 응답을 할 수가 없다.
아직 하늘의 끝간데를 찾지 못한듯 하늘로만 솟은 바위산들이 섬뜩하다.
그 바위의 형상을 무엇으로 형용할 수 있을 것인가?
그 바위의 절묘함을 어떤 탄성으로 감탄할 수 있을 것인가?
유구무언이 된다.
유심무형이 된다.

장가계에 솟은 바위산은 이미 인간의 격이 아니다.
지상에서 2,000미터까지도 기둥처럼 홀로 솟은 바위들이 즐비하다.
마치 자신의 몸체를 기둥삼아 하늘을 지붕으로 만들듯 하다.
이 장엄함들을 형용할 수 없다면 그 무엇으로 설명될 것인가.
그것은 애절한 사무침인가.
그것은 절절한 염원인가.
그것은 불멸의 환상인가.
그것은 불굴의 집념인가.
이 장엄한 풍광앞에 의식이 혼절하고 만다.
아연실색하고 만다.

다투고 싸우는 상쟁이었을 것이다.
애초에는 서로 하늘을 향하여 서로 다투어 자라는 나무들처럼 바위들이 그렇게 다투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상생을 하고 있다.
다툼을 마친 바위들은 저마다가 자기모습을 찾은듯
어느 바위는 그 형상이 기둥이 되고,
어느 바위는 그 형상 지팡이가 되고
어느 바위는 그 형상 붓이 되고,
어느 바위는 그 형상 빗이 되고 있다.
바위들은 저마다의 고유한 형상을 내세워 서로 조화하는 상생을 하고 있다.
바위로 솟은 산들의 그 절묘한 조화에 또 다시 의식이 혼미하여 온다.

구름이 하늘을 가린다.
구름이 아니더라도 하늘은 솟은 바위들의 절경이 부끄러웠을 것이다.
안개가 시야를 가린다.
안개가 아니었다라도 인간은 차마 이 장엄함을 바로 응시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바위의 난간을 비집고 선다.
구름에 가린 어필봉이 그 위용을 드러내기를 염원한다.
어필봉은 선한 사람에게만 그 모습을 보여준다고 한다.
어필봉이 그렇게 사람을 차별하지는 않을 것이다.
적덕과 적선이 그렇게 가로막고 있는 것이다.
우리들의 적선이 부족하지 않은듯 어필봉이 그 모습을 보여준다.
눈으로 직시한다.
마음으로 심미한다.
눈과 마음에 담기에 너무나 형형하다.

마음이 가난하면 몸은 행복이 된다.
몸이 부자가 되면 마음에 행복이 줄어든다.
몸이 바쁘면 마음이 행복하다.
마음이 바쁘면 몸이 고달프다.
몸의 의도를 멀리하고 마음의 의지로 어필봉을 본다.
형형한 모습이 선명하다.

어필봉이 저 혼자 내보이기에는 겸연쩍은듯
좌우로 나란히 솟은 바위기둥을 대동하고 있다.
좌의 바위가 서까래처럼 가는 바위라면
우의 바위가 동량처럼 굵은 바위이다.
어필봉이 저 혼자 우뚝솟은 것이 쑥스러운듯
앞뒤로 더 높이 나래를 펼친 바위기둥 사이에 도열하고 있다.
도열한 것이 어디 보이는 것 그것 뿐이랴.

군집한 인간의 밀집한 도열을 따라
바위산들의 듬성한 도열을 간산한다.
탄성을 지르면 아름다운 메아리가 된다.
탄성을 지르면 그 탄성은 산아래로 산화되고 만다.
탄성이 위로 올라가기에는 바위들이 너무 높이 솟아있기 때문이다.
형용의 언어 하나를 겨우 찾아낸다.

집대성.
바위들이 학문의 완성처럼 그렇게 비경을 집대성하고 있다.
그 비경은 이미 천상이며
그 절경은 이미 천하가 된다.
세상에서 제일 높은 천하제일교 아래를 내려다 본다.
그 난간의 끝을 볼수가 없다.
너무나 깊어 마음으로 측정할 따름이다.

인간은 상념한다.
바위들은 묵언한다.
계곡은 활행으로 바쁘다.
산능선은 새침으로 적요하다.
타래를 잃어버린듯 상념을 도난당한다.
삼림공원표석을 뒤로하고 접어든 계곡이 인간의 상념을 송두리째 앗아간다.
계곡을 흐는 맑은 물의 활행이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계곡을 이어서 솟은 봉우리들의 절경을 보고서 심사는 벌써의 묵언의 바위를 닮아버린다.
장대한 봉우리를 보고서 장군을 닯았다고 한다.
빗줄기같이 세세하게 솟은 봉우리를 보고서 대나무를 닮았다고 한다.

십리화랑(산의 바위가 연출해내는 경관이 마치 화랑같다는 데서 유래)에 들면
손톱을 세워 세상의 지침을 주는 바위가 선두에 서있다.
약초캐는 노인이 살아움직이듯 정교하다.
산의 중심을 차지한 책을읽는 통바위가 그럴듯하다.
전설을 오늘에 이어오는듯 세자매바위가 우애롭다.
그 바위의 형상에 언어를 잃는다.
혼절에 깨어나듯 바위의 심중에 담은 의미를 연역하려 시도한다.
그것은 아마도 유구함일 것이다.
순간이 아니라 영겁일 것이다.
인간들이 그러한 것을 배우라고 하는듯 하다.
인간들이 그러한 것을 지고의 가치로 하라는듯 하다.

황룡동굴.
경지를 본다.
세계에서 제일 크다는 수식어가 한없이 부끄럽다.
굴지라 한다.
손까락으로 꼽아 가르킬 정도의 탁월한 것을 말한다.
차마 손가락으로 가르키기에는 인간이 너무 왜소하다.

승화라 한다.
인간의 마음이 하늘을 감동시킨다는 것이다.
아마도 하늘이 볼 수만 있었다면 이 황룡동굴은 이미 승화를 초월하였을 것이다.
황룡동굴은 이미 동굴의 경지를 넘었다.
황룡동굴은 이미 승화에 접어들었다.

초아의 경지이다.
동굴에 들어서면 밖의 무더위에서 도피할 수 있겠다는 욕심이 부끄럽다.
자신의 본래를 망각하게 하는 동굴의 비경앞에 서면 그렇다.
행복과 장수의 입구문의 하나를 선택하려 했던 이기심이 부끄럽다.
자신의 전부를 깡그리 잊게 하는 동굴안의 절절한 석주와 종류석을 바라보면 그렇다.
동굴에 들어 천상의 세계가 보잘것 없음을 느껴본다.

소원하지 않아도 좋다.
인간의 이루려고 하는 바램이 허망한 것이다.
석주와 종류석이 만들어낸 장엄하고 오묘한 경관을 보면 그렇다.
인간이 얻으려고 하는 것이 지극히 이기적인 것일텐데,
석주와 종류석이 표현하고자 한 것의 이 장엄함은 얼마나 창대한 것인가.
세상에 더 바랄 그 무엇이 있을 것인가.

감탄할 수도 없다.
우리는 보이는 것이 조금 나아 보이는 것에 감탄한다.
우리는 들어나는 것이 조금 더 숙연하여 보이는 것에 탄성한다.
우리는 들어나는 것이 조금 더 지혜로운 것에 탄복한다.
기존의 것이 존재하고 비교할 수 있기에 그렇게 감탄하는 것이다.
황룡동굴이 만들어낸 절경과 비경은 기존의 것이라곤 없다.
황룡동굴의 석주와 종류석의 형상은 너무나 웅대하고 너무나 세세하여 비교할 수 없다.
그래서 감탄의 탄성도 지르지 못한다.

몰아일체이다.
천상의 세계를 알 수 없다.
계시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굴의 세계를 알 수 있다.
황룡동굴이 있기 때문이다.

황룡동굴안에서는 지구를 만난다.
미명에서 막 깨어나는 천지창조가 있다.
인간의 것에 소용되는 모든 물건이 있고
인간에 의하여 상념되는 모든 형체가 다 준비되어 있다.
짐승이며, 로켓트이며, 부처이며 모두가 실물같다.
자신을 잊어 동굴에 일체가 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왜소함이 너무 부끄러워 일체에 편승하고 있는 것이다.
누가 동굴에 관하여 묻는다면 그래도 외마디 말을 하리라.
"저기 황룡동굴을 가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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