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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추리 원추리의 겸손함을 본다 2010-07-24
정극원 jkw@daegu.ac.kr
원추리

원추리의 계절이다.
어즈버 원색으로 피어나고 있다.
세상에 내보일 것이 참 많은가 보다.
줄기보다는 열 배는 더 큰,
붉은 꽃을 활짝 피우는 것이다.
근심을 덜어주기에 망우초라고도 부른다.
가까에서 보니,
원추리가 꽃피우는 방향은 하늘이 아니다.


그 고도가 이미 하늘에 닿은 산이다.
그 고도의 산에서 피는 원추리이다.
하늘에 맞닿아서 피는 것이다.
그러함에도 원추리는 하늘바라기가 아니다.
원추리는 수평을 응시하면서 피는 것이다.
그 향함이 산길을 걷는 사람의 눈높이인 것이다.

겸손이다.
원추리에서 그것을 본다.
바람결을 타고서 사방을 두리번거려도 본다.
더 멀리에서 꽃에게 다가갈 수도 없다.
자신이 정한 땅을 맴돌수밖에 없다.
그러니 다 수용하는 것인가 보다.
수용할 수 있으니 겸손한 것이다.
겸손은 배척하지 않음의 다른 의미인 것이다.

시간이 빠르다.
기력으로 움직이는 것보다는,
무기력으로 보내는 시간이 더 많아서 그렇다.
정의로운 것이 활행하는 것보다는,
부정의가 더 많이 활개를 치기에 그렇다.
관심으로 맞이하는 것보다는,
무관심을 맞이하는 것이 더 많아서 그렇다.
그러하면 안되는 것인데,
세상은 더 많이 그렇게 기울고 있다.




참 많이 움추린다.
그런 세상의 소란에서 피난하고 싶어서 그렇다.
그런 세상의 기움에서 회피하고 싶어서 그렇다.
세상을 향한 거침없음에,
사심을 버리고 대의만 행하면 되는 줄 알았다.
부정의가 공간을 매운 곳에서는,
그 조차도 소란에 불과한 것이 된다.

세상이 그러하다면,
경쟁의 승자를 정하는 것조차도,
그 저열하고도 치밀한 사심을 채우기 위한 것이다.
그러한 방식이 더 통하는 통한의 외로움이 엄습한다.

인간의 질서가 사욕이 지배한다 하여,
중턱보다는 더 높은 곳에서 피고 있는 원추리가 식음을 전폐할리도 없다.
철이 되면 원추리는 지치지 않고 피어날 것이다.
그 향함이 사람의 눈높이라는 것은 불변함이다.
원추리의 꽃피움은 사람의 눈높이에 맞추는 것이지,
결코 하늘에 아부하지는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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